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려함이란 역량이다. 역량은 역량으로 간주되는 한 역량이다.
2.
미시마 유키오는 검도를 못했다. 일본에서 5단까지 땄지만 들려오는 얘기로는 1년 한 나랑 별로 차이 안 났을 것 같다. 미시마가 운동신경이 형편 없었으며, 목각인형이 움직이듯이 삐걱거렸으며, 전혀 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이 일화에 대해 얘기하기 좋아한다. '검도 못한 미시마', '플라멩코 배우러 갔다가 네 운동신경으로는 무리야, 라는 말로 거절당한 미시마', '접대 유도 받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던 미시마' 얘기가 곳곳에서 유통된다.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유려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은 정당하게, 자신의 유려함의 권리(역량)를 암묵적인 뒷배로 삼은 채 이 치부를 통렬하게 지적하기를 멈추지 않아왔다. 이러한 세태에는, 이시하라 신타로의 자극적이지만 깊이 없고 단순한 통속소설과 미시마의 고상하고 우아하며 복잡한 구조 속에 정신의 깊이가 각인된 순수소설 사이의 차이가 유려함의 유무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세간의 본능적인 직관이 게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미시마의 극히 세심하게 조탁되어 있으면서도 장대하게 건축된 소설 세계에는, 그의 삐걱거리는 육체, 검도 못하는 형편없는 운동신경과 어울리는, 어떤 숨길 수 없는 타고난 부자연스러움이 있는 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운동음치 미시마" 이미지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왔다고 할 때 그 메커니즘을 뒷받침한 암묵적인 의심, 집요한 문제제기다.
3.
음주가무를 못하는 사람은 못하는 것이다. 검도를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연기를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영어를, 한국말을 유려하게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도대체 왜, 라고 물어도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잘하는 영어라는 게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야!" "하나의 영어가 아니라 무수히 다양한 영어가 있는 거야!"라고 말해도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못하는 자들은 열등감을 갖고, 사람들은 못하는 자들을 차별할 것이다. 유려함이 야기하는 불평등을 꼬치꼬치 따져가며 비판하는 자는 유려하지 못한 자다. 그런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원래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헛된 망상이다. 헛된 망상은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을 뿐이다. 헛된 희망은 사람들에게 해롭다.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 거기서부터 헛된 희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배신당하고 말 기대가 시작되는 단초다. 헛된 희망, 기대, 그것들은 헛되기 때문에 배신당할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은 구름 위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처박히는 고통을 그 때문에 맛보아야 한다. 우리를 그냥 이대로 지상에 머무르게 하라! 이 말의 울림을 음미해보자. 같은 울림이 침묵 속에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주고받는 눈짓들 속에, 은근한 암묵적 합의들 속에, 분위기의 압박 속에, 일체만물의 관성 속에서 거대한 천지자연의 음향으로 울리고 있음을 감응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모든 존재가 자신 안에서 지속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의 당연한 본성이며, 이러한 만물의 관성은 그저 유일한 세계의 필연적인 법칙이며, 그런 한에서 좋은 것, 선한 것일 뿐이다. 필연적으로 자연만물은 이런 불평등을 지속하려는 관성을 갖고 있다. 이 천지자연의 관성은 개개인을 절대적으로 압도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은 도저히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대로, 상황의 모든 드러난 국면들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예증한다.
4.
우리를 그냥 이대로 지상에 머무르게 하라! 이 외침에서 들리는 것 중에는 상승에 대한 소망도 포함된다. 사람들이 평등의 약속을 기피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평등을 바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의 약속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고 아무런 꿈도 희망도 줄 수 없다면, 사람들이 굳이 평등의 약속을 백안시하거나 심지어 증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람들은 상승을 원하기 때문에 상승을 거부한다. 지상에 머무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지상에 머무르게 놔둘 것을 요구한다.
5.
김고은은 무당 춤을 못 춘다. 굿도 못 한다. <파묘>에 나오는 굿은 굿도 아니다. 이것은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도 없는, 내게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이 진솔한 평가는 또한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것을 '유려함의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김고은보다 무악을 많이 접하고 많이 연주하고 한국춤을 많이 춰봤다는 이유만으로, 패턴에 대한 지식이 더 많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장에서 베테랑이 이제 막 들어온 초년병을 얕잡아보고 그의 얼타는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듯이, 김고은을 얕잡아보고 그의 못 추는 춤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베테랑이 초년병을 갈구듯이 나도 김고은을 갈구는 건 일도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무용 따위의 유려함을 부정하는 것은 용이하다. 그것은 한국무용에 유려함의 위계구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무용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장에서 베테랑과 초년병 사이에 성립하는 유려함의 위계구조 및 유려함의 폭력을 무시하거나 무화시키는 것은 훨씬 어렵다. 한국춤을 유려하게 못 춘다고 죽지는 않지만 전장에서 유려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국에 나가서 외국어를 "유려하게" 말하지 못할 때 뒤따르는 불평등한 처우들은 한국춤을 못 춰서 생길 문제(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이고 진지하게 마주해야 하는 '진짜' 문제들이다.
