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점심시간이다. 모두들 점심식사 준비를 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그리고 갈매기들도. 건너편 아파트의 주방이 훤히 보인다. 발코니가 주방이다. 등을 보이고 점심식사준비를 하는 한 남자가 있다. 백발에 긴 머리, 그리고 머리 중앙이 비어있다. 피부는 햇볕에 일상적으로 그을린 듯하다. 프라이팬을 불판 위에 놓고 무엇인가를 익힌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그래서일까? 두 마리의 갈매기 - 커플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는 - 가 긴 날개를 펄럭이며 한 마리는 남자의 집 지붕인 옥상에, 다른 한 마리는 남자의 부엌인 발코니의 난간에 가볍게 앉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띈다. 발코니의 난간의 갈매기는 남자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남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조미료를 뿌리고 뒤집고... 손놀림이 여유롭다. 그리곤 뭔가 가득한 프라이팬을 통째로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소식이 없다. 갈매기는 이젠 남자가 들어간 곳을 향해 뚫어져라 보고 있다. 순간 인형인가...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갈매기는 의미심장하게 부리를 아래위로 움직인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지만 무척 수다스럽다. 부리를 허공에 대고 쪼아댄다. 초조함이 역력하다. 움직임이 커서 공기마저 울리는 듯하다. 그래도 남자는 대답이 없다. 그렇다면, 소통하는 방법을 바꿀 수밖에.... 갈매기는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더니, 하늘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른다. 한 번, 두 번... 모든 사람이 그 소리에 놀라 잠시 허공을 두리번 거림에도, 아마도 그 소리는 남자에게 제일 늦게 가 다은 듯하다. 잠시 후 천천히 밖으로 나온 남자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하나, 둘, 그리고 세 번째 것을 갈매기 부리에 넣어준다. 갈매기는 부리에 닿는 대로 꿀꺽꿀꺽 온몸으로 받아넘긴다.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없어" 하더니, 너무 맛나게 먹는 것 같았던지 한 마디 물어본다 "그렇게 맛있어?" 두 말할 것 없다 "정말 맛있어!!" 갈매기의 냠냠 소리가 내 귓가에 울린다. 남자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지만, 너무 맛있었는지, 아님 기다림에 허기가 다 가시지 않았는지... 갈매기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다시 남자를 부른다. 남자는 알고 있었다는 듯, 다시 나와 갈매기에게 다가선다. 손에는 뭔가를 들고 있다. 그러나 선뜻 갈매기에게 주지 않고 한마디 또박또박 "이게 마지막이야, 알겠어?" 하더니, 갈매기 부리에 냉큼 넣어준다. 갈매기는 남자를 이해했을까? 꿀꺽! 하더니 저 하늘 멀리 훨훨 날아간다.
갈매기와 남자가 어떤 인연으로 만나고 관계를 맺었는지 난 모른다.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남프랑스 바닷가 작은 마을에 숙소를 잡고, 숙소 발코니에서 첫 점심 식사를 하면서 남자와 갈매기의 점심식사를 보게 되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휴가 내내 그들의 일상적인 점심식사 광경은 매일의 드라마를 보는 듯 내 일상이 되었다. 여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가뭄이라는 근심을 안고 있었지만, 맑고 푸른 하늘은 엄마 품 같이 푸근했고, 근처 농장의 당나귀는 익살스럽게 말을 걸어오고, 시프레스 나무들을 오가는 앵무새들은 오래된 이웃을 반기는 듯 정겹게 노래를 부른다. 게다가 갈매기와 남자의 점심식사를 일일 드라마로 보는 즐거움이란 더없이 한가로웠다. 그렇게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을 보내는데 무득 그림책 한 권이 생각났다. "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게 있다면(ce qui serait bien)" 카롤린 그레고와르(Caroline Gregoire)가 쓰고 그려 에꼴데로와지르(l'ecole des loisirs) 출판사에서 2001년 출간한 프랑스 그림책이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게 있다면
'친절한' 한 남자와 '가여운' 작은 새 한 마리가 만난다. '친절한' 남자는 '가여운' 새를 즐겁게 해주고 싶다. 그 마음을 이해한 새는 '더 큰 새장', '더 예쁜 새장', '더 편안한 새장', 그리고 '많은 장난감', '커다란 욕조', '매일 먹을 수 있는 맛있는 크래프'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어떻게 생각하냐며 의견을 묻는데, 남자는 두 말도 필요 없이 새에게 모든 것을 갖춰준다. 새가 너무 '가여워서'다. 그러나...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관계를 '악화시키는' 갈등의 원인 중에 하나
남자는 새를 자신과 다른 '가여운' 존재로 여기는 반면, 새는 남자를 그저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로 본다. 남자에게 새는 '열등한' 존재이다. 때문에 늘 뭔가를 줘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있다. 의견을 물어보거나 대화를 해야 할 필요조차 못 느낀다. 반면, 새는 남자를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대화하려고 한다. 그림책에서 새는 프랑스어 대화법의 하나인 '콩디시오넬(le conditionnel)'을 사용하고 있다. "제가 제안을 하나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 내 생각은 이러한데, 그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상대에게 어떤 의견이든 대답할 여지를 주는 열린 대화 기법이다. 그러나 남자는? 남자는 새의 말을 듣긴 듣는다. 단, 자신이 새보다 우위에 있다는 우월감의 위치에서만 듣고 있다. '가여운' 존재에게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있을 뿐이다.
