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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콜로세움에서 메타버스의 뿌리를 찾다

by 신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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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은 전쟁 포로인 검투사와 맹수의 전투 경기가 벌어진 원형 경기장입니다. 이 콜로세움을 건설한 사람이 네로 황제의 조카이자 네로 다음 황제였던 베스파시아누스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9년 11월 17일~79년 6월 23일)는 로마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였습니다. 미친 네로가 로마를 불태우며 하프를 연주할 때 지금의 콜로세움이 위치한 팔라티노 언덕과 에스퀼리노 언덕 사이는 빈 공터였습니다. 여기에 네로는 자신을 본뜬 거대한 석상이 있는 황금 궁전을 지었습니다. 어떻게든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던 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금 궁전을 헐고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콜로세움을 지어 민심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콜로세움은 라틴어로 원형 경기장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원래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콜로세움이 1호 콜로세움이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이후 로마에서는 황제들이 여기저기에 검투사들이 싸우는 원형 경기장을 짓습니다. TV도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없었던 시절에 콜로세움은 지금으로 치면 영화에 스포츠를 합친 최고의 대중문화였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8권에서 오늘날에도 도시 로마를 삽화 하나로 표현하고 싶을 때 누구나 콜로세움을 떠올린다고 쓴 바 있습니다.

지금은 영화 <글래디에이터> 때문에 콜로세움 하면 검투사 대 검투사의 목숨 건 승부, 검투사 대 호랑이의 대결이라는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기 쉽지만 원래부터 그런 극악무도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황금 궁전에는 넓은 인공호수가 있어 뱃놀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를 이상향으로 생각하던 폭군 네로는 로마를 그리스식 아르카디아(이상향)로 바꿀 작정이었죠. 5만 명의 경기장에서 황제와 시민들이 함께 즐기면서 통치 기반도 다지려는 포석이었습니다. 콜로세움에는 지금도 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는 배를 띄워 놓고 검투사들이 진짜 해상 전투를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콜로세움은 미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도 최고의 걸작이었다고 합니다. 사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출입구를 교묘히 배치하여 사고가 일어나면 15분 만에 모든 관객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니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정말 대단합니다. 검투사들과 싸우기 위해 무대에 올라오는 맹수들은 엘리베이터로 이동해 담당자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답니다. 더 놀라운 점은 로마의 강렬한 햇빛으로부터 관객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낮에는 마치 지금의 개폐식 돔 경기장처럼 지붕을 덮었다고 합니다.

고대에 콜로세움 내부에서는 검투사들의 경기 외에도 사형수들의 처형, 모의 해전 등이 펼쳐졌습니다. 그리스도교도들이 맹수들에게 잡아 먹혔지요. 콜로세움은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존재 이유를 잃습니다. 검투사들의 죽음을 건 대결도 막을 내립니다. 콜로세움은 석재 공급처로 바뀌어 석판들도 모두 제거된 채 지금처럼 뼈대만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콜로세움이야말로 고대의 메타버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인들의 대부분은 노동에서 벗어나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면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다가 한자리에 모여 눈 앞의 스펙터클을 보면서 지루함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날려 버렸습니다. 현대의 메타버스가 바로 그런 기능을 하고 있죠. 현실보다 더욱 짜릿하고 드라마틱하면서 자신을 슈퍼맨(정확히는 자신의 아바타를 슈퍼히어로처럼 만들 수 있는)으로 만들 수 있는 메타버스의 시스템과, 검투사가 다른 검투사를 때려눕힌 뒤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기 전에 관객들에게 결정권을 넘겨주는 콜로세움의 시스템은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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