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를 보다 보면 정말 B급 영화인데 의외로 생각 거리를 많이 주는 영화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버려진 자들의 땅'(Bad Batch·2016)라는 디스토피아 영화가 그런 사례죠. 미국 텍사스 근 미래에 범죄자들을 사막 한가운데로 내보내 일절 법이 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이 알아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정말 끔찍하면서도 생각의 거리들을 많이 많이 제게 안겨 준 작품이었습니다.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을까요?
1) 왜 인간은 살인보다 식인을 더 두려워하는가?
법이 사라진 세상에 남는 건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식인종과 종교에 미친 사람들이죠. 인간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세상은 인간이 인간을 먹는 일입니다. 즉 보통 사람들은 살인보다 식인이 훨씬 더 무섭고 두렵고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인자라는 어감과 식인종이라는 어감은 정말 큰 차이가 있죠. 후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죽는 거는 마찬가지인데 사람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 죽어서 같은 사람들에게 먹히는 게 왜 더 두려운 걸까요?
식인을 금기시하는 건 동양보다 서양 쪽입니다. 동양중에서 중국은 식인에 대해서 사실상 방치상태였습니다. 중국은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이 집권하기 전까지 언제나 먹여 살릴 인구에 비해 항상 식량이 부족했던 나라입니다. 게다가 대기근이나 200년 단위로 교체되는 왕조와 전쟁 때문에 정말 항상 굶주렸던 나라입니다. 초한지에서 유방의 부인이자 부잣집 딸이었던 여치가 어린 시절 기근을 맞아 어린 여동생을 잡아먹었다는 대목이 나오고 삼국지에서 유비가 시골 마을에 갔을 때 먹을 게 없던 집주인이 아내를 잡아 고기로 대접했다는 내용도 나오죠. 수호지에서는 아예 사람 고기로 영업하는 가게가 활개를 칠 정도로 중국에서는 식인이 다반사였습니다. 루쉰의 ‘광인일기’에서 그 광인은 광인이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 갖는 공포였던 겁니다. 중국이 식인 문화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고기 육자를 보면 압니다. 고기 육자()에서 통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바로 사람입니다.
서양에서도 식인은 기근이 오거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자주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중국만큼은 아니었죠. 서양에서 식인이 가장 최근에 집단적으로 벌어진 건 30년대 우크라이나 40년대 초반의 소련이었습니다. 30년대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였음에도 스탈린이 부농(클라크)의 씨를 말리려고 식량 창고를 닫아 놓고 사람들이 결국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러시아(실은 스탈린이 러시아인이 아니 조지아주 출신인데도)를 끔찍이 혐오하게 됩니다. 이 일을 겪은 후 우크라이나의 민심은 급변했고 41년 독소전쟁이 벌어졌을 때 우크라이나가 그렇게 쉽게 독일군에 무너진 건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반공산당 민족주의 세력이 오히려 히틀러를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인 역시 러시아나 폴란드처럼 열등한 슬라브족으로 경멸했지만 여하튼 그랬습니다. 전쟁 초반 소련은 독일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면서 수많은 사망자와 포로를 양산해냈는데요, 그중에서는 스탈린의 장남도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소련군 포로를 사람처럼 대하지 말라고 했죠. 그냥 수용소 건물도 짓지 않고 소를 방목하듯이 울타리만 만들어 수만 명의 포로들을 집어넣고 서서 자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식량도 주지 않았죠. 그래서 결국 포로들은 자기들끼리 잡아먹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히틀러에게까지 올라갔습니다. 히틀러는 즐겼을 수도 있죠. 히틀러는 혁명의 성지이면서 러시아 제2의 도시인 레닌그라드를 포위해서 모든 시민을 굶겨 죽이라고 명령한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폭격을 하되 식량 창고와 물탱크만 집중적으로 하라고 지시했죠. 인위적으로 만든 900일간의 포위 속에서 40만 명은 굶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레닌그라드의 모든 동물(개 고양이 쥐까지)을 다 잡아먹고 결국은 자기들끼리 잡아먹는 최악의 식인이 벌어졌습니다.
