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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를 키운 8할의 사랑과 2할의 외로움 이야기

by 신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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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는 그 높은 인기와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에 비해 전기 영화가 별로 없었지요. 2016년에 제작된 전기 영화로서 닉슨 대통령과 만남만을 다룬 ‘엘비스와 닉슨’ 외에는 엘비스를 연기하는 배우가 없었던 듯합니다. ‘물랑 루즈’로 음악 영화에서 만만치 않은 실력을 증명한 버즈 루어만 감독이 사실상 첫 번째 엘비스 전기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굉장히 큰 기대를 갖고 VOD로 올라오면 꼭 봐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엘비스를 좋아하는 마눌님과 집에서 감상했죠.

◆엘비스가 없었다면 비틀스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엘비스 하면 영원한 라이벌 비틀스를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죠. 우리나라는 확실히 엘비스보다 비틀스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입니다. 이웃 일본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팝 음악의 수입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로서 우리는 비틀스와 엘비스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조차 평론가들은 난센스라고 말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엘비스는 국내 흥행은 10만 명도 돌파하지 못해 10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이 본 ‘보헤미안 랩소디’와 크게 비교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퀸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핑크 플로이드 엘튼 존 비지스 그리고 그 위에 우뚝 서 있는 비틀스까지 미국의 팝 음악보다 영국의 팝 음악, 특히 록음악을 더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순서로 보면 압니다. 영미 팝이라고 하지 미영팝음악이라고 하지는 않거든요. 언어의 습관을 보면 자연스레 드러나죠.

저는 비틀스가 단연 20세기 최고의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저 개인적으로도 비틀스가 엘비스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만큼은 비틀스 마니아인 저도 인정하자 않을 수 없습니다. “엘비스가 없었다면 비틀스도 없었다.” 비틀스가 함부르크에서 무명 생활을 시작할 때 롤 모델이 엘비스처럼 되는 거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죠. 그러나 엘비스가 현란한 무대 매너와 혼신을 다한 열정적인 라이브 그리고 가스펠과 컨츄리 음악을 결합해 그야말로 블루 아이드 소울을 실천한 첫 번째 아티스트라고 해도 모든 노래를 다 작사 작곡하고 모든 노래를 직접 연주하면서 부른 비틀스를 능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곡이 아닌 앨범에 콘셉트를 부여하고 새로운 실험을 앨범마다 시도했던 비틀스와 엘비스는 엄밀히 말하면 차원이 다른 경지에 있는 것이 사실이죠.

물론 영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엘비스 역시 비비 킹이나 처비 채커 마할리아 잭슨 팻츠 도미노 등의 흑인 가수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면서 흑인 음악과 함께 성장했지만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비틀스를 단지 잠깐 지나가는 새로운 유행 정도로 폄하했던 것은 그의 일생 두 번째 실수였습니다. 사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사람인데, 우리에게는 그런 진면모가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비틀스에 대해서는 일종의 질투심일 수도 있고 묘한 우월감일 수도 있는 그런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죠. 흑인 차별에 반대하고 폭력에 반대하고 전통적인 남부 기독교 문화에 부정적이었던 그가 보수의 화신인 닉슨 대통령을 직접 만나 악수하고 사진도 찍은 이유는 바로 적의 적은 친구라는 정치의 법칙 때문이었죠. 닉슨도 베트남전에 결사반대하고 히피들의 저항을 정신적으로 이끌던 비틀스의 리더 존 래넌을 정말 싫어했거든요. 어차피 그에게 민주당의 라이벌 정치인은 없었고(그는 재선 때 596대 4라는 역사상 가장 큰 스코어 차로 민주당 후보를 이긴 인물입니다. 사실 도청할 필요도 없었죠.) 존 레넌이 그의 최대의 정적이었습니다.

◆엘비스가 노래를 부른 이유와 비틀스가 음악을 한 이유는 다르다

저는 대중음악의 동력이 사랑과 외로움 결국은 이성과 섹스에 대한 그리움이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틀스도 처음에는 그랬다가 67년 서전 페퍼스 앨범부터 음악 외에 이념 자유 저항 혁명 가난 일상 등의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습니다. 사랑이 대중음악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첫 번째 아티스트죠.