6.
처음 연기를 배우는 사람은 연출과 선배 배우들 앞에서 있는 힘껏 열심히 연기한다. 그러나 그의 연기는 고쳐야할 것 투성이로 드러날 것이다. 왜 고쳐야 하는가? 좋은 연기가 정해져 있는 것인가? 그런 질문을 그 자리에서 새내기 배우가 하기는 어렵다. 그런 질문을 하면 할수록 새내기는 획득해야 할 유려함에서 멀어질 것이다. 아예 연극을 안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연극을 하는 한 이 문제가 따라붙는다. 연극판에 들어간 새내기와 현대 주짓수 판에 들어간 초보자가 처한 상황의 차이는, 전자는 미학적 유려함의 폭력 하에 놓이고, 후자는 병법적 폭력 하에 놓인다는 점이다. 전자에서는 '이러이러한 것이 좋은 연기'라는 원칙이 새내기를 억압한다. 후자에서는 정해진 경기 규칙 하에서 이긴 놈이 센 놈이라는 원칙이 초보자를 억압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의 원칙은 허상이라고 생각하면서 후자의 원칙은 허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기도 한다. 양자 모두 환상이라는 점은 <중국의 무술은 시합이 끝난 후 시작된다>에서 다뤘다. 바꿔 말해서, 주짓수의 역량이 리얼하다면 연기 역량도 리얼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그 역량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고, 후원자를 얻을 수도 있고, 연인을 얻을 수도 있고, 사기를 치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주짓수를 아무리 잘해도 연기 잘하는 사람의 연기에 넘어가 목숨을 잃을 수 있다.
6-1.
한 상황에서는 역량으로 계산되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역량이 아니라고 계산될 수 있다. 일정한 상황에서는 생존에 유리하지 않은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유리해질 수도 있고 일정한 상황에서는 승리에 유리하지 않은 특질이 다른 상황에서는 승리의 일등공신이 될 수도 있다. 역량이란 역량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역량이다. 안중근은 이토를 죽였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성공한 암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한국병합이 가속화되었다면, 이토가 죽고 그 대신 강경한 군인이 조선 통감으로 왔다면 등등 다른 방식으로 상황의 이해득실을 계산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안중근의 암살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 “다른 계산”이 언제나 무수한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새옹지마를 보라. 역량을 깎아먹는다고 생각한 일이 얼마든지 역량을 늘리는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새옹지마 고사가 거기서 끝났기 때문에 해피앤딩인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같은 이유로 아들이 죽임을 당한다면 노인은 그 때문에 또 비탄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동일한 무언가의 역량은 그 역량이 놓인 상황을 어떻게 잡느냐, 얼마만한 범위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무수히 달라질 수 있다. 수주대토도 계속 기다리지만 토끼가 오지 않는 데서 고사가 끝나니 멍청함을 비난하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거기서 기다렸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게 토끼보다 더 좋은 뭔가를 얻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고사성어의 교훈이 무화되거나 달라질 것이다. 역량은 역량으로 간주되는 한 역량인데, 역량으로 간주되느냐 안 되느냐는 상황을 어떻게 잡느냐에 달려있다. 역량은 특정 형세 하에서의 관계 양태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생존과 죽음조차도 기준이 될 수 없다. 생존한다고 역량이 있고 죽는다고 역량이 없어진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무병장수했으나, 삼국통일에 작용한 그의 삶의 역량은 죽어버린 관창의 역량, 죽어서 비로소 관창이 발휘하게 된 역량에 비하면 미미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상황을 어떻게 설정하고 역량을 어떤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의 문제다.
7.
