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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Apr 22. 2024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후에

다케다 다이준

숨 쉴 틈도 없는 각고면려의 일생이 여기에서 완결되었습니다. 질주하는 장거리 러너의 고독한 육체와 정신이 박차고 나간 흙먼지, 그 숨결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춤추며 날아오르고, 다시 흩날려 가라앉습니다. 당신의 인내와, 당신의 결단. 당신의 증오와 당신의 애정이. 그리고 당신의 파안대소와 당신의 침묵이 우리들 가운데서 표표히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긋이 압박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적이라기보다, 어딘가 모르게 도덕적인 것입니다. 당신이 <부도덕 교육강좌>를 발표했을 때 나는, "이렇게 생짜로 진지한 노력가가 부도덕 같은 것에 익숙할 리가 없는 거 아닌가"하는 직감이 들었습니다만, 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덕 없이 살아가는 생은 생이 아니라고 믿는 소질을 갖추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 당신을 황홀하게 했던 "미"를 억눌러 놓고 "도덕"은 끊임없이 당신을 꽁꽁 묶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육체의 효능을 의식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맹훈련을 요구했습니다. 아니, 문장을 끄적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당신의 문체(그러니까 정신)를, 엄한 긴장의 요새로 삼고 도장道場으로 삼았습니다. 그 문체는 당신을 지키고 당신을 세워올리는 것인 동시에, 당신을 심판하려고 하고, 당신을 강제로 독점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낳은 문체와의 악전고투. 

최초로 썼던 장편 <가면의 고백>을 출판사에 넘겼을 때 간다神田에 있는 작은 끽차점의 어두운 구석에서, 나는 그걸 목격했습니다. 보랏빛 고풍스러운 보자기에서 두툼한 원고 다발을 주섬주섬 꺼내는 당신은 안면 창백, 기진맥진한 사람처럼 보였고, 정신집중의 연속 후의 방심과 만족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세 페이지가 좋아", "한주 동안 온천에 있으면서 한 페이지도 못 썼어", 그때 당신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던 동인잡지 <서곡>의 좌담회 석상에서도 당신은 거의 웃지도 않고 "피", "피를 흘리고 싶다"라고 수줍은 듯이 말했었죠. 그리고 <그리스>(후일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당신은 정말이지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와 하얗게 빛나는 원기둥을 두 눈으로 담아온 사람처럼 고대 그리스를 예찬했던 것입니다). <서곡>에 발표한 중편 <사자>도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모친의 그리스 비극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편안한 술자리에서는 "모른다면 설명해주마"라며, 그렇게 잘하지도 않는 가부키 대사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조숙함과 천진난만함의 절묘한 융합. 마시고 싶지도 않으면서 어울려서 술을 마시려는 그 노력. 장유유서를 지키는 예의범정함과 그에 대립되는 지기 싫어하는 기질의, 참으로 무리 없는 결합을 위한 노력. 결코 노력을 버리지 않았던 당신에게 있어서, 노력 이외의 풍속적 쾌락이 과연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할머니는 말투에 까다로운 사람이어서, 일본어의 악센트를 정확하게 발음하도록 당신을 마름질했던 것인데, 언젠가 당신은 "고추잠자리"라는 단어를 당신 발음으로 실제로 들려준 적이 있죠. 문체가, 작가의 스스로에 대한 마름질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실로 "마름질 전통"의 중추에 좌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노인이 된다면 나가이 가후보다는 까다로운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했던 비평가도 있습니다. 순수와 엄격. 외잡한 것에 대한 거부와 고귀한 것의 호지護持가 "까다로운 사람"의 아름다운 점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그 아름다운 점을 당신의 최후에 의해 입증해 보였습니다. 문학자로서도, 정치적 행동자로서도, 공전절후의 "까다로운 사람"으로 지속할 수 있었던 당신에게는 우리들처럼 "까다롭지 않은 자들"을 정면에서 대나무 쪼개듯 베어버릴 권리와 자격이 있습니다. "구린데", "기분 나쁘네", "그건 싫군요". 특별히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야말로 심술궂은 할아버지처럼 눈썹을 찡그리고 내려다보는 눈으로 문학자들을 비판(아, 별로네요)할 때, 무미건조한 부동성이 응축되어서 청결한 느낌을 주었죠. 참된, 타고난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들이 싫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당신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를 질식시킬 정도의, 대단히 다량의, 훌륭한 개화開花는 지하의 뿌리를 잃고 불가능했을 게 아닙니까. 

