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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베르베르의 행성은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지 못했을까?

by 신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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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베르베르의 개미부터 시작해 이번에 나온 행성까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은 찐팬인데요, 베르베르와 일러스트레이터가 함께 작업한 만화, 그리고 베르베르가 감독한 단편 영화 두 편까지 다 보았습니다. 유일하게 못 본 게 그가 연출했다는 뮤비인데, 도저히 유튜브에서 찾을 수가 없더군요. 명실공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점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베르베르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지난 30년 동안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은 작가인데 그 사랑이 옛날만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1위는커녕 탑 10에도 들지 않은 일은 이번 ‘행성’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쳇말로 베르베르가 맛이 갔다는 증거일까요? 아니면 ‘행성’이 완성도나 재미 면에서 이전보다 확실히 떨어지는 작품이라서일까요? 아니면 그냥 시기가 안 좋아서일까요? 저는 세 번째라고 생각합니다.

1) 고양이 이야기보다 개 이야기에 더 끌리는 한국인들

‘행성’은 베르베르가 인간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인간 이상으로 사랑하는 동물인 고양이가 주인공인 시리즈 중 완결 편입니다. 베르베르는 두 마리 암 고양이를 어쩌면 아들 둘보다 더 사랑할지 모르는 애묘가인데요, 소설가 중에서 애묘가는 진짜 많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결혼도 하지 않고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죠. ‘태양은 가득히’, ‘열차 속의 낯선 이방인’을 쓴 파트리샤 하이스미스, 방탄소년단의 RM이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 어슐라 그 귄 등이 대표적인 고양이 빠들입니다. 르 귄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고양이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도 했죠. 아마 이들 말고도 찾아보면 엄청 많을 겁니다. 소설가 특히 장르소설가들이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고양이 특유의 매력 때문일 겁니다. 저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고 강아지를 친딸처럼 사랑하는 애견가이기는 한데요, 애견가와 애묘가는 민주당 지지자와 국힘 지지자처럼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며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동물 애호가들입니다. 동물 학대 이야기가 나오면 이들은 똘똘 뭉치죠. 애견가들이 길고양이 학대에 눈물을 흘리고 보신탕 논쟁이 나오면 애묘가들이 애견가와 함께 싸워줍니다.

그런데 대중문화 상품에서는 강아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가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보다 훨씬 더 인기를 끄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개와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좀 더 많은 다수들의 생각이 그래도 고양이보다는 개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개 하면 충직 주인에 대한 맹목적 사랑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 등을 먼저 떠올리죠. 고양이도 예전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약간은 남아 있습니다. 숫자적으로도 국내에서 애견인은 600만 명으로 애묘인의 200만을 압도합니다. 외국보다 훨씬 더 고양이보다 개를 키우는 비율이 높은 나라죠. 즉 행성이 베스트셀러 1위를 못 한 이유는 고양이보다 유달리 개를 선호하는 국내 반련 동물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죠.

2) 지금은 더 이상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싶지 않다

고양이 시리즈의 환결판은 프랑스에서 미국 뉴욕과 보스턴으로 무대를 바꿔 신대륙에서 고양이 인간 개 연합과 쥐 연합군이 인류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을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고양이와 고양이가 돕는 인간들의 삶이 너무나 끔찍해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입니다. 서산서해로 뉴욕시에만 3000만 마리가 존재하며 4만여 명의 남은 인류와 5000 마리 4000마리의 고양이와 개들의 연합군이 벌리는 전투는 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이오지마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능가하는 잔인함과 처절함이 느껴집니다. 그의 소설은 SF지만 묘사는 굉장히 순했던 편이었는데요, 이번 소설에서는 그는 진정 지옥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학살과 주식과 비트코인 폭락에 충격을 받아 밤잠을 설치는 다수의 독자들은 이런 현실을 잊고 싶어 소설을 읽는 건데, 소설 속에서 극한의 공포를 만나야 하니 좋을 리가 없죠. 제 생각에 올여름에는 공포 영화가 안 될 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폭우로 겪는 인간의 재앙과 생존 투쟁을 그린 ‘하드 레인’이 국내에 개봉될 때 홍수가 왔던 시점과 비슷하게 행성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이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은 전쟁과 그에 따른 공포를 직접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3) 불통의 시대에 동물을 초월한 소통 이야기에 공감이 안 간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소통입니다. 종과 종의 종을 초월한 소통이면서 같은 종 내에서 소통을 다루고 있죠. 서산서해를 이루고 인류와 고양이 연합군을 궤멸시키려던 쥐들이 갑자기 무너진 이유는 바벨 바이러스로 쥐들이 서로 소통을 하지 못해 서로 공격하면서 대열이 흐트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번의 큰 선거를 거친 우리 사회는 우리가 얼마나 소통에 서투르며 세대 간 지역 간 갈등과 불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게 해 준 경험이었습니다.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올해처럼 실감 나게 느낀 해도 없을 겁니다. 지난 정부에서 지난 정부를 반대하던 이들, 이번 정부에서 이번 정부를 반대하는 이들이 겪으며 ‘아, 우리 민족은 역지사지가 정말 어려운 민족이구나’를 깨닫는 순간이었죠. 같은 민족이며 같은 역사와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갖고 수천 년을 살아온 우리도 이렇게 소통이 어려울 텐데 고양이가 아무리 제3의 눈을 통해 인류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개량되었더라도 인간과 소통해 인간과 고양이의 공동의 적인 쥐들과 싸운다는 게 실감이 되겠습니까? 어떤 이는 이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죠.

