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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진상 Nov 12. 2022

크라운 5를 더 재미있게 보는 세 가지 관점

넷플릭스에서 제가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시리즈 ‘크라운 5’가 9일 밤 개봉했습니다. 제가 본 넷플릭스의 첫 번째 시리즈이자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크라운과 블랙 미러가 제 인생의 넷플릭스 순위 1~2위를 다투고 있으며 그다음에 스페인판 종이의 집과 대한민국의 오징어 게임과 지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크라운은 가장 밋밋한 드라마죠. 토스트와 차로 단출한 영국판 아침 식사를 먹는 기분일 겁니다. 넷플릭스 하면 자극적 선정적 폭력적인 드라마가 떠오르는데 크라운은 이 세 가지 요소와는 거리가 멉니다. 대신 이 세 가지 볼거리 생각거리가 있습니다.  

1) 엘리자베스 여왕은 훗날 어떤 군주로 기억될까?

시즌 1에서 두 번째로 수상 임기를 시작한 처칠 수상이 엘리자베스 여왕을 처음 알현하면서 한 말이 있죠. “자고로 영국은 여왕이 집권할 때 항상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의 말은 옳습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침시켜 유럽의 패자로 올라 선 주인공이 엘리자베스 1세고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이는 빅토리아 여왕이었으니까요. 스코틀랜드를 병합해 대영제국을 만든 왕도 앤 여왕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없이 앵글로 색슨 단독으로 오늘의 대영제국을 만든 건 절대 아닙니다. 대영제국이 만들어 전 세계에 보급한 두 가지,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은 둘 다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애덤 스미스와 증기기관 만든 제임스 와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권좌에 오른 52년부터 2022년까지 영국의 국력은 19세기가 아니라 15세기 수준으로 퇴락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후 모든 식민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영국이 남은 건 딱 두 가지입니다. 21세기에 군주제를 시행하는 나라(대부분 유럽)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 식민지 국가들 다수와 연연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사실상의 세계 공용 언어로서 기능하고 있는 영어를 만들어낸 나라라는 거죠. 시리즈 5에서 개혁 군주를 내걸며 어머니와 아내(다이애나)에게 반기를 들고 작정하고 인터뷰로 동시에 두 사람에 전쟁을 건 한 찰스 왕세자(지금은 찰스 3세)는 영국이 지켜야 할 것은 이제 영어 외에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전 세계로부터 뺏은 것을 전 세계에 다 돌려주고 남은 건 연연방과 영어 외에는 없는 현실에서 엘리자베스 2세는 어떤 여왕으로 기억될까요? 구시대의 마지막 군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사실 평등을 기초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왕족과 왕이라는 존재는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요소죠. 그리고 영국 여왕은 이미 다민족 다종교로 접어든 영국 사회에서 여전히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대표합니다. 군주제라는 유물과 국가의 수장이 종교의 수장도 차지하는 기이한 모습은 누가 봐도 구시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마당에 1편부터 5편까지 연기한 3 명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왕의 서로 다른 면모를 드러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을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권력자로 묘사하지 않고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시스템을 열심히 돌리는 거대한 톱니바퀴로 생각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 엘리자베스가 있고 그녀의 선택이 영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영국의 여왕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가 있고 그 가치에 맞으면 그녀의 마음이 정반대일지라도 그녀는 결정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가치가 전부였죠. 여동생인 마가렛 공주가 사랑하는 이혼남 피터 타운센드와 결혼을 막았던 일, 찰스 왕세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왕족인 여성과 결혼을 결정한 일 등 모두가 어머니나 언니로서 결정한 게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대영제국이 아닌 영국이란 나라에서 과거의 영광을 허울로만으로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군주로서의 결정이었죠. 시스템의 균열을 막으려는 게 그녀의 임무였는데 그녀는 실패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여왕은 왕으로서의 권위와 인기는 누릴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잃은 것이 있으니 바로 정상 가족입니다. 어머니나 아내로서는 실패한 거죠.     