깊은 집념의 극기심이 당신을 단단히 지탱했습니다. 게를 싫어하는 당신은 일본요리집 상차림에 아주 작은 게가 통째로 올라온 것을 보면 몸을 돌려 외면하고 "게라는 글자만 봐도 싫다"고 진지하게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의 희곡에 선인장이 등장했을 때, 나는 "아, 게의 집게를 닮은 선인장을 굳이 등장시킨 것은 분명 게 알레르기를 극복하기 위해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당신은 가시가 삐죽삐죽 달린 톱날 일본도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의 일본도 애호도 게의 집게, 수족, 그 움직이는 모양, 걷는 모양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는 과정의 일부였을 지도 모릅니다. 야쿠자의 젊은 오야붕 역할로 영화에 출연했을 때 "자신의 약점(겁쟁이 성격)이 자신도 모르게 나와버렸다"고 분하게 말했었죠.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당신은 군인, 무사, 미련 없이 깨끗하게 죽기 위하여, 자기자신과 다른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 일종의 쾌감을 지니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습니다. 성스러운 젊은이(물론 미청년이어야 합니다)가 나체로 속박되어 다수의 화살을 맞는 회화, 그 그림을 당신은 좋아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황, 게다가 멍하니 혼미한 듯한 육체를 노출시킨 채, 번민하고 괴로워하며, 게다가 화살은 가능한 잔혹한 방식으로 박혀야 했습니다. 자기혐오를 극복하여 자기도취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자신을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고, 서로 괴롭혀서, 해볼 수 있는 데까지, 마지막까지 괴롭혀 나가는 것. 게다가 점차, 괴롭힘이라는 약의 용량을 늘리고 끝내는 제한된 용량을 넘길 때까지...... 미리 항문에 삽입해뒀던 알을 관객 앞에서 알 낳듯이 떨어트리고 꼬끼요하고 신음소리를 내는 백인을 당신이 묘사했을 때, 당신은 禁色의 禁을 억지로 비틀어 열면서, 정신의 뼈가 삐걱거리는 것을 느끼고, 몸서리쳤음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의 동성애조차 나는 일종의 굴욕돌파를 위한 노력, 약자에서 강자로의, 일순의 도약으로 느껴졌습니다. <금색>의 일본 청년은 백인 남자에게 강간당합니다. 강간당할 바에야 강간하는 쪽이 정당하다고, 아마 <하가쿠레>는 당신에게 꾸짖으며 알려줬을 것입니다. 우아를 존숭하는 당신은 그러나 평범한 의미의 강간자에게도, 살인자에게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선언과 당신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한 사람의 적(남자)조차 죽이는 일 없이 죽어갔습니다. <새벽의 절>이 발매된 뒤 당신은 "인도는 대단합니다, 인도는 좋아요"라고 감탄했죠. 그건 문둥병자를 포함한, 당신이 몸서리칠 정도로 혐오하는 대상들이 거기에 충만하고, 의연히 잔존하는 '게 감각'을 극복하기 위한 재료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거기서 당신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화재와 노을. 당신을 위협하고, 또 당신을 유혹하는 붉은 빛. 하얀 바탕에 붉은 히노마루 깃발. 일찍이 많은 청년들을 검은 죽음을 향해, 닥치는대로 돌진시켰던 국기의 붉음과, 당신의 반대측의 청년들을 충동질하는 혁명기의 붉음, 붉음이 다하는 역할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래요. 잊을 수 없죠. 립스틱. 초기단편 중에, 당신은 소년에게 여자가 손으로 립스틱을 발라주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작은 봉 모양의 립스틱이 소년의 입술에 조금 경련을 일으키면서 붉은 선을 남기며 지나가는 감각. 태어나서 처음 말랑말랑한 살의 개공부開孔部에 부가되려고 하는 인공의 붉음. 그 우아하기는 하지만 생생하고, 화장이기는 하지만 모험이었던 립스틱적인 수동성에서 탈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붉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까. 이 세상에는 요란한 경계색으로서의 붉음만 있는 것은 아니죠. 경사스러운 축하와 축복의 붉음도 있습니다. 변신하기 전까지 당신은 여뀌풀이나 선물 포장지에 덧붙이는 축하의 표지 같은 것들의 붉음, 그 온기에도 착실하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의리를 굳건히 지키는 행동거지, 공항에서의 환영, 파티에의 출석, 가정의 건설, 영업의 번영, 좋아하는 동료에 대한 격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착착 성공해갔던 자기선전.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계에서 국제적인 안전보장으로 통하는 노벨상에의 접근. 흥성거리고 떠들썩한, 뜨뜻미지근한 붉음에 둘러싸여서, 라고 하기보다는, 당신은 스스로 그것을 창조하기까지 했습니다. 

