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이면 생각나는 영화와 책이 있습니다. 우선 책 이야기. 한겨레신문의 일본 주재 기자를 거친 일본 전문가 한승동 씨가 번역한 ‘종전의 설계자들(하세가와 쓰요시 저)’는 일본제국의 패망에 대해서 우리가 배운 역사적 지식이 올바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죠. 우리는 일본 군부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터진 원자폭탄 2방 때문에 항복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사실은 그 폭탄 두 방 때문이 아니라 중재자로 믿었던 소련이 일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 소만 국경을 넘어 100만 대군이 지키고 있는 만주국의 수도 하얼빈으로 돌진한 것이 항복을 결정한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죠. 당시 소련의 육군은 이미 인류 최강의 육군이었던 독일군을 꺾은 상태라 관동군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코프 추이코프 등 1군은 다 빠지고 2군으로 구성된 군대와 장성 메르초크프로 참전 1주일도 되지 않아 프랑스와 독일을 합친 땅보다 더 큰 만주의 관동군을 궤멸시켰습니다. 이어 15일쯤에는 두만강 국경을 넘어 북한에 주둔하고 일본군을 빠른 속도로 무장해제시키고 있었죠.
항상 이 시점에 기억되는 영화는 67년에 제작된 일본의 유명 영화 ‘일본의 가장 긴 하루’입니다. 이 영화는 하세가와의 주장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죠. 이 영화는 당시 일본 최고의 인기 배우 미후네 도시로(구로자와 아키라와 찰떡궁합으로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등의 주연이었죠.)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54편 중 52편에 출연한 또 한 명의 국민 배우 류 지슈가 각각 육군대신 아나미 고래치카와 스즈키 킨다로 수상 역을 맡는 등 그야말로 올스타가 출연한 영화였습니다. 해군 대신 요나이 미즈마사 역을 맡은 야마무라 쇼도 ‘아들을 동반한 무사’ 시리즈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였습니다.
영화에서는 7월 26일 미영중(당시 소련은 잠전 전이었죠.) 포츠담 선언부터 시작해 15일 항복까지 20여 일간 수상을 비롯 내각들이 밤 밤을 거의 못 자고 계속해서 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레이터는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회의 중간중간 쉬면서 수상을 비롯 각료들은 여러 가지 사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상상은 소련군이 만주는 물론 조선반도를 거쳐 규슈까지 상륙해 일본을 점령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일부는 홋카이도를 통해 내려올 수도 있었죠. 일본은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있었던 미국의 군사력보다 당시 세계 최강의 육군과 공군을 보유했던 히틀러를 결국은 무너뜨린 소련의 군사력을 더 위협적으로 본 겁니다. 당시 일본의 심정은 이 두 가지 정서로 딱 요약될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너무나 부럽고 소련은 너무나 무섭다. 특히 노몬한에서 소련군 정예 부대와 붙어 참패한 일본 육군이 소련에 대한 공포가 더 컸습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고 원폭 투하가 시작된 전 날까지도 소련과 접촉하며 항복의 중재자를 요청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소련에 내건 대가는 만주를 넘겨준다는 것이었고 대신 조선 반도는 자신들에게 남겨 달라는 요구였죠. 그런데 ‘종전의 설계자들’을 보면 소련이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루스벨트가 놀라운 제안을 스탈린에게 카이로에서 한 것으로 나옵니다. 홋카이도를 요구했던 스탈린에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대신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땅이 된 키릴 열도의 반환과 그리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재앙이었던 한반도를 반으로 나눠 그 북쪽을 책임지라(동유럽처럼 위성국으로 만들든 말든 상관 않겠다는 뜻)는 유혹이었죠. 미국은 유럽의 막강한 히틀러와 전면전을 벌이던 영국과 소련과 달리 아시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일본을 상대하며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는 승승장구하며 승리를 눈앞에 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의 운명을 자신들이 결정하려 했습니다. 그동안 흘린 피가 얼마인데(총 10만) 독일에게 패배 직전까지 갔다가 전 인구와 전 생산력을 모두 전쟁에 투입해 정말 힘들게 승리한 뒤 아시아에서는 전쟁 끝날 때쯤 막판에 밥 숟가락을 얹는 소련과 일본의 본토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그래서 소련의 요청(최소한 독일처럼 일본도 분할되어야 한다는)은 완강하게 거부했던 겁니다. 그 대신 대안으로 한반도의 분할을 미국이 먼저 제안했다는 사실은 미국을 구세주로 여기는 많은 한국의 보수 세력들에게는 정말 믿기지 않은 역사적 사실일 겁니다. 당시 루스벨트는 키릴 열도는 물론 한반도에 대해서도 사전에 알고 있는 지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공황을 이겨낸 미국의 대통령으로 2차 세계 대전에서 히틀러와 일본 군국주의를 동시에 꺾은 위대한 대통령인 그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우리가 키릴 열도와 같은 대우, 아니 그보다 못한 대접을 두 강대국 간의 회담에서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뼈 아프게 느껴집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면 영화는 8월 14일 어전 회의에서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개진하던(히로 히트가 정치에 개입한 건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36년에 있었던 226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41년 도조 히데키의 수상 임명 그리고 항복의 결정이 다입니다.) 천황이 전날 7시에 녹음 방송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이 녹음테이프를 찾기 위해 일본의 군인(당시 황궁을 지키던 근위대도 포함돼 있습니다.)들이 하루 동안의 반란을 일으켜 황궁을 점거하고 이를 반대하던 황궁 근위대장의 목을 베는 장면이 나옵니다. 천황을 위해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육군의 반발(당시 일본 내에서만 227만 명의 육군이 있었고 이를 오키나와에 있던 100만 명 남짓한 미국의 육군으로 격파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트루먼 대통령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련이 본격 참전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키고 싶었고 일부 과학자들의 반대(그 핵폭탄은 나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거지, 일본의 도시를 폭격하는 용도가 아니라는)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원폭 투하를 결심한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15일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는 미국이 더 이상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거죠. 일본 군부 및 내각은 정확히 미국이 몇 개의 핵무기를 더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항복을 미뤘다가는 최악의 경우(소련군의 일본 본토 상륙)를 맞이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육군대신 아나미는 항복에 동의한 겁니다. 만약에 쿠데타가 성공해서 반란군이 천황이 녹음한 테이프를 찾아냈고 천황을 궁에 가둔 뒤 싸우자고 설득해서 천황이 마음을 바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관동군을 3일 만에 박살 낸 소련의 육군은 아마 한 달이면 한반도 전체를 장악했고 한반도는 그때부터 어쩌면 카레이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스탈린이 김일성이라는 자신의 분신을 내세워 대리 통치하는 49년 이후의 동유럽처럼 되었을지도 모르죠. 여하튼 쿠데타 세력이 황궁을 샅샅이 뒤졌지만 녹음테이프를 찾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랬더라면 눈 떠보니 선진국이 아니라 눈 떠보니 다시 조선 왕조(이번에는 김 씨 조선)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