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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Apr 08. 2024

국가냐 가족이냐

    가족의 삶은 State에 의해 지탱된다. 때문에 가족은 살아남고 유지된다. 사람들은 가족적 삶으로 돌아간다. 가족적 삶은 “인간의 도리”이며 “인지상정”이며 어떤 안정성을 제공해주고, 위안을 주고 불안을 제거해주고, 시세인심에 부합한다. 상식에 부합한다. 튀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보통의 삶을 위해서라도, 가족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래도, 전망도, 길도, 다 그곳으로 이어진다. “결혼 막차”를 안간힘을 써서라도 타려하는 것이 다 그 때문이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마당패탈을 했던 사람들조차, 모두 언제까지나 동아리에 머무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다른 삶을, 또 다른 삶의 모드를 취해야 한다고 예감한다. 동아리의 삶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은 “가족”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은 꾸려서 무슨 사업을 벌이기 위해 꾸리는 것이 아니다. 마당패탈은 문예운동을 위해 꾸린 것이다. 놀랍게도, 가족은 개개인의 가장 절실한 문제들, 개개인의 자기표현들, 자유, 사랑 같은 것에 반드시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많다. 부모는 자식이 안정적인 직업을 얻고 사회인으로 모나지 않게, 모나더라도 적당히 모나게, 생활해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반드시 자신의 노후대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것이 곧 자식의 자유와 사랑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 되곤 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자식의 “평범한 삶”, “적어도 실패하지는 않는 삶”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부모로 하여금 자식을 심지어 군대에까지, 전쟁에까지 내보내게 한다. 다들 가니까. 갔다와야 사람 구실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State가 가족의 존속을 보장하고 또 요구한다. 거기서 벗어나면 비참한 말로가 기다린다. 가족의 수호자가 된 부모들은 살아남아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고 전해지는 어떤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재생산하며, 그들을 은근히 경멸하고, 경원시하고, 자식이 그들 같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걱정한다. 정작 무엇을 위해 “사는 거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하지 못하며, 사실 그런 질문을 그들은 싫어한다. 국가를 위해 사는 거냐 가족을 위해 사는 거냐, 그런 간단한 질문도 모순을 일으키고 “뇌절”을 일으킨다. 국가가 가족의 존속을 보장하고 또 요구하는 한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 3년 상을 위해 서울진공작전 직전에 사령관 직을 사임하고 낙향해버린 “어리석은 유림” 이인영의 얘기를 학교에서 배우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부모들은 자식을 징병 의무에서 면제시키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국가-가족 모순을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 개개의 행동은 칼 슈미트적인 의미의(혹은 선불교적인) “결단” 같은 것에 의해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단지 내가 꼴리는대로,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불과함에도, 그것이 “책임은 전부 내가 진다” 같은 우아한 유사 사무라이 정신으로 승화된다.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쳤던 것처럼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마땅하다. 국가가 정말 삶의 의미이며, 사건이며, 진리라면, 1분 1초 국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 그러면서 유사시에 국가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 “국가가 너를 지켜주기 때문에.” 만약, 모든 것을 양보해서, 국가가 나를 “지켜주는 것”(그게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이, 마당패탈이 구성원들에게 가졌던 그런 의미를 지닌다면, “유사시”에만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골계적인 발상이다. 그리고 그게 정확히 칼 슈미트가 생각했던 것인데, “전쟁 상태”란 전쟁이 있어야만 생겨나는 게 아니라, 국가와 국가가 마주하는 것 자체가 전쟁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국가에 귀의한다면, 아브라함이 신에 귀의했듯이, 거기엔 “내가 책임진다” 같은 방자한 발상은 있을 수 없고 그저 한계 없는 공손함, 삼감, 겸손함, 자기방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한국에서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한국에는 가족주의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국가가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 따위 국가는 뒤집어 엎어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만연해있다.         