배우, 연출가, 작곡가, 시인들이 결성한 <横の会>의 어느 저녁모임, 당신은 부러 대량의 양식洋食을 주문해서 몽땅 먹어치우고, 만사 웃고 넘기는 중년 남자의 태도도 체화해서 보여줬습니다. 점차 이 연극, 연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바쁜 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鉢の木会>의 동인이었고, 나는 <アサッテ会>의 일원이었죠. "다케다씨, 적 편에 섰네요"라고 호걸처럼 웃으며 나를 놀렸지만 당신은 <鉢の木会>의 당일 메구로의 당신 집에도 초대해줬고 오오모리에 새로 지은 집에서도 공을 들여서 대접을 해줬습니다. 내 관찰에 의하면, 동인과 선배들에 대한 서비스는 만점, 어머니 및 가족 분들의 가세까지 더해져 신식 고급 마이홈의 즐거움까지, 듬뿍 맛보게 해줬던 것입니다. 거기엔 새빨간 장미의 달콤한 향기, 수입 와인의 무게감 있는 붉은 맛은 있었지만 붉은 피의 코를 찌르는 냄새 따위는 맡을래야 맡을 수도 없었습니다. 중용을 아는 보통 사람의 노력이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노후까지 영속할 듯한 안정된 분위기가 풍겼는데. 그건 전부 가면이었고 위장이었던 것인가요. "제 할아버지 그림이 정말로 좋은 건가.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당신이 비평했던, 어머님의 부친, 그 유명한 화가는 당신이 죽은 다음날 예술원회원의 영예를 수락했는데. 

누구보다 보통 사람이었을 당신이 보통사람의 안정된 삶의 전부를 파기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왜 그랬던 것인가요. 일체를 버리라고 하는 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만, 당신은 공관空観을 해명하려고 했던 <새벽의 절>에서조차 불교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정말로 불교적으로 되자마자 당신이 건축해올린 미학이 붕괴할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야말로 난해한 불교철학을 구태여 밟아나갔고, 후지산 기슭의 자위대 연습에 참가했고, 밤의 수해樹海를 탐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업난업苦業難業, 남들이 할 수 없는 돌진의 하나로서 선택했던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구약, 신약성서에 대해서 당신이 얘기한 건 너무 적어서 양명학에 대해 얘기한 것의 백분의 일도 안 될 겁니다. 신의 구원도, 부처의 구원도 당신은 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어떤 구원을 추구하여 죽음에의 급경사를 뛰어내려가고 화려한 행동의 험로를 뛰어올라갔던 것입니까. 자기긍정을 지나치게 추구한 결과, 자기파괴만이 "구원"이라고 그렇게 결정해버렸던 것입니까. 

