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영화 중 제게는 이 영화가 최고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3 대 요소, SF적 사고 실험,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인간의 행동 선택과 대응 등, 을 모두 갖춘 작품이었죠. 여기에 강한 사회성을 동반하면 저는 더 열광합니다.
영화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라고 쓰고 아비규환의 유토피아라고 읽습니다. 윤수일의 아파트(도대체 얼마 만에 듣는 음악인지 모르겠습니다.)에 맞춰 압축적 근대화의 상징 아파트가 대한민국 사회에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영화는 신랄하게 비꼽니다.
1) 대한민국은 어쩌다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나?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아파트 불패 신화라는 통념을 정면에서 비판합니다. 지난 2007년 한 프랑스 지리학자가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아파트 공화국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를 쓴 발레리 줄레조 교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이처럼 규격화된 비슷한 공간의 주거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말대로 한국인들은 너무나 아파트를 좋아합니다. 책에도 등장하지만 국내 첫 아파트가 건립될 때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이 대한민국 국민의 지금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국가 현대화의 도구이자 모든 봉건제도의 잔재, 농촌의 낙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이다.”
대한민국 아파트는 일종의 경북고속도로로 대한민국의 압축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죠. 사실은 이 둘에 박정희라는 세 글자가 압축적 근대화의 상징입니다.
그런 아파트가 대한민국에서 신분과 계습의 상징이 되어버려 모두의 관심, 극소수의 열광, 대다수의 절망아 되어버린 현실이 무너저벼리기를 바리는 집단 심리가 투영된 게 이 영화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세계 멸망 급의 대지진이 왔을 때 유일하게 버틴 아파트가 비학군지로 보이는 지역의 복도식 25평(전용 면적 18평) 서민아파트라는 점은 이 영화가 어디에 지향점을 두는지 잘 보여주죠. 그런데 이 아파트 단지 이름이 세셍에 황궁입니다. 황궁은 상대적인 개념이죠. 이 세상 모든 아파트가 붕괴되면 이 아파트는 자연스럽게 황궁이 되는 겁니다. 이 아파트만 멀쩡하자 식량과 전기 등이 끊긴 다른 지역의 고급 아파트 주민들이 몰려와 이 엄동설한에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안 되면 자식만이라도 잠을 자게 해달라고 빌죠. 밀려드는 이주민 때문에 이 아파트는 주민 회의를 열어 주민 대표로 이병헌을 선정합니다. 이병헌은 마치 히틀러로부터 배운 리더십을 실천합니다. 이 세상 사람을 이 아파트 거주민과 비거주자 바퀴벌레로 이원화한 뒤 아파트 주민과 그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바퀴벌레를 아파트에서 몰아내겠다고 포부를 밝힙니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다라는 말은 히틀러가 말한 유대인 없는 독일과 같습니다. 아리아인과 유대인을 구별해 아리안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을 박멸시키겠다는 히틀러를 그대로 떠올리게 하죠. 유대인을 바퀴벌레처럼 때려잡으려던 히틀러 때문에 무엇이 발생했을까요? 바로 아비규환입니다.
2) 지금의 대한민국은 아비규환이 아니던가?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정치적 지향점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들이 느끼는 현실의 고통은 이 말로 설명이 됩니다. 바로 아비규환이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아비규환과 어울리지 않는 유토피아를 합친 형용모순의 영화입니다.
영화는 한국 사회 질서가 대지진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지만 아파트 평수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계급을 만드는 한국 사회,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모든 걸 거는 한국 교육 등이 그대로 투영됩니다. 실제 아파트 거주민 중 한 취준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다 보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이 스펙으로 인정받는 날이 올 거야.”
세상이 무너졌는데 무슨 스펙이 필요할까요? 전기도 안 나오는 세상에 삼성전자가 버틸 수 있겠으며 비트코인 하나로 빵 하나도 못 사 먹을 세상에서 무슨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자본주의는 만인이 만인에 대한 늑대를 각자의 선량한 이기심 추구로 막아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제도이지만 자본주의가 망할 경우에는 사실 대안이 없습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한 늑대. 그게 바로 아비규환이고 아수라장이죠.
아파트 주민들은 목숨 걸고 이주민을 내쫓고 어떻게든 추위를 버티려고 들어오는 이주민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약탈 부대를 만들어 인근에 살아남은 마트를 습격해 주인을 죽이고 음식과 생필품들을 훔칩니다. 히틀러가 아리안 족의 생활공간(레벤스라움)을 넓히기 위해 소련을 친 것과 같은 맥락이죠.
사람들은 지옥을 무서워히자만 막상 지옥이 도래하면 다른 사람을 잡아먹고 서라도 생존하려는 욕망이 고통을 이깁니다. 생존 욕망 그 자체가 인성이자 젗체성이자 인격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간호사 박보영은 여전히 휴머니스트로 남아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죠. 이 영화에서도 직업이 간호사입니다. 정확히는 간호천사겠죠.
영화는 박보영의 남편 박서준도 죽고 가짜 주민임이 탄로 난 이병현도 마침 아파트를 급습한 이주민 약탈 부대와 싸우다 죽죠.
3) 인간은 사는 건가? 살아지는 건가?
이 영화는 더 이상은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한국인의 몸부림이 리셋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드러난 우화지만 시종일관 이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인 무게도 있습니다.
“인생은 사는 건가, 살아지는 건가?‘
영화 마지막에 아파트를 떠난 박보영은 다른 정착민(그들은 90도로 무너진 채 골격은 유지하고 있는 아파트를 차지한 다름 무리)에 합류합니다. 박보영이 만난 그들 중 한 여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떻게 살아남았어? 하긴 살아 있으면 그냥 사는 거지. 뭐 삶이 다른 게 있나?”
한국 사회 아파트를 중심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신분과 계급이 사실상 사상누각이었고 그것이 무너진 뒤 사람들의 삶에는 지옥도가 펼쳐지는 전개는 사실 뻔한 내용이죠. 그런데 이 영화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너무나 뻔한 디스토피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그래도 진보된 영화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대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감독의 의도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삶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 특별한 존재이기에 다른 동물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잘못된 논리다. 그냥 살아서 사는 거디.”
사실 영화는 모든 것이 무너진 디스토피아의 이야기지만 사실 삶에 대한 가장 좋은 태도는 삶의 의미 무의미를 따질 여유도 없이 그냥 살아 있는 동안 사는 게 전부일 겁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사람은 살아있죠. 살아있으면 됐지, 더 무얼 바라겠습니까? 살아 있는데 더 잘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과도한 사교육과 부동산 폭등이 이어지는 거죠. 더 잘 살려는 우리의 노력이 어쩌면 사상누각이라는 걸 이 영화는 말해주고 싶었던 거죠.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 동네 아파트 가격만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많은 한국인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높은 가격의 아파트가 절대 무너지지 않을 현실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게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족을 들자면 이겁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명장면을 고르자면 누가 봐도 저렴해 보이는 이 아파트에 살고 싶어 급매물을 샀다가 사기를 당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뒤 타인의 신분으로 주민 대표까지 올라선 이병헌이 눈을 감고 부르던 윤수일의 아파트입니다. 이병헌이든 누구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 그냥 쓸쓸해 보입니다. 좋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나 그 아파트에 진입하고 싶은 한국인이나 자신이 누리거나 자신이 꿈꾸는 모든 것은 언제는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한국 사회는 언제나 쓸쓸한 게 아닐까요?
이 글은 괜찮은 뉴스(nextplay.kr)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