    아브라함의 일화를 한국 사람들은 싫어하고 탄압하려고 할 것이다.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이러니 모순에 관대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엔 애국을 입에 담지만 사실 정말로 국가를 가족보다 우선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실제로 국가를 위해 정말 희생해야 할 때가 오면, 평소에 애국을 입에 담던 사람도, 과감하게 가족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저버리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런 “결단”에 대해, 자신이 다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미시마 유키오 집안에서도 황국 만세를 부르짖었지만 결국 자기 아들은 군대 빠지게 만들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군대 가는 대신에 어디 연구소 촉탁 같은 게 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런 사람이 정말 엄청나게 많다는 걸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문제를 파내고 또 파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얼마간의 즐거움을 느낀다. 거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아들이 전장에 끌려가서 지옥을 경험하고, 팔 잘리고 다리 잘리고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정신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지켜주지 못하는 아버지가 무슨 아버지인가? 아버지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직접 같이 입대해서라도 지켜줘야 되는 거 아닌가? 하다못해 같이 죽으러 가기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자기 자식을 해친 자들에게 복수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는 지도 모른 채로, 무력하게 앉아서 한탄만 하고 있는 건 사실상 자기 자식을 자기 손으로 해친 거 아닌가? 사람이면 그럴 수 없는 거 아냐? 이것은 지극히 거칠고 뭉툭하지만 직접적인 원한의 표현들이다. 이것들의 노골적이거나 암시적인 변주들을 나는 동아시아 전중문학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전쟁 그 자체보다,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또 끝난 이후에도 국가-사회가 태연자약하게 존속한다는 것이며, 전쟁터에서 그 무엇을 겪었더라도, 그것이 그 귀환 병정에게 어떠한 타개책도 알려줄 수 없다는 데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에 대한, 가족에 대한 모든 믿음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가족과 아버지들로 이루어진 세상은 말끔하고 매끄럽게 돌아간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절름발이가 된 김 상사가 효자동 이발사 삼촌이나 자기 부모를 원망하고, 그들에게 가졌던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이발사 삼촌이나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국가가 그들에게 보장해주는 권리들에 흠집 하나 낼 수 없다. 흠집난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다. 부모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믿었던 아이들은 전쟁 앞에서 대부분 배신당할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전쟁에 맞서 자식을 지켜줄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 배신이 아이들로 하여금 가족을 부정하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가족을 부정해봐야 국가로 향할 뿐이다. 그렇구나, 가족에 대한 믿음 따위 국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나를 지켜주겠다던 우리 아버지는 총탄을 뚫고 서로 수없이 목숨을 구해준 우리 소대장만도 못한 인간이었구나. 귀환 병정들은 국가 앞에서 겸손해진다. 그들은 가족을 이루는 데 많이들 실패한다. 가족을 이루더라도 가족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믿음도 주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무의식적으로, 강박적으로 기울인다. 전쟁터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하게 말해서 그들은 고목이 된다. 마른 나무처럼 변해버린다. 썩은 나무토막처럼 변한다. 무서운 건 이게 아니다. 무서운 건 썩은 나무토막도 결혼하게 만드는, 결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정신 차려보면 결혼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시세인심”이다. 고목에 꽃이 피게 만들고야 마는, 고목생화 되어버리게 만드는, 자연의 작용이다. 

    사실 전쟁터에 State가 있다면 여기에도, “전후부흥”에도, 전후의 “귀환 병정 결혼시키기”에도 State가 게재된다. 국가가 통일교처럼 짝짓기 결혼을 노골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State는 역시 가족을 요구한다. 이것이 소위 슘페터가 말한 국가 주도 혁신의 일환이며, 2차대전 직후 세계가 비슷비슷하게 취해나간, 평시 총력전 경제사회의 건설이다. <디 아워스>에 나오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가족이 정확히 이 State-가족의 모습을 그려낸다. 만약, 귀환 병정이 자신에게 부여된 이 새로운 역사적 소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그는 차라리 덜 방황하게 될 것이다. 기실 귀환 병정의 PTSD는 거의 전적으로, 전장과 민간사회의 시차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민간사회의 전후 “가족 만들기”가 전장에서 개처럼 기던 “뺑이치기”의 연장임을 자각할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귀환 병정들이 transwar 역사학의 최신 성과들을 읽을 정도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transwar라는 역사 연구 풍조가 가능해진 것은 전후 총력전 사회의 State를 위한 임무가 종국에 다다랐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종전 직후 State는 과장된 어조로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회복을 선언했다. 귀환 병정은 갑자기 찾아온 “평화”라는 정체불명의 시대에 적응해야 했다! 그 모든 고생을 하고도 그들은 부스러기 이외의 그 무엇도 얻지 못한 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왜냐면 State는 후방의 아버지들과 가족들이 온전히 보전하고 있었던 돈과 힘을 래디컬하게 재분배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래디컬과 거리를 두는 것이야말로 State의 state다운, 현상유지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후가 전쟁의 연속(경제총력전)이라면, 전쟁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 당연히 새롭게 전장에 편입될 민간인들보다 대우가 좋아야 한다. 아버지와 엄마와 여동생들은 내 밑에서 박박 기어야 그게 맞는 것이다. 죽은 내 전우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사선을 지나온 내가 어째서인지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인간들 밑에서 또 개처럼 기고 있다. 이발사하는 삼촌 집에서 또 혼나가며 일을 배운다. 저래서 어떻게 결혼 할 거냐면서 동네 아줌마들의 수군거림을 들어야 한다. 전쟁터였으면 이까짓 폐급들 다 쏴버리고 한숨 푹 잘텐데. 밤에는 전장의 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고, 깨면 경제 총력전의 몽롱한 현실이 기다리니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 물론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잘 적응했다. 말라비틀어지라고 하면 말라비틀어지고, 꽃을 피우라고 하면 꽃을 피우고, 까라면 까면서 잘 적응했다. 아이리시 맨도 그런 한 사람이다. 마틴 스콜세지 그 다음 영화(<플라워 킬링 문>)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남자도 전쟁 나갔다 와서 자기 삼촌 밑에서 또 개처럼 긴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국가의 충복들이다.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가족에 대한 일체의 믿음을 저버리고 병영으로 튀어오라고 하면 튀어온다. 전장에서 죽으라면 죽고 죽이라면 죽인다. 다시 사회로 돌아가서 아버지 어머니 삼촌 고모들에게 복종하라면 복종한다. 다시 가족을 꾸리라면 꾸린다. 다들 이렇게 살았다. 다들 그러고 산다. 이들이 국가의 충복이다. 