중앙공론사의 신인상, 다니자키상, 이 두 개의 문학상 선고위원으로서 당신과 나는 함께 일했습니다. 후카자와 시치로의 <나라야마 부시코>에 가장 먼저 주목했던 것은 당신이었고 후쿠다 쇼지의 <상실>이 2회 신인상이었죠. 후쿠자와씨를 선정한 다음 "뭔가 이 사람 기분 나쁘네요"라고 중얼거렸던 당신의 말은 예언이 되어 <풍류몽담> 사건 직후에는 "우익의 표적이 되면 안 되니까"라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보호를 위한 경관을 당신과 나, 우리 두 사람 집에 배치했던 일도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겠죠. 다름 아닌 당신이 "우익의 표적이 되는" 희극이 있었던 것이니까요. 표적이 될 바에야 남을 노려라. 위협을 받을 입장이 싫다고 하면 위협하는 입장에 서라! 예의 당신의 극기심이 그렇게 작용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추방된 방랑자 후카자와 씨를 그 첫 작품에서 "기분 나쁘네"라고 간파했을 때 당신은 혹시 할복한 자신의 배에서 창자가 비어져나오고 자신의 목이 잘려 떨어지고 구르는 현장 사진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기분 나쁘네"라고 소란을 피우게 될 것까지 간파했던 것은 아닌가요. 누구든지 한 치 앞은 어둠입니다. 간파하는 사람 따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군자는 표변"합니다. 천재적인 문학자의 급격한 변화가 우리에게는 의외이고 당신 자신에게도 의외인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죽음은 평등합니다.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장렬하게 마친 죽음이라도, 아무리 비참하게 쇠약해진 죽음이라도. 만인 앞에 외침으로 알려지는 죽음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남모르는 죽음도. 자기주장의 죽음도, 침묵의 죽음도. 죽음에 만일 가치가 있다면 어떤 죽음의 무게도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은 사족을 싫어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같은 걸 싫어했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정직하게 말하자면", "오늘 시점에 돌아보면". 그런 것들을 거부했습니다. 나도 그런 것들은 싫습니다. 현대의 TV에서는 "....하지만"이라고 한 번 출연하면 20번도 넘게 "けれども"를 반복하는 여성 아나운서도 있습니다. 당신은 "けれども문화"를 경멸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리 경멸하고 아무리 싫어해도 엄격하게 존재하는 이 세상의 풍속습관, 유행인심에는 남들보다 훨씬 자세히 민감했습니다. 가부키 극장에 출입하고 명배우를 지도한 당신은 "무서운 곳이에요. 조금만 마음가짐이 부족하면 내가 신고 갔던 신발이 없어져버린다니까요"라고 했고, 신극판에 깊게 빠졌을 때 당신은 "아무튼지 배우가 곤란합니다. 도무지 쓸모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10년도 전에 당신이 나에게 <家畜人ヤプー>를 읽히고 싶어했던 것은 무신경하고 완고한,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위태로운, 넘실넘실 퍼져가는 "기분나쁜 것"에 대항하기 위해, 별개의 신선한, 자각된 기분나쁨을, 응급치료법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푹푹 빠지는 진창이여. 태연한 얼굴을 하고 "이게 인간이라고. 어쩔 수 없잖아. 이상한 놈은 이상한 거야. 우리하곤 관계 없어. 그렇잖아"라고 미리 짜고 눈짓으로 서로 알리며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좋은 사람 행세를 하는 세상 사람들의, 완전한 무의식의 깊은 늪은, 만만찮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당신이 고군분투하더라도 도저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위대한 인류의 정통파, 건전한 주민의 유유한 기분나쁨. 그건 당신의 부지런한 노력, 각오, 분사憤死, 당신의 기분 나쁨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삼켜버리고 번지르르한 일상의, 경사스러운 붉은 표면을 매끈하게 정돈하고 지속해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별>에서 당신은 화성, 목성, 금성, 토성에서 찾아왔다고 믿어의심치 않는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왜 그 예언적 소설이 평가가 좋지 않은 건지. 똑똑히 알겠습니다. "인간"들은 지구인이라는 것이 인간이며, 자기들이야말로 지구인 그 자체라고 믿고, 게다가 자신들의 주장을 한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다른 별의 기분 나쁜 인간으로 착각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사랑하는 미시마 유성에서 파견되어온 미시마인이여. 허공에 빛나는 당신의 높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쓸쓸하지도 않게 기분 나쁘지도 않게 어째서인지 유쾌해지는 것은 왜일까요. 민중, 즉 당신의 주변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상으로 당신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게 당신의 천재적인 재능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당신 입술의 립스틱이 내 이빨 빠진 입술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이 좋았다"고 소리쳐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벨상은 안 받아요" "연극은 끝났습니다" "문무양도 같은 건 가능할 턱이 없어요". 죽기 직전 남은 당신의 말은 사랑하기 때문에야말로 사랑하는 것과 단절하는, 우주인의 애달픈 지혜를 보여주는 것인가요. 그렇다고는 해도 <방패의 회>는 <横の会>와는 다르고, 어째서 그렇게도 아름다운 제복을 착용하지 않으면 않았던 것인가요. 오히려 잠옷, 저고리, 몸뻬, 짚신, 각반, 도롱이, 종이우산 같은 쪽이 일본전통문화가 분명하게 드러나서 좋았을 게 아닌가요. 뭐? 그러면 괴이해진다고? 아, 괴이해지면 방위대 학생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는 것이군요. 아니면, 부대원도 모을 수 없다는 건가? 그렇군요. 괴이하지 않은 "괴인물"이 되려고 했던 것이군요. 

여러가지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우리도 괴이하지 않으면서 "괴인물"이 되도록 마음을 먹겠습니다. 아니, 아니지. 잘못 말했네요. "괴이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지구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잘 될 지 어떨지) 노인성 질환 때문인지 이미 지쳐버려서 잠이 오는 군요. 또 꿈에서, 우리 둘이서 만납시다. 혈기방장한 부대원들은 데려오지 마세요. 이왕 버릴 거면 마음에 드는 동지도 버리고 오세요. 제행무상이. 문무양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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