인간은 배가 부를 때 도덕과 인권을 논할 수 있고 배가 고파지면 어떤 일도 한다, 심지어 같은 사람도 얼마든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동서양의 역사적 사실로 증명이 되고 있죠. 그래서 인간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서로에게 안 잡아먹히도록 서로를 불신하게 된 것이죠. 식인에 대한 공포는 사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두려움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젊은 여성은 식인종에게 납치돼 한쪽 팔과 다리를 잃습니다. 나머지 부분도 다 먹히기 전에 탈출한 뒤 식인종들이 없는 안식처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죠. 그런데 약물에 의존하며 영혼을 파괴하는 게 종교라는 걸 깨달은 뒤 주인공은 뜻밖의 선택을 합니다. 식인종에게로 돌아가는 거죠. 그녀는 식인종이라는 이유로 한 여성을 죽인 적이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식인을 하지만 그 남자를 교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사막에서 다른 먹거리를 찾을 수 있었을까요? 영화의 마지막은 그 식인종 남자가 딸처럼 사랑하는 소녀가 아끼던 토끼(안식처에서 식량으로 팔던)를 세 명이 함께 잡아먹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어렸을 때 집에 사 왔던 병아리를 정말 정성스럽게 길렀는데 나중에 백숙으로 식탁에 오른 느낌을 그 소녀는 받았겠지요.
2) 그냥 사는 게 중요한가, 먹고사는 게 중요한가?
이 영화는 사실 엄청나게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과 먹고사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숨 쉬며 산다고 하지 않고 먹고 산다고 합니다. 요즘 어떻게 먹고 사냐고 묻지? 요즘 어떻게 숨 쉬고 사냐고 묻는 경우는 없죠. 사는 것보다 먼저 나오는 게 먹는 겁니다. 물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기체는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먹는 것 이에 세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적절한 수면과 초단위로 쉬는 숨 그리고 적절한 배설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먼저 나오는 게 먹는 것일 정도로 식량은 한 인간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경제와 과학 기술 이 모두는 사실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들이 발명한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먹는다는 행위는 어떤 생명체를 죽인다는 행위를 반드시 전제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도덕성은 내가 먹기 위해 어떤 생명을 죽인다는 걸 끔찍하게 여기도록 진화했습니다. 그래서 배양육 시장이 형성되고 미래 캐시 카우로 각광받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죠. 이 산업은 오직 하나, 인간의 측은지심 때문에 생겨난 거고, 인간에게 측은지심이 남아 있는 한 성장할 수 있는 유망 산업입니다. 배양육을 넘어서 단 한 번의 흡입으로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대체음식 시장, 이른바 한 끼 알약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도 인간이 측은지심을 믿는 것이고 측은지심은 더욱더 커질 것이라고 내다보기 때문이죠.
그러나 저는 인간이 미각이 존재하는 한 배양육 시장과 한 끼 알약 시장은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심, 측은지심은 절대 인간의 본능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매트릭스의 사이퍼가 동료를 배신한 이유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하고 가상현실로만 체험한 스테이크 맛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맛 본 고기의 맛을 인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안 먹었으면 모를까? 어찌 보면 이 기분 나쁜 영화가 보여주는 메시지도 단순한 것일 수 있죠. 인간은 그냥 사는 존재가 아니라 먹고사는 존재이고 앞으로도 먹고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거죠.
3)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자유로웠을까?
결국 이 영화는 문명이 사라질 정도의 위기, 핵전쟁이 오면 법과 도덕은 그 기능을 멈추고 인간은 언제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종으로 돌변해 측은지심 따위는 필요 없이 오직 생존을 추구할 것이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루소를 비롯해 인간은 원래 전쟁을 좋아했던 종족도 아니고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 주장의 허구성은 고고학을 통해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조상 크로마뇽인은 조직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을 사냥했고 때에 따라서는 같은 호모 사피엔스끼리도 얼마든 잡아먹었습니다. 자연 상태를 에덴동산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생각할 때 벌어지는 생각의 오류일 뿐이죠. 인간의 측은지심은 오직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 즉 먹는 문제가 해결될 때만 가능한 겁니다. 우리 세대는 인간이 먹을 게 없어 같은 인간을 잡아먹는 게 얼마나 끔찍한 행위인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비 영화를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이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식량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포만감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지만 그 포만감 때문에 인간은 도덕을 생각하고 나 아닌 다른 인간 그리고 다른 동물에 대해서 역지사지해볼 수 있는 공감능력이 생겼다는 점에서 포만감은 공감 능력의 어머니입니다. 인류의 도덕적 진화에서 큰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인간을 추동하는 두 힘, 굶주림에서 탈출하려는 생존 욕망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의미를 언제든 이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