유려함이란 언제나 닫힌 공동체 안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다. 그것이 역량이라고 인정하기로 하자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합의를 통해. 한국춤의 '한' 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김고은이 무당 춤을 잘 추네 어쩌네 말해봐야 이해될 리도 없고, 그런 평가의 기저에 있는 위계와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터인데, 그것은 반드시 그 외부자가 지닌 평등에 대한 확신 때문만은 아니고(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는 그 외부자는 다른 종류의 위계, 권력, 불평등을 인정하며, 한국춤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위계, 권력, 불평등의 가치체계를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유려하게 한국춤 추기'라는 화폐는 한국무용계라는 내부 서클에서야 화폐처럼 통용되어서, 잘 추기만 하면 공짜로 밥도 먹고 더한 것들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밖으로 나가면 그 화폐가 조금도 교환가치를 지니지 못함을 절감할 터이다.
8.
우리는 우리의 유려함이 봉건적 서클 바깥에서도 상대방이 자각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춤을 오래 추면 어떤 '멋짐'이 생겨나서 이성을 꼬시는데 유리할 것이다. 그 이성이 자각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 속에서 '멋짐'을 느낄 거라는 것이다. 검도를 오래 하면 어떤 '깨달음'이 와서 소설 쓰는 데도 도움이 되고 독자들이 소설에서 어떤 '검기剣気'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가 비서구에 도달하면 (우리 서구인들은 알고 있는) 이 화폐의 힘을 비서구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점차 알게 될 것이다. 서구 근대가 비서구에 도달하면 그 보편적 '좋음'이 비서구인들의 무의식에 작용할 것이고, 그들 스스로 자각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모종의 역량이 그 비서구인들에게 작용할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작용하는 힘이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서 스파이가 국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잘 때 저 사람이 나를 찌를 준비를 하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분명 저 사람의 흉계가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비를 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홉스적 사회계약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언제나 오류를 유발할 수 있다. 어떤 증거도 없는데 스파이가 있다고 간주하여 막아야 할 곳은 막지 않고, 막지 말아야 할 곳을 막는 경우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9.
반대로, 유려함은 봉건 영지의 경계를 넘을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데 작동하는 힘 같은 건 없다는 입장이 있다. 원화는 한국에서나 통하지 교토 수산시장에 가서 원화로 결재하려고 하면 가능할 리가 없다. 우리야 신사임당의 미소 뒤의 감춰진 강력한 힘을 거의 반사적으로 포착할 수 있지만 교토 사람들에게 그 힘은 보이지 않는다. 굿의 수준은 굿을 잘 아는 내부자들에게나 보인다. 외부자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데 외부자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을 리 없다. 보이지 않는데도 보이는 척 하면서 '역시 무형문화재는 달라'라고 감동받은 시늉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오직 눈 앞에 나타나는 것들 오감으로 접근 가능한 것들(이것을 오감에 "현시現示"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표현하자)만이 존재하며 실제로 역량을 발휘한다. 안 보이고 안 들리고 만질 수 없고 하는 것들은 그냥 없는 것이다. 근거가 없고 실체가 없으면 믿지 않는 실용정신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히려 현시(presentation)를 실체로 믿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것은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한 것이다. 나는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 촉발되어 오류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격, 약점 잡기, 적대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났고 분명히 현시되었으며 현시된 것은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제 대응하는 것은 합리적이며 나의 역량에 유익하고 또 정의로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100% 확신하는 팩트, 저 사람이 나를 공격했다는 팩트는, 사실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1930년대 미국이 일본에 대한 일련의 경제적 전쟁 행위를 통해 사실상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분명히 실용적인 Realpolitik에 입각해서, 현시된 미국의 선제공격에 합리적으로, 자신들의 역량에 유익하게, 정의롭게 방어전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현시된대로 사태를 이해한 사람들 못지 않게,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사태를 일본과 다르게 이해한 사람들도 많았다. 모든 현시는 보편적 실체, 혹은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자체가 아니며, 그러한 현시로 간주된 것에 불과하다.
10.
둘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릴 수밖에 없다. 현시되지 않는데 존재하며 작동하는 역량은 없다.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행위자간 네트워크 연결을 통한 하이브리드, 키메라의 증식을 낳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키메라는 자신의 존재와 활동을 인정 받으려면 현시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지표들은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 "왜 당신은 남편의 진심을 몰라줍니까? 꼭 말로 해야 압니까? 말로 하지 않아도 아내니까 알아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런 말을 계속 들으면 아내는 이러저러한 역량의 작용을 받을 수 있겠다. 하지만 아내는 현시되지 않는 남편의 진심의 힘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게 아니다. 만약 정말로 현시되지 않는 남편의 진심이라는 게 아내의 무의식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면 굳이 위와 같은 비난의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아내가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저 비난의 말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다. 혹은 마을 사람들의 한 번 슥 쳐다보는 눈길, 다가가면 고개를 돌리는 몸짓들, 목소리를 높였을 때 갑자기 다무는 입들, 그런 제스처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다. 모노노아와레의 역량이란 현시되지 않는 어떤 힘이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현시의 역량이다. 결코 현시될 수 없는 것이 무의식에 끼치는 영향이 아니다.
