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멈추게 하는가? : 상수시궁전

멀지만 가까운 어떤 군주의 이야기

by 헨리 월터
20250612_111116.jpg 상수시 회화방을 나오면 계단이 하나 보이고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궁전 건물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 나온다.
20250612_130019.jpg 측면에서 담은 상수시 궁전. 궁전의 모습을 정면에서 담자니 화면이 깨지거나 온전한 크기로 들어오지 않는다.

1. 본무대를 향하여

회화방에서 작품을 음미한 후 나오면 계단이 하나 나온다. 그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출입구가 나오고 그 길을 따라가면 외관이 노랗게 칠해진 단층 궁전 한 채가 나온다. 바로 독일여행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 번은 들른다는 상수시 궁전이다. 이곳은 '걱정이 없다'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고, 프로이센의 계몽 전제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가 사랑했다고 알려진 여름 별궁이다. 그리고 지금은 유네스코에 등록된 독일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250612_130856.jpg 상수시 궁전은 사전 예약이 기본이었고, 예약을 못한 사람은 티켓 부스로 가야 했다. 티켓부스는 풍차 조형물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빨간건물 아님)

상수시 궁전에 도착하였을 때 다양한 곳에서 온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궁궐 내부를 입장할 때는 사전 예약이 필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오프라인으로 표를 끊은 후 30분에 1번 입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1명당 14유로를 끊고 입장하게 하였는데, 솔직히 회화방을 보는 데 이미 8유로를 낸 나로서는 순간 망설여지는 지점이었다. 그렇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마당에 하나라도 더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이득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표를 끊었고 1시 30분에 입장할 수 있었다.


20180127_163123.jpg 젊은 시절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화(2018년 1월 27일 독일역사박물관에서 촬영)

2. 데칼코마니를 음미하기

프로이센의 계몽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들어볼 법한 군주지만, 그 이외에는 잘 모르기 쉽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프리드리히 2세에 얽혀 있는 사연은 한국사에 대입하였을 때 유사한 단면이 하나 발견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바로 조선 제 21대 임금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인데, 프리드리히 2세도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의 관계가 원만한 편은 아니었다. 두 왕가의 공통점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 검소하면서도 자식 교육에 있어서는 어린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 정도로 무척 욕심이 많았음.

- 왕세자는 첫째가 아니었음

- 아들이 부왕을 무척 두려워하였고 자라면서 반항기를 보였음(정규교육 외의 것에 관심)

- 부왕이 왕세자를 죽이는 혹은 죽일 뻔한 면모를 보여주었음


조선 후기에는 왕자 출산이 잘 이루어진 편이 아니었고, 그마저도 일찍 죽는 경우가 잦았다. 영조에게는 효장세자가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이후였고, 자신의 나이가 마흔이 넘었을 때 태어난 사도세자를 2살에 세자로 책봉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첫째와 둘째는 부왕의 지나친 욕심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아의 머리에 억지로 왕관을 씌우기 혹은 군대 사열식에 데려갔다가 스트레스로 사망) 그럼에도 왕은 강한 아들에 대한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지 않았고, 셋째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를 2살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왕세자로 책봉하였고, 가정교사에게 엄격한 교육을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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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시 궁전 안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의 개인 서재. 부왕과 다르게 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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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시 궁전 천장의 조형들을 살펴보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악기 연주에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이러한 부왕의 욕심에 부응하던 사도세자와 프리드리히는 자라면서 부왕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정규교육 외의 것에 더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사도세자가 왕세자의 필수 과정인 유학 경전에 대한 공부보다는 잡학이나 무예에 관심을 보였다면, 프리드리히 2세는 어린 시절 국왕의 방식에 불만을 느낀 가정교사 덕에 악기 연주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부왕 몰래 악기를 연주한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학문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나약한 것들이 음악과 학문을 찾는다'는 부왕의 생각과 어긋난 방식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왕가의 법도는 두 왕세자에게는 고통이었고, 결과적으로는 부자관계의 파국으로 이어졌다. 사도세자가 공부는 물론이고 대리청정에서의 스트레스 끝에 정신병을 얻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엄격한 군대식 교육에 더해 마음대로 결혼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을 참지 못하고 국외로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두 왕세자의 길은 달라졌다. 전자가 왕을 죽이려 든다는 고변에 휘말려 뒤주 속에서 최후를 맞았고, 부왕은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바로 22대 임금인 정조다. 그와 다르게, 프리드리히 2세는 사형 선고 직전까지 갔음에도 목숨은 지켜냈다. 대신 그의 친구이자 연인과 같이 가까운 사이였던 한스 폰 카테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봐야 했다. (부왕이 아들을 가둬놓은 채 눈앞에서 카테를 사형시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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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시 궁전의 내부 모습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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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시 궁전의 내부 모습 중 일부. 음악과 관련된 공간(좌)과 아시아의 문화에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는 공간(우)

그와 같은 기묘한 과정을 거친 끝에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 프로이센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왕위에 있는 46년 간 당시 유럽의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도 문화적인 면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로코코 양식의 대명사인 상수시 궁전을 지었음은 물론이고, 내부에 학문의 공간과 자신의 예술 감수성을 반영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유명한 계몽사상가였던 볼테르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스스로 제 1의 공복으로 자처하였다. 공과를 막론하고 분명한 지점은 그의 치세 동안 프로이센이 유럽의 주요 강국 중 하나로 떠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20250612_135345.jpg 프리드리히 2세는 상수시 궁전의 의자에 앉은 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 상수시를 떠나며 (feat 행복)

상수시 궁전 내부를 도는 내내 한 가지 궁금하였던 지점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이 되고 나서도 정말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에 취할 수 있었을까? 재위 기간 내내 그는 아내와 잘 지내지 못하였다. 생식기에 문제가 있었던 점도 있었지만, 자신이 뜻하였던 바에 따라 맞아들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양아들이라도 자식을 두는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왕정 체제 하에서 정통성을 갖춘 후계자를 두는 문제가 중요하였음을 생각하였을 때, 이례적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았다. 그러면서도 타 귀족 집안의 부인들과 만날 일이 있을 때 종종 성적 농담을 즐겨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한 생활 모습을 보여주던 프리드리히 2세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차기 왕위는 조카에게 넘어갔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던 손자 정조가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면서도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것과는 다른 맛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프리드리히 자신에게는 가족이란 무엇이고 왕으로서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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