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켄 로치가 비슷하면서 많이 다른 감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가족을 주로 다룬다는 소재 상의 공통점이 있어요, 칸느가 그랑프리와 심사위원 특별상을 주는 등 칸이 특별히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지요. 그런데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영국과 일본이라는 지리적 차이가 아니에요. 가난이라는 문제가 인류 전체 그리고 한 개인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걸 알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진지하게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로치 감독이 철저하게 리얼리즘을 취한 반면 고레에다 감독은 사회성 대신 실제는 없는 가상의 가족이라는 이데아를 찾는다는 점에서 실은 판타지 감독에 가깝습니다. 켄 로치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던 제가 조금 늦게 그의 최신작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서 ‘ 제 느낌이 맞았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됐죠.
1) 같은 가난 포르노지만 켄 로치가 봉준호보다 좋은 이유
‘미안해요 리키’는 리키라는 이름의 택배 운전사가 주인공입니다. 로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실업자 아니면 자영업자입니다. 특별한 직업인 킬러나 펀드 매니저 M&A 사업가 이런 것 안 나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지만 아주 아주 힘든 인생이죠. 그냥 주인공들이 배우가 아니라 평범한 영국의 하층민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이창동 감독과 가장 비슷합니다.
약간 거친 듯한 카메라 워크와 기교가 없는 편집은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취한 연출인데요, 영화에서 드러난 삶의 비극이 너무나 명료해 굳이 극적 장치를 추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몰입이 됩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아닌 가난이 주인공이며 가난이 사람들을 어떻게 슬프게 만들고 힘들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는 봉준호 감독과 참으로 많이 비슷한데요, 저는 봉 감독의 영화보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가 더 좋습니다. 감독의 목적이 나에게 세뇌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게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과 연대를 느끼고 자신과 사회를 함께 돌아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켄 로치의 따뜻함이 봉준호 감독의 극적인 연출력을 능가합니다.
2) 모든 가난한 가정은 똑같은 이유로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리키의 가족은 가난한 가족이 그렇듯이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상처를 줍니다. 그들이 사랑하지 않는 가족이라서가 아닙니다. 원래 가난이 그렇게 사람을 만듭니다. 돈 한 두 푼 때문에 자존심 다 버리고 이 놈 저 놈 욕하고 싸우게 만드는 게 가난입니다. 가난은 인간의 존엄성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며 인간이 하기 싫을 일을 돈 벌기 위해 억지로 하게 만듭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주 6일 14시간 노동으로 자신의 시간과 하루 100 파운드를 바꿀 때마다 리키는 수많은 것들을 잃습니다. 그중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관계도 있습니다. 리키와 요양사 아내의 관계는 특별히 좋은 편도 아니고 나쁜 편도 아니지만 영화가 진행하면서 가난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 특히 맞벌이 가정이 필연적으로 겪는 자녀 교육 문제, 등을 겪으면서 갈수록 나빠집니다. 물론 감독은 후반부에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사건을 인위적으로 배치히면서 관객을 조금 더 배려한, 그래서 평소보다는 조금 더 따뜻한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관객들은 이렇게 느낄 겁니다. ‘가난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좋은 부부관계는 물론 아버지 노릇 좋은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이 제대로 굴러간다는 전제는 가장이 원만한 경제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죠. 가난한 집은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심하죠. 아버지가 자신의 삶이 너무 싫어서 그런 삶을 살게 될 아들이 마치 과거의 거울을 보듯이 미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겁니다. 아들 역시 자신의 미래 거울인 아버지가 싫죠. 영화에서도 주 갈등 축은 부자지간입니다. 막내딸은 그런 부모에게 유일한 위안이기는 한데요, 부모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부모가 그리운 막내딸 역시 오줌을 바지에 싸는 등 적지 않은 고통의 시기를 보냅니다. 톨스토이의 말을 비틀면 대부분의 가난한 가족은 비슷한 이유로 불행한 것이지요. 영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자신의 일을 좋아서 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에게 선택지가 많은 삶을 원한다
영화의 가장 큰 갈등은 학교에서 정학을 맞고 집에 있다 그 시간을 못 참고 바깥에 나가 불량 친구들을 만나 폭력 사건에 휘말려 경찰서에 가게 되는 아들을 아버지가 결국 패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아버지는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해죠. 내가 설마 장인어른처럼 아이를 패는 아버지가 되겠어? 그런데 결국 그렇게 됩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난한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겠죠 리키의 부인이며 애들의 엄마인 아비의 아버지 역시 자녀와 아내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 겁니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마흔을 넘어 안정적인 직장을 잃으면 그때부터는 택배 등 긱 노동자를 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 리키에게 아들은 슬픈 거울이면서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하는 희망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제발 공부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다르게 선택지가 많은 그런 삶을 살거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요? 바로 우리의 흙수저 부모들이 늘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어쩌면 영국과 우리나라가 이리도 유사할 수 있을까요? 진짜 가난은 시대를 초월해서 그리고 국가를 초월해서 인류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깁니다.
4) 가난한 결코 사회가 해결해줄 수 없다?
켄 로치는 좌파이면서 사회주의자죠.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 제도의 개입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이들이 사회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는 보다 더 왼쪽에 서서 자본주의에 반대했던 로치 감독이 나이 들면서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 영화는 가난의 비극을 보여주지만 가난한 인생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 가난 속에서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누군가를 착취하려는 그런 삶들을 더 비판합니다. 악당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있다면 리키를 고용한 중간 노동자로 리키가 깡패들에게 구타당하며 택배 물건을 털릴 때 리키 건강 걱정보다는 보험금이 지급이 안 되는 품목이 뭐가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는 존재죠.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는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은 예전과 달리 많이 둔화됐습니다. 왜일까요?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이름만 사회주의를 하면서 현실에서 대안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간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가난이라는 고질병을 영원히 고칠 수 없다는 일종의 돈오돈수에 이른 건가요? 영국이라는 나라는 비싼 학비와 집값은 미국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의료비는 무상입니다. 지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는 메시지인 걸까요? 일단 켄 로치 감독은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국부로 이 이상의 복지는 어렵다는 것을 분명 깨달은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현실주의자가 된 것은 맞죠. 그렇다면 대안이 뭘까요? 그냥 체제 만족일까요? 결국 가족이 전부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공허한 말을 하면서 훈훈한 가족 영화로 마무리하고 싶었을까요? 아니면 60년대~70년대 영국이 노동당이 전성 시절이었던 시기로 돌아가 노조가 강해져야 한다는 흘러간 LP 판을 틀고 있는 걸까요? 일단 체제 만족이 켄 로치의 해답은 아닙니다. 저는 나머지 두 개가 켄 로치의 머릿속에 있다고 봅니다. 가족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할아버지가 들어와도 해체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의지처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서 가족이 확대된 공간이 노조여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죠. 그는 플랫폼 노동으로 노동자 연대가 파괴되며 서로가 세 살 갂아 먹기 식의 무한 경쟁 체제로 가고 있는 긱 경제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래서 그는 슬픈 자영업자인 택배 회사 직원의 삶을 보여주면서 긱 노동자에게도 노동자들의 연대 및 공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물론 가난을 사회가 완전히 구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일하는 공간이 조금 더 가족처럼 따뜻해진다면 그래도 조금은 덜 불행한 가난이 존재할 수가 있겠죠. 켄 로치는 가장 최근작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 이 작품을 통해서 가족과 노조를 잇는 그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상주의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