11.
아시아 대륙을 일본 제국의 판도 아래 통치하기 위한 '국체교'의 입장은 반대였다. 그에 의하면, 현시되지 않지만 작용하는 힘은 존재한다. 오직 그런 힘, 그런 원리에 의지해서만 일본은 아시아, 특히 중국을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명시적이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고도의 정교함과 장대함을 가진, 자신의 입장을 가장 핵심에서부터 최말단에까지 빠짐없이 현시해내는 체계적 이념은 서구 근대의 것이며(그 최첨단에 헤겔주의와 맑시즘이 있었다), 그것은 초극되어야 했다. 서구근대의 원리가 현시되는 것의 역량에 근거한다면, 일본제국의 원리는 현시되지 않는 것의 역량에 근거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진심, 말로 하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말로 하지 않기 때문에야말로 이룰 수 있는 조화, 침묵 속에서 오고가는 배려와 자기희생의 질서. 이 원리를 앞의 10번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모노노아와레적 역량이라고 부르자. 중국인들은 1937년 이후 일본이 모노노아와레적 역량에 기초하여 중국을 복속시키려 한다는 점을 간파하고 끊임없이 그에 대해 불평했다.
일본은 결코 영미처럼 정치가 군사를 결정하지도 않았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군사가 정치를 결정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민족적 성격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는 듯 했다. 그들은 대단히 큰 야심을 가졌지만 자신의 다리가 짧고 몸이 왜소한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했으니, 비록 지구를 통째로 삼키려는 욕망이 있었지만 감히 공공연히 무슨 주의주장을 제기하거나 대의명분을 내걸지 못했다. 그들은 군인들이 좌충우돌 화를 자초한 뒤에야 겨우 남을 속이는 그럴듯한 용어나 설법을 찾아냈다. (라오서, 『사세동당』)
12.
제국의 이념은 만민의 오감에 현시되는 일체만물을 제국의 법과 주자학의 천리 아래에 정명正名, 즉 질서 있게 언어화한다. 그럼으로써 천하를 평면화한다. 현시되는 모든 것은 광장의 빛 아래로 끌려나와 이름의 질서에 귀속되어야 한다. 현시되지 않는 것의 존재, 귀신과도 같은 어둠의 존재를 암시하는 모든 현시들도 마찬가지다(그들에게는 혹세무민이라는 이름이 할당될 것이다). 천하에는 그 어떤 어둠도, 깊이도 머물 수 없다. 모든 것은 언제든지 광장의 빛 아래 끌려나와 조리돌림 당한다. 사이비종교가 서식하기엔 최악의 조건이다. 포청천은 귀신도 재판할 수 있으며, 귀신이 일반 백성을 위협하면 백성은 그 귀신에게, 자신이 죽어 귀신이 되어 너를 다시 죽일 것이라며 위협한다. 오감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며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중국 제국의 이념에는 무의식이 없다. 설령 황도사상에서 가정하듯이 무의식에 작용하는 어떤 역량이 있다고 해도, 무의식이 없는 상대에게는 그 역량이 작동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무의식에 작용하는 역량이 중국인에게도 작용할 수 있다면(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일본은 중국을 통치할 수 있다)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이 남는다. 무의식에 작용하는 역량이 무의식 없는 제국의 이념과 사실상 동일하다면, 무의식에 작용하는 역량이 무의식 없는 상대에게 작동할 수 있다. 이 말은 고도화된 의식과 무의식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주장, 고도화된 의식이 이미 무의식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국체교의 가장 세련된 형태로서, 니시다 기타로가 말한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이다.
파도를 거슬러 헤엄친다. 아니, 파도 위에서 헤엄친다. 그것은 같은 것이다. 물 속에 서서, 발 디딜 곳 없이, 마음은 앞서가고, 두 눈이 녹아버린다, 무게도 없이... 그때 한 개인은 자신과 눈 아래를 지나가는 그 물의 결합을, 그 심원한 동일성을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폴 발레리, 「압록강」)
13.
