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미러 6은 16일 전 세계(한국과 일본 빼고) 먼저 개봉됐는데 그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세계 1위입니다. 명국과 미국을 포함해 거의 모든 나라에서 1위를 질주 중입니다. 심지어 방글라데시에서도 1위입니다. 역시 찰리 브루커죠. 그런데 저는 당연히 한국 개봉날 다음 즉 25일이 되면 1위로 한국 순위에서 치고 올라올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순위 안에 없습니다. 한국 유저들은 철저하게 국내 작품만 봅니다. 그런데 우리 정도 수준이라면 블랙 미러가 한 번쯤은 순위 1위를 기록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 같은 사람이 부지런히 리뷰를 써서 올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넷플릭스 사상 최악의 SF ‘승리호’와 ‘택배기사’를 만든 나라죠. 여전히 한국의 SF는 갈 길이 너무도 멀다는 사실을 솔직히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오늘은 에피소드 3 ‘저 바다 너머 어딘가’를 보면서 느낌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굉장히 서정적이고 철학적이고 슬픈 작품입니다. 그 서정성은 에피소드에도 표지가 등장하는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맨’과 그리고 이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가 원작 소설과 영화를 동시에 좋아하는 솔라리스(당연히 영화는 타르코프스키 버전이고 영화보다 더 좋은 게 스타니스와프 램의 소설입니다,)를 브루커 식으로 오마쥬 하면서 여기에 영국의 작가라면 모두가 DNA로 갖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의 대주제인 허브리스(인간의 타고난 성격적 결함)를 담은 또 다른 의미의 걸작입니다.
제목에 바다를 넣었다는 점은 브루커가 솔라리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죠. 은하수라는 표현도 있듯이 인류에게 우주는 바다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인류가 바닥을 정복했지만 아직 우주는 이제 겨우 첫걸음을 내민 상태입니다. 앞으로 1만 년이 걸릴지 아니면 1억 년이 걸릴지 영원이란 시간이 필요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바다 너머 어딘가에 무엇이 있을지는 대항해시대를 만난 유럽인들에게만 공포로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주에는 아직 우리 외에 지적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 넓은 공간에 정말 우리만이 존재할지는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SF 영화는 우주라는 공간에서 만날 공포의 대상을 에일리언처럼 타자화하는 방법과 우리의 내면의 적(예를 들어 공포심, 증오심, 고독감)을 상정하는 방법이 있는데 브루커가 우주라는 바다 너머에서 우리가 만날 적을 후자로 택했습니다. 50년대 걸작 SF 영화 ‘금지된 혹성’이 알고 보니 자신들을 괴롭히던 공포의 적은 자신들 내면의 증오심이었다는 걸 알면서 관객들을 낯설게 하면서 새로운 공포감을 선사했던 것처럼 브루커는 우주에 떠 있는 두 명의 우주인 이야기를 60년대 말에 실제 있었던 히피 찰리 맨슨의 샤론 데이트 살인 사건 등을 합쳐 우주라는 공간의 공포도 인간 내면의 심연에 있는 어두운 본성의 표현이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브루커의 창의성은 60년대 인간의 달 탐사 시절로 돌아가 80년대 블레이드 러너식의 복제인간(사실은 기계인간)과 매트릭스 스타일의 두뇌를 연결한 가상현실의 체험을 합쳐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우주로 우주인을 보내 지구를 위해 일하게 하면서 그들이 한정된 공간에서 6년을 살아야 하는 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똑같은 복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우주에서 두뇌와 두뇌의 만남(공각기동대 스타일의 전뇌 해킹)을 통해 몸이 일하고 정신은 자는 동안 지구에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즉 한 사람은 지구로 보낼 자료를 열심히 취합하고 한 사람은 지구에 복제인간을 움직여 가족과 함께 시간을 가져 우주의 근원적인 고독이란 문제를 해결하도록 우주 문제를 설계한 거죠.
그러다 히피 가족들이 한 우주인의 집을 설계해 이는 자연의 섭리를 어긋 내는 일이라고 선언하며 기계인간을 부수고 그 우주인의 가족을 모두 죽입니다. 그는 이제 우주에서 돌아갈 데가 없는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거죠. 이 장면에서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다른 주인공이 자신의 칩을 빌려줄 테니 자신의 지산의 복제 몸을 이용해 산보도 하고 햇볕도 쐬라고 자비를 베푼 거죠. 그런데 그가 동정심을 보인 것은 셰익스피어 식으로 말하면 바로 인간의 허브리스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의 부인과 아들에 대해서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조차 사라진 동료에게는 자비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속마음은 우월감이 작용하고 있었던 거죠. “설마 뭔 일이야 나겠어. 내 부인은 내가 가진 것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물론 가족을 모두 잃은 데이비드도 처음부터 선을 넘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통해 친구의 아내의 외로움을 잃고 조금씩 조금씩 접근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책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음악이 어떠냐?(그 음악이 팝송으로도 번안된 샤를르즈 트레메의 ‘바다’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책을 안 읽느냐, 책을 추천하고 싶다(그 책이 바로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었습니다.) 등등이었죠. 그녀가 남편에게서 원하던 그녀가 결혼 이후 맛보지 못했던 다정다감함으로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갑니다. 그녀가 만난 남편이라는 바다 너머의 또 다른 남편의 모습이죠. 진정 남편이 이래줬으면 하는 그 모습.
셰익스피어 비극 오셀로와 많은 면에서 비슷합니다. 클리프는 데이비드가 우주에 있을 때 상상으로 그린 자신의 부인의 누드를 보고 오해를 하고 복제인간의 몸으로 아내를 만날 때 극도로 흥분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유혹에 넘어갈 뻔했지만 사실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우주선에서 큰 싸움이 일어나 데이비드는 클리프를 죽이려고 우주에 내보내죠. 살아난 클리프는 더욱 끔직한 현실을 만납니다. 데이비드가 몰래 클리프의 복제인간을 이용해 지구로 내려간 겁니다. 자기 몰래 지구로 내려간 걸 안 코비는 다시 복제인간의 몸으로 지구로 내려와 피칠갑이 된 자신의 집을 발견합니다.
데이비드는 이제 자신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코비에게 웃으며 의자를 발로 차며 이렇게 표정으로 말하죠.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너도 내 심정 이제 이해하지?”
21세기에 블랙 미러로 환생한 셰익스피어는 5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인간의 고질적인 허브리스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교만, 그 교만에서 파생된 동정심을 연민으로 혼자 착각하는 인간, 그 자비를 오로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이용하려는 인간의 이기심 등 인간의 본질은 세익스피어 때나 우주를 개발하는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거죠. 인간이 허브리스를 여전히 품은 채 우주를 여행하고 우주에 인류를 퍼뜨리는 일은 그야말로 온 우주를 망칠 수 있는 일임을 경고하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