남자는 주다 주다 지쳐간다. 남자는 '가여운' 새가 그저 자신에게 좀 더 많은 것, 좀 더 좋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엽'기 때문에 자신은 계속 '베푸는', '친절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기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기도 한다. '친절한' 남자와 '가여운' 새는 같은 집에 머물고 있으나 같이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어떤 상호 작용이 없다. '친절한' 남자가 생각하는 '가여운'새가 사는 새장은 분리된 공간이다. 공통의 공간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휴가지에서의 남자는 갈매기기와 삶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안녕", "더 이상 없어!", "그렇게 맛있어?", "이게 마지막이야, 알겠지?" 남자는 자신의 상황을 갈매기에게 그대로 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큼의 것을 나눈다. 갈매기 역시 남자가 내치지 않는다는 것은 그다음 날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이해하고 돌아간다. 그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책, "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sans détour)" 스테파니 데마스 포티에 (Stéphanie Demasse-Pottier)가 글을 쓰고, 통 오고마 (Tom Haugomat)가 그림을 그려 2022년 에따지에르 뒤 바 (L’étagère du bas) 출판사에서 출간한 프랑스 그림책에서도 같은 맥락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림책 "피하지 말고, 솔직하게 (sans détour)"는 작은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 아이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자문하며 사람들과 같이 사는 방법을 찾는다. 아이는 학교 가는 길에 매일, 아기를 안고 길에 앉아있는 한 여자를 지나친다. 아이는 여자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편하지 않다. 엄마에게 물어본다. 엄마는 정성껏 아이의 질문에 답하지만 엄마 설명이 이해하기 더 어렵다. 아이는 여자 앞을 지날 땐 다른 곳을 보기도 하고, 그 순간 자신이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갖는다. 그러나 상황을 외면할 수도 없고, 자신을 그 상황에서 지울 수도 없다. 어느 날, 아이는 자신이 좀 더 어렸을 때 늘 같이 잠자고, 놀았던 인형을 여자의 아이에게 건넨다, 미소와 함께.
이 그림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이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파리엔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다. 그들의 삶의 역사를 다 알 수 없다. 왜 나와 생활하는 방식이 다르냐고 물을 수도 없다. 나와 같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게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냐고 물으면 왜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하냐고 역으로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 다르게 생긴 것처럼 사는 방식도 다 다른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뭐라 딱히 설명할 수 없어도 '보기에' 불편한 상황은 있다. 아기를 안고 차가운 바닥에 종일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 추워보기도 하고 배고파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섣불리 뭐라 말해야 할지,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나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고 또 아이에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아이가 질문했을 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는 만큼 대답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어 할 필요는 없다. 요즘,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에 대해 아이들이 물어봤을 때 어떻게 설명할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소식을 보면서 아이의 느낌에 공감하며, 관점을 강요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상황을 설명하면서 스스로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맥락이 있기 때문에, 관점을 끼어넣거나 판단하는 것으로 흐르기 쉽다. 또 때때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각자의 관점이 반드시 상황과 맥락에 맞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책의 아이는 여자 그리고 그 아기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을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자는 것이다. 작은 미소 등 우리에게 있는 인간적인 면면을 조금씩 꺼내면서 말이다.