<스파이의 아내>. 유사쿠는 화족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좋은 집안의, 회사 사장이다. 유사쿠의 아내 사토코는 산골 출신으로, 백치미가 있고 남편을 몹시 사랑한다. 사토코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듯한 타이지는 역시 산골 출신일 것이며, 헌병 분대장이다. 영화는 1940년, 미일 개전을 1년 앞두고 시작한다. 유사쿠는 영국, 미국인들과 주로 거래를 한다. 그의 저택은 근사한 양식이며, 메이드와 집사도 서양식이고, 위스키도 수입산이고, 입는 옷도 항상 양복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유사쿠는 점증하는 애국주의를 경멸한다. 그는 만주에 갔다가 관동군의 생체실험을 목격하고 분개한다. 거기서 관련 자료를 히데코(일본에 왔다가 일찌감치 살해당한다)라는 여자를 통해서 유출해서 몰래 일본으로 반입해온다. 그것을 미국에서 발표할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미국이 "만국공통의 정의"(이것을 만국공법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보편적인 제국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의에 기반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도록 유인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황사영 같은 매국적 발상을 그는 아내 사토코에게는 일절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타이지가 사토코에게, 유사쿠가 히데코와 함께 몰래 귀국했으며, 미국으로 같이 갈 여권까지 만들었다고 알려준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토코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노이로제에 걸린다. 사토코는 진실을 알기 위해 유사쿠 및 유사쿠와 동행했던 조카 후미오를 추궁한다. 사토코가 자꾸 묻자 유사쿠는, 당신한테 부끄러운 짓은 안 했다, 당신이 물으면 내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묻지 말라. 묻지 말고 나를 믿어달라 이렇게 말한다. 사토코는 할 수 없이 “믿는다”고 말하고, 유사쿠는 “이 이야기는 이걸로 그만해” 하고 일본식 덮어버리기를 시전한다. 남편이 뭔가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는 듯하다는 것, 그리고 그걸 다른 여자(이미 죽은 여자)와 꾸민다는 게 그녀의 신경을 자극한다. 우여곡절 끝에 유사쿠는 사토코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준다. 사토코는 빠르게 생각하고 결정해서 남편과 함께 스파이의 대업을 완수하기로 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헌병의 포위망을 늦추기 위해 후미오를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넘기고 남편과 둘이서 미국으로 갈 계획을 세운다. 두 사람이 따로 가기로 하는데 누군가의 신고로 사토코만 붙잡힌다. 붙잡힌 사토코는 궁여지책으로 갖고 있던 생체실험 필름을 상영해서 헌병대원들의 인간적 마음에 호소하려고 한다. 그런데 필름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유사쿠와 사토코가 옛날에 장난으로 찍었던 영화 필름으로. 사토코는 "아주 볼 만하네!(오미고토お見事)!"라고 외치고 졸도한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병원에 끌려가 정신병원에서, 공습의 불바다 속에서 종전을 맞는다.
14.
조카에게 가서 진실을 말해달라고 하는 사토코. 그러자 마치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을 물은 사람에게 칼을 들고 노려보는 사무라이처럼 조카가 무섭게 사토코를 노려본다. 그리고 남편을 의심하는 거냐면서 사토코를 경멸하듯 한심하게 쳐다본다. 면전에다 진지하게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いやいや” 거리면서 조롱하는 투로 혼잣말을 하는 것이다. 사토코가 계속 묻자 이번에는 헌병에게 속은 거냐면서, "어리석군!" 하고 숙부의 처를 모욕한다. 이 모욕은 사실 사실을 말해주지 않으려고 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편견을 강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나 많은 왜인들이 도대체 논리가 통하지 않는 오랑캐다. 숙부의 처를 모욕하는 말들은 사실상 모욕 이외에 거의 아무런 뜻도 없는 것으로, 칼을 휘두른 것이나 진배 없다. “나는 사실을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칼을 휘둘러버리는 것이다. 조카는 “왜 당신은 남편의 진심을 몰라주죠”라며 또 사토코를 비난한다. 남편이란 작자는 묻지 말고 믿어달라고 하고, 조카란 놈은 왜 진심을 몰라주냐고 비난하는데 미치지 않을 수가 있나? 두 남자의 말을 합치면 사토코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남편의 “진심”이란 게 도대체 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런 불합리한 기적이 가능한 신비주의 세계관이면 모르겠는데,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아무튼 진심을 알아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판인 것이다. 조카는 계속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편안한 삶을 위해 남편이 기울이는 노력을 아무것도 몰라!” 그게 화를 낼 일이야? 모르면 알려주면 되잖아. 하루키의 소설 속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알려주기 전에 모른다는 건, 알려줘도 모른다는 거야”.
