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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한쪽에서 다른 쪽 보기가 어려울까? ‘코다'

by 신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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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에 맹활약한 캐나다 출신 싱어 송 라이터 조니 미첼이 작사 작곡하고 조니 미첼과 주디 콜린스 등이 부른 명곡 'Both Sides Now'을 아신다면 그분들은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일 겁니다. 주디 콜린스의 버전은 여성적이고 달콤하다면 조니 미첼의 보컬은 중성적이면서 쿨한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디 콜린스의 노래가 훨씬 더 유명했죠. 어쩌면 많은 분들이 이곡을 주디 콜린스의 노래로만 기억하고 계실 수도 있어요. 이 노래를 정말 오랜만에 영화에서 들었습니다. 바로 2022년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코다’라는 작품에서죠. 정말 이 노래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였어요. 저는 양 편을 두 사람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애타는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 영화를 보니 양쪽 편이 장애(농아)인 가족과 정상인 타자의 처지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비장애인 자녀의 심정을 표현하는 데 딱 맞는 노래더라고요.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이렇게 노래가 맥락에 따라 영화에서 다르게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2020년 ‘기생충’, 2021년 ‘노매드 랜드’에 이어 2022년까지 아카데미는 확실히 사회적 약자와 정치적 올바름으로 방향 전환을 했습니다. 그동안 가족 영화. 강한 서사구조에 높은 점수를 주었던 심사위원단이 ‘노매드 랜드’처럼 지루하더라도 ‘기생충’처럼 너무 좌파적이라도 메시자가 확실히 사외적 약자를 위해 봉사하려는 의지가 보인다면 상을 몰아줍니다. 그런데 ‘코다’는 장애인과 일반인의 경계를 허무는 영화이면서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음악영화이며 감동이 있고 미국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족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하겠지만 청각장애인으로 완벽한 진공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아버지가 딸의 노레를 듣고 싶어서 자신이 손을 딸의 성대에 대고 촉감으로 느끼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죠. 오스카는 이런 감동이 인위적이지 않고 창의적일 때 높은 점수를 줍니다.

이 영화는 80년대 리버 피닉스의 최고 히트작 ‘허공으로의 질주’와 여러 면에서 닮은꼴 영화입니다. 농아 장애인 부모가 히피 테러범으로 FBI 수사를 받는 부모로 바뀌었지만 예술적 재능을 지닌 두 주인공이 가족과 재능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재능을 선택한다는 결론도 유사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허공으로의 질주’의 표절이란 건 아닙니다. 오마주라고 할 수 있겠죠. 특히 수화와 정상인의 언어를 동시에 하면서 17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오빠까지 세 명이 사회와 맺는 소통을 책임져야 하는 주인공의 삶의 무게는 분명 코다와 ‘허공으로의 질주’가 다른 대목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도 힘든데 가족이지만 내가 아닌 존재의 다른 존재와 소통을 매개해야 한다면 이는 17세가 짊어질 만한 삶의 무게가 아닙니다.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는 이유는 실제 농아들을 배우로 써서 사실감을 높였고 주인공이 가족과 재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면이 정말 실제 상황처럼 리얼하다는 점 때문이죠. 즉 영화의 두 화소는 가족과 재능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재능 사이에서 갈등과 갈등의 조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음악 교사의 역할 등이 전형적인 소재이기는 하지만 전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연출을 그만큼 잘한 거죠.

주인공이 버클리 음대 실기 시험에서 음악 선생님의 반주로 가족이 보는 데서(물론 이들은 보지만 들을 수는 없습니다.) 조니 미첼의 ‘보스 사이드 나우’를 부를 때는 이렇게 음악이 멋지게 영화와 물아일체를 이룰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장면이었습니다. 음악이 영화 속으로 완전히 포개지고 영화가 음악 속에 완전히 잠긴 진짜 명장면이었죠. 주인공은 2절에서는 노래를 들을 수 없는 가족들을 위해 수화로 노래 가사를 전달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느낀 두 번째 큰 감동이었죠.

https://youtu.be/SgKvP0O0nyI

그런데 영화는 기본적으로 판타지죠. 대부분의 영화는 관객들이 절실히 원하는 해피 엔딩을 선물로 줍니다. 보스 사이즈 나우는 원래 인간이란 종족은 양 쪽에 서서 바라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온 노래죠. 적이 아니면 친구, 친구 아니면 적인 회색지대가 없는 요즘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게 양 쪽에 한 다리를 걸치며 양 쪽을 번갈아 볼 수 있는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렇게 양극화되어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흑백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이런 노래와 이런 영화의 화합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니 미첼이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할 때는 세상이 오늘날처럼 양극화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50년이 안 되는 사이에 우리는 사진 자와 못 가진 자, MZ세대와 꼰대 세대, 친중파와 친미파로 나뉘어 중간지대가 사라진 양 극단에 서서 다른 쪽을 절대 쳐다보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어요. 그럴 때 모든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영화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반대편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감독이 말해주고 싶었던 것도 이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영화는 가족과 재능 사이의 길항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동체와 타인과 관계 복원과 파편화되는 세계에 대한 길항으로도 읽을 수 있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너그러움과 따뜻함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가족적이면서 사회적이었이기에 오스카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랜만에 듣는 음악과 새롭지만 오래된 느낌을 주는 영화를 만난 김에 유튜브에서 쥬디 콜린스의 노래를 찾아 듣게 되네요.

https://youtu.be/t-X3CaTU1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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