그런 면에서 엘비스는 전형적인 가수였습니다. 사랑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었던 평생 사랑을 갈구했던 사람이었고 그 누구와 함께 해도 무대 위가 아닌 모든 곳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그런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유부단하며 감옥을 수시로 드나들던 아버지보다 정신적으로 어머니와 훨씬 더 가까운 마마보이였는데요, 어머니는 그를 독일 주둔 미군으로 보낸 뒤 알코올에 절어 살다가 결국 요절했습니다. 그는 생에서 가장 큰 고통과 슬픔을 겪었죠. 그런 점에서는 어머니를 일찍 잃은 존 레넌이나 폴 매카트니와도 비슷하죠. 아마 폴이나 존이 솔로로 활동했다면 엘비스와 비슷한 길을 걸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폴에게는 존이 존에게는 폴이 있었고 서로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경쟁하며 우리 둘이서 대중음악을 한 단계 더 진화시켜보자는 취지로 동반 성장하며 의기투합했습니다. 엘비스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솔로였고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그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악한 매니저 톰 파커(이름이 비슷한 톰 행크스가 정말 열연했죠,)와 그와 부화뇌동했던 무능한 아버지만 있었을 뿐입니다. 엘비스의 키워드는 사랑과 고독이고 그의 라이브를 보면 한 가지 떠오르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땀입니다. 그가 흘린 땀이 그를 여성팬들이 20년 동안 거의 미치도록 만든 진짜 원동력이죠. 유일하게 사랑했던 부인 프리실라는 사실 그가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낸 여성들을 생각하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어려운 사실이죠. 그의 유일한 딸 리사 마리와는 함께 한 시간이 너무나 짧았습니다, 아마 리사 마리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아빠와 함께 단 둘만이 있었던 시간이 부재했을 겁니다, 약물 중독으로 76년 사망했으니 8세 이후로는 아버지를 본 일이 없죠, 54세인 그녀가 지금까지 네 번 결혼(그중에는 마이클 잭슨과 니콜라스 케이지 같은 대스타도 있죠.)인 이유도 사실상 아버지의 부재의 탓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리사 마리는 아버지의 부재를 심각하게 느끼고 평생의 트라우마로 죽는 순간까지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엘비스는 유전적인 아버지는 존재했지만 그에게 사회와 도덕을 가르쳐줄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대로 자신의 유일한 자식에게 행동했겠죠.

◆결국 모든 미국 음악 영화는 권선징악 구도애 갇혀 있다

사실 권선징악이라는 구도는 모든 미국 영화의 공식입니다. 액션 영화뿐 아니라 음악 영화에서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디 갈란드를 불행의 화신으로 그렸던 주디도 그렇습니다. 그 영화에는 MGM의 사장이 악입니다. 그렇게 영화에서 스타들의 삶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사연은 이렇습니다. 실제 스타들이 활동하는 동안 동시대인들은 그들의 양지만 보게 되지만 죽은 뒤에 영화로 접하는 후세대 사람들은 그들의 음지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선징악을 그렇게 원하는 관객들의 심리를 고려하면 영화감독은 불행한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을 선으로 그리면서 매니저나 음반사 사장을 악으로 그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톰 파커는 실제로도 악의 화신이죠. 본인이 진 도박 빚을 갚기 위해 그를 라스베이거스 호텔 디너쇼에만 줄곧 새웠습니다. 그는 엘비스가 번 돈의 50%를 가져가고 경비는 거의 대부분 그가 유일하게 믿었던 무능한 아버지에게 떠넘겼죠. 완전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육사가 가져가는 구조였습니다. 엘비스가 만약에 미국을 떠나 비틀스처럼 일본 유럽 호주 등 전 세계로 월드 투어를 다녔다면 세계 팝 음악계의 1~2위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엘비스의 인기와 잠재력을 본인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인 미국으로만 한정지은 인물이 바로 그입니다. 그는 이를 보호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일 뿐입니다. 실제 그는 탐욕의 끝판왕으로 엘비스가 죽고 엘비스의 집인 그레이스랜드로 프리실라로부터 빼앗으려고 했죠. 카지노에서 진 빚을 갚으려고 했던 겁니다. 본인은 제임스 딘을 닮은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는 영화보다 훨씬 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그런 프레슬리에게 급조한 뮤지컬 영화들의 주연을 맡겨 프레슬리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도록 만든 이도 그입니다. 결국 영화는 엘비스의 불행과 슬픔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파커를 마블 영화급의 악당으로 만드는 데 성공은 했습니다. 대부분 팩트에 기반한 내용들이지만 역사는 엄격하고 균등해야 합니다. 파커가 무명의 엘비스를 발견해 흑백차별이 살벌했던 50년대 남부에서부터 동부까지 힘 있게 밀고 가는 데 그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과연 프레슬리의 성공이 가능했을까요? 최소한 음악에서 먼저 흑백 융합이 일어날 것이라는 선견지명 정도는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타고난 스타성을 무대에서 발휘하도록 한 민물도 그였고요. 팬심을 유지하기 위해 고비 때마다 이벤트를 활용했던 인물도 그였습니다. 나중에는 선을 넘었지만 사실상 평생을 부재했던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며 그에게 힘과 의지를 주었던 인물도 톰 파거가 맞습니다. 이제는 둘 다 고인이니까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죠. 한 가수의 성공과 쇠락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가는 가수와 매니저 혹은 기획사 사장의 관계가 정말 드물다는 사실을 우리는 K팝을 통해 잘 알고 있죠. 그런 면에서 저는 죽음 직전에 최악의 관계로 전락했지만 파카와 엘비스는 서로에게 윈윈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영화는 엘비스가 생각보다 아주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고 특히 비틀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엘비스라는 생각이 고정관념이었음을 보여준 영화였지만 그 과정에서 할리우드 마블 영화와 같은 과도한 악의 묘사가 너무 의도적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엘비스를 맡은 오스틴 버틀러는 실제 엘비스만큼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정말 실감 나게 엘비스 역을 맡아 열연했습니다. 엘비스를 비틀스보다 좋아하지 않거나 엘비스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꼭 한 번 보실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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