유사쿠도 사토코가 아무것도 모른다며 이지메한다. 넌 (내가 만주에서 본 걸) 아무것도 못봤어, 아무것도 몰라. 당연하지. 자기는 뭐 얼마나 봤다는 건가. 일종의 PTSD다. 전장에 다녀와서 전쟁상태를 총후에서 지속하려는 것이다. 사물의 관성이다. 사토코와 유사쿠 사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대립은 없다. 유사쿠가 하려는 건 아무런 강철의 원칙이 없는, 그저 안이하고 낭만적인 코스모폴리탄의 ‘영화 놀이’ 같은 것이다. 정치라기보다는 저널리즘에 불과하고, 또 자신이 미국을, 역사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소영웅주의가 섞여 있다. 사토코가 “우리 행복은?”이라고 물은 것은 대단히 정당하다. 이 시퀀스는 귀환병 서사에서 흔하다. 아내들은 남편이 PTSD 걸려서 돌아오면 늘 사랑을 재발명하는 데 곤란함을 겪는다. 그러나 특별한 곤란함은 아니다. PTSD가 아니더라도 사랑의 재발명을 곤란하게 하는 상황은 무수히 많다.
사토코를 좋아하는 타이지도 사토코를 이지메한다. '당신은 14살 소녀 같네요. 바꿔 말하면, 왜 남의 진심을 몰라줍니까? 왜 뒤도 없고 앞도 없습니까'. 왜 현시되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현시되지 않는 것도 감득해야죠. 그게 어른인데요. 이런 말들이 사토코에게 역량을 행사한다.
사토코는 마치 중국인들이 그랬듯이, 알지 못하는 것을 네가 알아줘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가스라이팅을 계속 당해왔다. 그래서 그걸 알아주기 위해서 정면돌파해서 남편에게도 묻고 조카에게도 묻고 수치를 참아가며 애걸복걸 애원하는 모양새로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만국공통의 정의”보다 “연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아녀자 취급을 받으며 조소의 대상이 된다. 제국의 이념보다 모노노아와레를 중시하는 일본인 취급을 받으며 조소의 대상이 된다. 모노노아와레와 만국공법이 변증법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토코는 주변인들이 마련하는 그 변증법의 계단을 착착 밟아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미시마의 여느 소설들처럼 이 변증법의 건축은 끝내 완전한 건축물의 붕괴로 끝나버릴 것이다.
15.
무의식에 작용하는 역량이 무의식 없는 제국의 이념과 사실상 동일하다면, 무의식에 작용하는 역량이 무의식 없는 상대에게 작동할 수 있다. 이 말은 고도화된 의식과 무의식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주장, 고도화된 의식이 이미 무의식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침묵(모노노아와레) 속에 만국공통의 정의의 가장 고도화된 형태가 기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언어의 정합성이 붕괴되는 대가를 치러야 획득할 수 있는 광기다. 물론 미치지 않은 나는, 모노노아와레에서 수학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부적절한 상상만 할 뿐이다. 그러나 정말 미친 사람들은 실제로 만물의 모노노아와레 속에 자신을 조여오는 제국의 법망이 숨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게 되는 듯하다. 언어와 침묵은 동일하다는 것. 진심을 알아주는 침묵 속에 제국법이 기입되어 있다는 것. 그런데 진심을 알아준다는 것은 진심을 실제로 모름에도 알아주는 시늉 하기와 구분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무지의 침묵, 기만의 침묵 속에 제국법이 기입되어 있는 사태와 구분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침묵에 의해 속는 자는 언제나 이미 제국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 이미 제국의 이념을 실천한다는 것. 몰랐기 때문에, 속았기 때문에야말로 대동아공영권의 '제국법' 정신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된다는 것. 진심을 알아주는 자가 그 무언의 제스처에 제국법 수천만 조문을 새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르는 자, 속은 자도 그 무언의 제스처에 제국법 수천만 조문을 새기고 있다는 것. 일본이 중국을 통치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런 사태가 가능해야만 한다. 오직 제국법의 수천만 조문만이 중국인들을 통치할 수 있기 때문에.
16.