드라마가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가장 다르게 전개된 부분은 바로 필립 공과 관계입니다. 필립공은 시즌 1에서 발레리나와 바람을 피운 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납니다. 여왕이 젊었을 때였고 여왕은 한 때 이성을 잃었죠. 그러나 60대를 넘긴 후 두 노 부부는 각자도생 하려 합니다. 영국 왕실을 지키는 쌍두마차이자 동지로 살아온 47년 뒤 필립 공은 아내에게 이렇게 따집니다. “당신과 나는 너무나 다르다. 나는 대화가 잘 통하고 영적으로 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와는 육체적 연인 관계로는 절대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허락해 달라.” 이런 주장에 대부분의 여성이라면 당연히 “노”를 할 텐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흔쾌히 오케이를 합니다. 두 부부가 금실이 좋은 편이기는 했지만 소울 매이트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죠. 

2) 찰스는 개혁 군주가 될 수 있을까?

찰스는 환경 문제와 가난 이민자들의 처우에 원래부터 관심 많았습니다. 그리고 딱딱한 격식과 규율이 맞지 않았죠. 그러나 소심한 그는 아버지로부터 반 강제적으로 스코틀랜드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리고 일정 거리를 준 엄마로서가 아니라 왕위 계승자로서 자기를 대하는 어머니에게는 큰 벽을 느끼죠. 소심한 자유주의자. 그에게 딱 맞는 별명입니다. 소심한 남자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그도 왕세자가 아니었으면 다이애나 같은 미인을 얻었을 수가 없겠죠. 소심한 남자는 불만이 많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 합니다. 그런 속내를 들어줄 수 있는 나이와 경험이 다이애나비에게는 없었죠. 찰스는 아버지 필립공처럼 숨 막히는 왕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편안한 상대를 찾았던 것이고 그것이 유부녀인 카밀라 파커 볼즈였던 거죠. 시즌 5에서 그가 방송과 인터뷰한 대로 처음부터 진지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편한 친구 같다 나중에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주장. 즉 자신이 처음부터 불륜을 저지를 생각은 아니었다는 주장은 절반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대중은 예쁘고 언론을 극적으로 활용한 다이애나비에게 항상 우호적이었습니다. 어머니 때와 다른 점은 어머니는 군주제에 회의적인 좌파들이나 일부 젊은 세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대들에게 환영받고 사랑받았지만 찰스는 카밀라와의 불륜과 이혼과 재혼으로 이미지가 많이 구겨진 상태라는 겁니다. 영국의 왕은 4 국가가 연합을 이훈 대영제국의 필연적 반목을 막기 위한 국민 통합의 상징인데, 찰스 왕세자의 개인 가정사는 영국의 여론을 분열시켰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주류가 아닌 비주류를 택하며 어머니와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오랜동안 야당이었던 노동당이 43세의 당수 토니 블레어를 가장 먼저 환영하며 그의 선거 구호 뉴 브리턴을 따라 외치며 다른 군주로서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은 찰스의 생존전략이었습니다. 

그는 나름의 진실한 사랑을 위해 이혼과 재혼이라는 파격을 선택하면서 자신이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기존의 영국 군주와 다르다는 점을 사회작 약자의 목소리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영국 군주는 성공회 즉 프로테스탄트만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힌두교 그리고 가톨릭(아일랜드)도 영국의 신민이다.”

시즌 5에서는 왕세자로서 그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소외된 이들, 흑인, 인도계 미국인,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5화에서는 흑인 청년들과 댄스 배틀을 벌이는 장면도 나오죠. 기존 군주제에 문제점을 더욱 느낄 만한 세대를 찾아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왕실이라는 점을 부각하려고 했다는 점은 일단 칭찬받을 만합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교통사고 이후 더욱 악화된 여론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겠죠.

그렇다고 그가 어머니를 뛰어넘는 성공한 개혁 군주가 될지는 의문입니다. 일단 시작은 좋습니다. 그와 첫 호흡을 맞춘 영국의 수상은 인도계 영국인으로서 영국 역사 최초의 유색인종 수상으로 힌두교도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힘이 전무한 상황에서 상징적 존재인 영국의 국왕이 본인이 원한다고 개혁 군주가 될 리는 만무합니다. 보수당과 노동당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는 나라에서 국가는 시장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약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죠. 경제적으로 국왕이 해줄 수 있는 게 전무하기에 찰스 3세는 문화적으로 영어를 더욱 보급하면서 영어라는 문화에 과거 식민지 국가들의 고유문화를 받아들여 영국 문화를 더욱더 국제적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친환경에서 영국은 미국과 유로와 보조를 맞추며 인류 공생의 길을 걸을 수 있겠죠. 그 정도만 해도 성공한 개혁 군주가 될 수 있겠죠. 

