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3대 이슈는 낙태 동성애 이혼입니다. 한쪽에는 낙태 동성애 이혼을 반대하는 교황이 있습니다. 이른바 보수 교황이죠. 반대 진영에서는 낙태 인정 동성애 허용(동성애는 당연한 거니 동성 결혼 허용이 좀 더 현대적이겠네요,) 이혼에 대해서는 개입을 아예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른바 진보 교황이 되겠죠. 그런데 진보 진영은 이 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불평등이라는 주제라고 주장합니다. 불평등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사람들이 보수죠.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교황 중에서 최초로 비 유럽권 출신인 데다(조상이 이탈리아계니 엄밀히 말하면 출신지역만 남아메리카고 인종적으로는 백인이죠.) 빈부격차와 억압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진정한 진보 신학의 아이콘입니다. 그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 직전 교황이었던 베네딕트 16세입니다. 베네딕트 16세는 독일 출신으로 유년기 시절 히틀러 유겐트에도 몸 담은 적이 있어 나치 교황으로 불리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이렇게 사상적으로 좌와 우인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무슨 말들을 할까요? 토론이 될까요? 우리 같으면 싸움이 일어나기 딱 좋은 구도인데 말이지요.
브라질 출신 감독 페르난도 메이텔레스가 연출한 넷플릭스 영화 ‘두 교황’은 진보 교황 프란치스코와 보수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이야기입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교황의 자리를 물러난 두 번째(첫 번째 사례와는 무려 598년의 간극이 있는)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왜 그런 선택을 했고 프란치스코는 아르헨티나 군부와의 협력이라는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교황이 될 수 있었는지를 주로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를 맡은 조나단 프라이스(47~)는 ‘브라질’,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등 테리 길리엄 감독 영화에 단골로 주연을 맡은 영국 배우고요, 베네딕트 16세 역을 맡은 앤서니 홉킨스(37~) 역시 두 말할 필요 없는 최고의 영국 배우입니다. 아마 로렌스 올리비에 이후에 영국 배우 중에서 단 한 명만 고르라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앤서니 홉킨스를 고를 겁니다. 로렌스 올리비에에 비견될 정도로 그의 연기는 화려하면서도 안정적입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로마에서 만나는데 실제로 목적이 같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을 그만 두려는 생각에서 은퇴를 허용해달라는 뜻에서 만난 거고, 베네딕트 16세 역시 교황직을 그만두면서 차기 교황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만남 거죠. 철학에서 극과 극인 두 사람은 문화적 취향도 정반대입니다. 영화 시작 장면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로 콘클라베를 위해 로마에 모인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조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콧노래로 아바의 댄싱 퀸을 불렀는데 베네딕트 16세(당시는 교황 전 같은 추기경이었죠.)가 아바가 누구냐고 물을 정도입니다. 그는 음악 하면 클래식 음악밖에 몰랐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앨범으로 녹음한 곳이 애비 로드인데 그곳이 비틀스와 관련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정도입니다. 엘리노어 릭비니, 옐로 서브머린이니 하는 곡들이 프란치스코 교황 입에서 나오자 그 곡의 존재를 당연히 몰랐고요.
진보와 보수는 변화에 대한 태도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진보적인 자세를 타협이라고 비판하는 베데딕트 교황에게 삶은 늘 움직이는 것이며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타협하는 일은 아니라는 주장을 펴지요. 진보의 생명은 유연성입니다. 세상은 변화하고 변화에 적응하는 쪽이 살아남습니다.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세상은 진보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서 나치즘과 스탈리니즘 같은 시대를 역행하는 정치체제들이 등장했지만 결국에는 시대정신에 지고 말았습니다. 진보는 힘이 약해 보여도 결국은 살아남고 보수는 강해 보여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진보도 어떤 진보냐가 중요하죠. 프란치스코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가지도 않고 그 시대가 허용하는 진보의 범위 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진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진보이면서 실용적이었죠. 그 과정에서 70년대 군부독재를 만난 그는 전면적 투쟁 대신 군부독재의 실세와 교분을 이용해 반체제 인사들을 되도록 많이 살리는 데 앞장선 겁니다. 그런 그를 변절자로 비난할 수도 있고 그는 그 비난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추가경을 그만 두려는 이유도 70년대 쿠데타 세력에 대한 그의 어정쩡한 태도 때문이었을 겁니다. 진보는 이념과 어떤 관계여야 할까요. 그는 마르크시즘에 자신이 사는 현실을 맞추려 하지 않고 현실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현실의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이념을 사용하는 사람이지 특정 이념에 경도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진정한 진보지요. 유연성을 담보한 진보는 보수를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교황을 그만두겠다는 말에 정적일 수도 있는 교황을 지지하고 교황을 다독여주며 교황의 치적을 인정한 이가 프란치스코 교황이었습니다. 베네딕트 교황도 자신이 보수적 가치를 지지하지만 그의 허물(바티칸 역시 정치적인 곳으로 그에 관한 파일을 교황은 가지고 있었습니다.)을 덮어주고 감싸 주면서 과거 그의 행동을 사하죠. 프란시스코 교황도 현직 교황이 밝힌 문제(교구에서 아동 성추행이 발생했는데도 이를 쉬쉬했던 사건)와 치부를 들으며 그의 동료 신부의 자격으로 고해성사를 들어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죄를 사한 꼴이 되는 거죠. 베네딕트 16세야 말로 진정한 보수입니다. 그는 아바도 모르고 비틀스도 이름만 아는 사람이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죠. “낡은 것은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 한다.”
저는 이 모습에서 우리나라 진보와 보수도 이들처럼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 주는 모습인데 현재 우리 정치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철학적으로 대립하는 두 교황이 서로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종복으로서 살 각오가 되어 있고 그 방법론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생각은 다르지만 상호 간에 존중이라는 공기가 흐르고 있었죠. 그러나 우리의 진보 보수는 공감대를 형성할 공통의 가치도 없고 존중의 문화도 없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는 진짜 보수 진보가 아닙니다. 보수는 가치 대신 이익을 좇고 진보는 유연성 대신 경직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과 경직된 집단의 비타협성이 만나면 필연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죠. 같이 살자고 싸우는 게 아니라 같이 죽자고 싸우는 꼴입니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종교 영화지만 이념과 정파가 다른 정치인들이 함께 보면 서로에 대해서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제게는 멋진 정치 영화로도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