침묵(일본)과 문자(중국)의 궁극적 합일 프로젝트로서의 대동아공영권. 그 합일을 진지하게 믿을수록 광기에 근접한다. 보이지 않지만 작용하는 역량이 존재하며 그것은 고도로 체계화된 이념의 현시, 그 역량과 동일한 것이다. 사토코에게 현시되지 않는 남편의 (외간 여자들과 함께 하는) 비밀 임무들이 만국공법의 초월적 권위와 동일한 것이 된다. 사토코가 보기엔 이건 그냥 몰래 바람 피는 건데 그게 고도로 정교하게 구축된 문자 텍스트의 시스템, 제국법에 의해 합법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막상 "만국 공통의 정의"가 뭔지, 왜 생체실험이 거기에 반하는 것인지는 일언반구 설명도 없다. 그러면서 오히려 사토코가 자신의 모노노아와레=제국법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괴롭지 않을 수 없다. 괴로워 견디지 못한 중국인들이 일본군의 대동아공영권 프로젝트에 귀의하고 한간이 되는 것처럼, 사토코도 결국 유사쿠의 만국공법 지키기 프로젝트에 귀의하고 스파이의 아내가 된다. 한간이 된 중국인들이 일본군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보여주듯이, 사토코도 유사쿠가 당황할 정도로 단호하게 조카를 희생시켜버리고 대업을 위한 청사진을 들이밀고 카리스마 넘치게 유사쿠를 압도한다.
적국(이 경우는 일본)에 현시되지 않는 스파이의 비밀임무가 보편 제국법의 문자화된 이념과 동일하다고 간주된다. 적국국민의 눈에, 그 비밀임무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무의식에 뭔가 작용할 수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분위기(공기空気), 침묵 속의 배려나 조화가和 무라村의 '집단 무의식'에 작용할 수 있듯이. 게다가 그 작용은 제국법 보편이념의 작용과 동일하다고 한다. 붙잡혀온 사토코의 필름(오래 전 유사쿠와 사토코가 함께 장난하듯 찍은 아마추어 영상이다)을 헌병들이 단체로 관람하는 장면에서 타이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묻는다. "저런 걸 도대체 왜 밀반출 하려고 한 겁니까?"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토코의 제정신이 찢어지는 소리다. 현시되지 않음에도 작용하는 역량이 있다면 헌병들은 현시되는 영상과 무관하게 스파이 부부의 정의로움에 마음이 조금은 움직여야 한다. 동시에 사토코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각조차 못했으나, 그럼에도 자신에게 작용하고 있었던 남편의 술책, 그리고 그것과 가증스럽게 동일시되는 정의로움, 그 역량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헌병들의 반응에서 명백하듯이, 현시되지 않는 역량이 현시되는 역량과 동일하다는 것은 미친 생각이다. 그러나 사토코는 그 비정합적인 생각을 견지할 것이다. 이상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헌병들이다. ("제가 정신병원에 있는 건 납득이 돼요. 이 나라에서는요") 그녀가 생각하기에 일본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반드시 현시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전쟁 말기, 일본이 정의롭지 않다는 증거가 어디 현시되고 있었겠는가? 그러나 현시되지 않는 불의의 증거가 사람들의 무의식에 모종의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 끼쳐야만 한다는 것, 그것은 유사쿠의 신비주의에 귀의한 사토코에게는 자명한 공리였다. 만물이 침묵하고 있지만 그 침묵 속에서, 각자의 무의식 속에 은연 중에 수학 공식보다도 더 뚜렷하게, 제국법의 한자보다도 더 준엄하게 일본의 불의를 기록해 놓은 것이 보이지 않는가? 자기자신 또한, 현시되지 않는 유사쿠의 필름 바꿔치기의 작용을, 무의식적으로 받았어야만 하는 것으로, 소급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무의식을 결정하려는 자는 미치려고 시도하는 자이다. 아오이 유우가 보여주는 연기는 결코 남편의 기만에 놀라거나 서운하거나 충격을 받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연기가 아니다. 미치려고 시도하는 사토코의 연기다.
17.