4) 바스테트가 원했던 초식 인류 진짜 가능할까?

이집트의 고양이 신에서 이름을 딴 주인공 바스테트는 인류에게 일갈합니다. “인간들이여, 육식을 끊고 다른 동물과 공존을 할 생각을 해야 지구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게 바로 이 소설을 통해서 베르베르가 말하고 싶은 주제의식이었습니다. 실제 베르베르는 채식주의자이고요. 그러나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물론 2030은 다른 세대보다 동물을 더욱더 사랑하고 채식에 대한 의지와 더 비싼 돈을 내고 대체육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다수는 아닙니다. 이미 고기 맛을 들인 인류는 고기를 영영 끊을 수가 없고 게다가 돈을 더 내고 맛은 떨어지는 대체육을 먹을 리는 더욱더 없죠. 밀레니얼 세대를 믿고 나스닥에 상장해 고공 행진했던 대체육 업체 비욘드미트의 주가가 거의 90% 빠진 이유도 이런 녹녹지 않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200 달러에서 23달러로 거의 10분의 1 토막이 났습니다. 인간이 초식동물로 변신하는 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거죠. 물론 베르베르처럼 동물 해방론자들은 적극 외치겠지만 아무리 대체육 기술이 발전해도 사냥꾼으로서 인간이 지닌 본능 피와 살을 즐기는 그 본능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5)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왜 더 발전을 못 하는가?

마지막으로 이유를 추가하자면 그의 마니아들이 그에게서 느끼는 사실인데 정점 더 나이가 들수록 베르베르의 상상력도 고갈이 되어간다는 느낌입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 백과사전’의 토막 지식들도 예전 책에서 본 내용이 다시 드러나는 등 그가 새로운 지식이나 관점이나 기술보다 기존의 알고 있는 세계관과 캐릭터 플롯에 점점 더 고착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는 넘쳐나죠.

영화와 게임을 좋아하고 소설 외에도 다른 매체를 통해 빠르게 아이디어를 흡수하던 그가 어느 시점부터 새것을 자신의 소설에 담으려 하지 않고 기존에 이야기를 재탕 삼 탕 우려먹는 비율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의 마니아는 참으로 슬픕니다. 그는 자기 표절에 빠져 버린 천재 작가인 것이죠. 고양이에서 고양이 바스테드는 개미에서 주인공 개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죠. 고양이 시리즈의 악역들인 티무르와 알 카포네도 다른 작품들에서처럼 역사에서 따온 캐릭터들이죠. 메릴린 먼로 쥘 베른 등 실존 인물을 ‘신’에서 등장시킨 그는 이번에는 힐러리 클린턴을 대멸망 이후 인류 지도자로 등장시킵니다. 보니까 보는 영화도 큐브릭 감독의 영화 듣는 음악도 모차르트의 레퀴엠,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 등 늘 같은 영화와 음악이더군요. 본인이 블랙 미러도 열심히 보면서 메타버스 가상현실 등 새 기술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봐요. 베르베르도 결국 플랫폼 노동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베르베르가 가진 플팻폼은 참신성을 잃고 클리셰를 향해 점점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독자는 저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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