3) 영국인이 군주제를 못 끊는 진짜 이유

96년 11월 다이애나비의 충격적인 BBC 단독 인터뷰가 나가고 주요 언론들이 우리 결혼은 처음부터 셋이 시작했다는 선정적인 표제어로 이를 보도한 후 군주제에 대한 여론은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97년 이혼이 절정이었죠. 두 사람의 결별의 책임을 대부분 찰스 왕세자에게 돌리고 그가 왕위에 오르지 않아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시즌 5는 이혼 후 존 메이저 총리가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드디어 7월 30일 홍콩 반환이 이루어지면서 영국의 식민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역사적인 날로 마무리합니다. 그와 동시에 비슷한 시점에 있었던 다이애나비가 이집트의 재벌 파에드의 아들을 정식으로 만나 프랑스에서 데이트들 즐기며 새 시작을 하려다 생의 마지막을 만나는 지점의 시작 포인트에서 끝납니다. 시즌 6의 1편으로 이어져 5의 시청자를 계속 잡아가고 말겠다는 의지죠. 제 예상대로 시즌 5의 마지막은 홍콩의 중국 반환으로 끝났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콩이 중국에게 반환되는 날, 왕실의 가족들은 함께 식가를 했는데 최연장자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가 중국이 홍콩을 약탈한다고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왕실 어느 누구도 영국이 중국에서 빼앗아간 슬픈 역사를 거론하지 않았죠. 이게 대다수 영국인들의 마음일 겁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영국은 가진 것을 빼앗기는 시기, 좋게 말하면 전 세계 인민들에게 나눠주는 시기로 기억하는 거죠. 그 영광의 시기에 영국의 왕들, 주로 여왕들이 함께 있기에 영국은 영국의 정체성을 영국의 군주제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여론조사는 군주제에 대해 비우호적일 수 있지만 이는 이디까지나 일시적일뿐더러 진심도 아니라는 거죠. 지금 영국인 중 어느 누구도 찰스 3세의 왕좌 계승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영국이 군주제를 버리고 공화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극단적으로 낮은 이유는 일본이 군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정서입니다. 모든 길은 런던으로 통했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 일이죠. 파운드화는 기축통화였고(지금은 파운드 화 사상 처음으로 달러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뉴욕이 아닌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러시아를 막기 위해, 때로는 같은 민족이나 다름없는 독일을 막기 위해, 때로는 숙적 프랑스를 막기 위해, 때로는 떠오르는 강자 네덜란드를 막기 위해 수시로 적의 적을 활용하며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을 정상적인 영국 국민이면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딱 두 가지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다. 한 입에 삼키기 어려우면 반드시 나눠서 먹어라.(디바이드 앤 룰) 영국은 자신들은 군주제로 똘똘 뭉치면서 식민지 국가들은 철저하게 조각내어 나눠 먹는 데 최고의 귀재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 영국은 자본주의의 발명국이며 산업혁명의 종주국으로 전 세계의 현재 질서를 만든 주인공입니다. 한 마디로 영국은 경제 정치 군사 과학 기술 문화 예술까지 인류 모든 문명의 플랫폼을 기능했던 유일한 제국인 거죠. 현재 세계 패권국 미국은 사실 영국의 가장 자랑스러운 창조물이죠. 몽골 제국을 비롯, 고대 로마나 알렉산더 대왕 등 그 어떤 정복자도 양적으로 질적으로 대영제국보다 더 잘 나간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 과거를 영국이 끊을 수 있을까요? 절대 못 끊을 겁니다. ‘더 크라운’을 보기 전에도 느끼고 있던 거지만 군주제는 영국의 정체성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번 시즌 5를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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