그림책의 이미지는 텍스트를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를 더욱더 강화한다. 그림의 색감은 빨간색, 검은색, 회색 그리고 흰색 등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아이와 여자를 표현하는 색감이 같다. 즉,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지점들에만 초점을 맞출 수 없다. 공감해야 할 공통의 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또 그림책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이뿐 아니라 어떤 누구도 그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과 행동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주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고민하는 장면은 텍스트와 그림이 하나가 되어 독자로 하여금 아이의 마음에 그대로 가 닿는데 모자람이 없다. 아이가 여자와 그의 아기 앞을 지날 때, 아이는 때론 시선을 돌리거나 때론 머리를 아래로 푹 숙여 마주할 현실을 피하려 한다. 아이의 둘러싼 두 페이지에 걸친 검은 배경은 세상과 사회의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심리를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가 눈을 감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암울해진다. 암울해진 세상에서 우리의 미래를 볼 수는 없다. 아이는 체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여자와 그의 아기에게 말을 걸고 함께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을 전한다. 어떤 판단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나는 어떻게 말을 걸까?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다른 어린이책, 아이얌 쉬로 (Ayyam Sureau)가 글을 쓰고, 필립 뒤마 (Philippe Dumas) 가 그림을 그여 2004년 에콜데로아지르 (l’école des loisirs) 에서 펴낸 "앉아 있는 남자(l'homme assis)"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6살 이상의 어린이가 볼 수 있는 이 책 역시 한 여자 아이, 아델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느 날, 아델리는 엄마와 같이 쇼핑을 한다. 한 매장 앞에서 엄마는 아델리에게 밖에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다. '금방' 나올 테니, 모르는 사람과 절대 말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말이다. 엄마가 말한 '금방'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모르는바 아니지만, 호기심이 많은 아델리는 엄마 말대로 밖에서 기다린다. 거리엔 아델리의 호기심을 끄는 것들이 무척 많다. 특히, 그 순간 어느 한 남자가 눈에 띈다. 몹시 허름한 옷을 입고 상처 투성이의 발을 모으고 앉아있는 남자는 마치 돌부처 같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말라고 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그 남자를 바라보거나 관심을 갖지 않을 이유는 없다. 유심히 관찰하듯 바라보는 아델리의 눈빛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 있던 남자의 고개를 들게 했고 아델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게 했다. 평소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델리에게서 어느새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책은 아델리가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말을 걸고 싶은데 대한 간절함을 담아 소통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게 있다면(ce qui serait bien)"의 새,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sans detour)"의 아이, "앉아 있는 남자(l'homme assis)"의 아델리는 사람에게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다. 이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 어떤 말로 시작을 할까? 등 소통하는 방법 그리고 함께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더구나 아이들이 만난 길에 "앉아있는 남자"나 길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는 아이들의 세상에서 좀 더 멀리 있는 게 사실이다. 함께 등장하는 '어른'들은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해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하다. '친절한' 남자는 작은 새에 대해 '가엽다'라고, 아이의 엄마는 사회현상에 대해 '어려운' 말로 설명하고, 아델리의 엄마는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며, 거리에서 앉아있는 남자에게 보자마자 동전 몇 잎을 던져주고 재빨리 자리를 뜬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들의 이러한 편견을 완전히 깨고 있다.
어제, 뤽상부르그 공원을 산책했다. 온통 가을빛이다. 노래 (comme d'habitude) 소리가 들려와 그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한 남자가 노래를 하고 있었고, 그 앞엔 한 작은 여자 아이가 노래하는 남자 정면에 서 있다. 아이는 휴대용 젖꼭지를 입에 물고 있었으며, 한쪽 팔로 손때 묻은 인형을 안고 있었다. 아이는 노래를 들으며 그때까지 보지 못한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듯 연한 푸른 눈을 남자에게 떼지 않은 채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유모차를 한쪽에 세우고 아이와 노래하는 남자를 번갈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나 역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풍경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아이는 노래하는 남자에게, 남자는 자신의 관객에게,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하는 모습에 그리고 나는 조금씩 기존의 편견이 깨지는 것에 행복해하며....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가능한 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피하지 않고 말을 건네고 소통을 시도하는 것을 어린이 책에서 그리고 어린이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