"오미고토!" 근사한 가관이다! 무엇이 볼 만하다는 것인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진심을 어떻게든 보게 하기 위해 최대한 화려하게 빈 구멍의 주변을 꾸며온 15년이었다. 그 주위의 화려한 장식이야말로 가관이다. 신사에 가면 신상은 없고 어떤 비어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주변이 아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그래서 그 중심에 어떤 신격이 위치한다는 것을 표시해준다. 보이지 않는 진심에 보이는 제국법이 이미 있는 거라면, 그것은 보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말 그랬다면 꾸밀 필요도 없었다. 꾸며왔다는 건 '보이지 않는 진심에 보이는 제국법이 이미 있다'는 명제가 거짓임을 방증한다. 미친 사토코의 눈에,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 만물의 모노노아와레 위에 기록된 제국법의 한 줄 한 줄은 이미, 현시되지 않는 빈 중심 주변을 오색찬란하게 꾸미는 장식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헌병들은 현시되지 않는 제국법을 알아봐주지 않는다. 자신은 유사쿠의 기만을 포함해서 현시되지 않는 제국법을 알아봐주기로 한다.
그리하여 이 뒤틀린 영화에서, 일본제국이 만주와 중원에서 품었던 대망은 전도된 형태로 실현된다. 공습으로 불타오르는 병원을 빠져나오는 사토코는 해변에서 통곡하며 일본제국의 멸망을 맞이한다. 현시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역량(스파이의 비밀임무, 기만, 상대의 무의식에 작용하는 진심 등)과 제국법("만국공통의 정의", 일본의 불의를 정벌해야 한다는 법)은 대동아공영권이 아니라 팍스아메리카나 아래 합일을 이룬다. 현시되지 않는 제국법은 마침내 현시된다. 만국공법은 마침내 사람들의 의식 위로 떠오른다. 중국인들은 끝끝내 일본인들의 진심에 새겨진 제국법을 알아주지 못했지만 일본인들은 끝내 스파이 부부의 진심에 새겨진 제국법을 알아주게 되었다. 이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사토코와 유사쿠의 사랑은 현시되지 않는 제국법의 존재를 전제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 스파이도 필요 없다. 더 이상 현시되지 않지만 작용하는 역량도 필요 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배려를 알아봐주지 않을 때, 오직 그러한 은근한 배려만으로 중국과 일본의 화합을 달성하기 위해 낭인들은 활기 넘치게 동아 삼국을 누볐다. 그들이 자신들의 은근한 배려 속에 이미 중국인들이 바라는 최고 수준의 제국법이 마련되어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그들의 광기는 심해지고 그들의 활동은 걱정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활발해지곤 했다. 그러나 결국 1937년에 대본영이 전면전을 선포하고 화북과 장강 유역을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을 때, 그 낭인들의 심정이, 바로 영화 말미의 사토코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그 진심에 새겨진 만국공법을 몰라주는 헌병들 앞에서 찢어지는 목소리로, "오미고토!"를 외쳤던 사토코는 이미 불타는 병원을 나오면서는 모든 기운을 잃고, "이렇게 일본은 패하고, 전쟁은 끝날 겁니다. 오미고토..."라고 중얼거린다. 낭인들이라면 "이렇게 중국은 패하고, 전쟁은 끝날 겁니다. 오미고토..."라고 중얼거렸을 터이다. 불바다가 그들이 바랐던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진심을, 그 진심에 새겨진 제국법을 알아봐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헌병들 앞에서 사토코는 소름끼치게 웃는다. 반면 패전 당일에는 통곡을 한다. 숙원이 이루어진 후련함과 기쁨, 풀리는 긴장, 그러나 너무나 많은 죽음과 파괴 끝에서야 그렇게 되었다는 무력감, 비탄, 실패했다는 자책, 모든 게 자신들의 노력과 무관하게 끝나버렸다는 허탈함, 앞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랑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막막함 같은 것들이 뒤섞인 통곡이다.
18.
현시되지 않는 것은 무의식에 작용할 수 없다. 무의식에 작용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오히려 현시되지만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귀신은 현시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 작용할 수 없다. 무의식에 작용하는 것은 주역의 점괘 같은 것들이다. 불투명한 현시들. 분명 눈앞에 보이기는 하지만 전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문자들. 심부재언 시이불견. 마음이 없으면 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행기 관제를 하다보면 사고 위험이 높은 항적이 뻔히 화면에서 유유히 비행하는데도 그 위험항적이 있다는 거 자체를 식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지 말라고 심부재언 시이불견이라는 문구가 콘솔 앞에 붙어 있었다. 분명히 현시된다는 걸 부정할 수 없지만 우리 눈에 의미를 가진 채 식별되지 못하고 뿌옇고 불투명한 덩어리로만 남는 것들이 있다. 모노노아와레가 침묵에 해당하고 제국법이 이념에 해당한다면 이것은 치매에 해당한다고 비유해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