    피키 블라인더스도, <마스터>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인물도, <골든 카무이>의 모험자들도 극히 예외적인 인물들이다. 평범하게 친족에 복종하라는, 국가가 보증해주는 시세인심에 반항한다. 자신에게 진짜 의미 있는 것들을 위해 투쟁한다. 피키 블라인더스는 가족을 위해 국가와도 싸운다. 호아킨 피닉스는 국가가 보증 서 주는 친족(만들기)의 가짜스러움에 질색하고 진짜 의미를 줄 수 있는 마스터를 찾고, 더 나아가서 그 마스터조차 버리고 홀로 서려고 한다. 골든 카무이의 모험자들은 친족을 위해, 사랑을 위해, 우정을 위해, 허황된 꿈을 위해, 국가가 금지하는 정치를 위해 평범한 친족을 떠나고 국가와 싸운다. 시세인심을 결정하는 건 이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함을 느끼고, 이들의 엘리트적이며 귀족적이고 남다른 특출남에 감탄하고, 또 경외감을 느낀다. 정말 경이롭고 무서운 건 우리 바로 주변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 저 집의 할아버지, 또 옆집의 할아버지라는 것은 그다지 의식하지 않은 채. 


[추가]

    <주자어류>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노 장공과 제 환공의 이야기다. 

    노 장공의 아버지는 제 환공의 형인 제 양공에게 살해당한다. 왜냐면 양공이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는데 장공의 아버지가 거기에 분개하자, 양공이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장공의 아버지를 죽여버린 것이다. 파렴치한 짓이란 다음과 같다. 원래 양공의 이복여동생은 장공의 아버지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양공과 이복여동생이 간통을 저지른 것을 장공의 아버지가 발견한 것이다. 

    아무튼 장공 입장에서 제 양공은 아버지의 원수다. 그러나 그는 원수를 갚지 못한다. 제나라는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공이 죽고 즉위한 것이 그 유명한 춘추오패 중 한 명인 제 환공이었다. 장공은 환공을 죽여 원수를 갚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환공에게 숙이고 들어가서 회맹에 참가했다. 심지어 양공의 서녀와 결혼하기까지 했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고 주희의 제자들이 물은 것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자: 복수를 해야하는 의는 예기의 소에서 말하기를, 춘추에서 100대 뒤에도 복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책에서는 말하기를 평민은 5대까지 복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나라의 군주는 9대까지 복수할 수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제 양공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한 노 장공이 제 환공과 회맹했는데 춘추에서는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장공의 아버지부터 공자가 섬겼던 노 정공에 이르기까지가 9대인데, 그때까지 노나라가 제나라의 회맹에 참가했으니 9대에 걸쳐 복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건 어떻게 봐야 합니까? 
주희: 복수를 100대 뒤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난설乱説이다. 오대까지 복수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친족의 정이 5대를 넘어가면 끊기기 때문이다. 춘추에서 9대까지 복수를 허락했다느니, 춘추가 책하지 않았다느니, 또 춘추가 그것을 미화했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춘추를 해석하는 乱説이다. 
제자: 우리나라(송나라)가 금나라에게 화를 입은 것은 그럼 100대가 지나가더라도 복수할 수 있습니까? 
주희: 말하기 어렵다. (오랜 침묵) 범사는 시작할 때 신중함을 귀하게 여기고 일찌감치 勢에 올라타서 해야 한다. 다 식어버린 다음에는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노 장공의 일도 마찬가지다. 그는 제 양공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걸 뻔히 보고도 이미 복수할 수 없었고, 또한 친히 그와 더불어 연회하고, 그 집안과 혼인관계가 되었다. (...) 이와 같은데 어찌 특별히 복수하지 못할 뿐이었겠는가? 이미 원수와 친하게 지낸 것이 이와 같은데 어찌 그 후손이 제 환공에게 복수하지 않음을 책하겠는가. (...) 하물며 제 환공이 제후를 이끌고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의로써 거행하는데 장공이 그 회맹에 가고싶지 않더라도 어찌 될 법한 일인가! 일은 마땅히 시세와 의리의 경중을 저울질해보아야 한다. 환공이 왕실을 높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제후를 불러모은 것이라면 장공이 가지 않아도 좋다. 지금 환공이 왕실을 높인다는 명분을 행하는데 장공이 가지 않는다면 이는 제나라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주나라에 반역하는 것이다. 또한 하물며 환공의 기세가 이와 같이 성대한데 장공이 어찌 복수를 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복수하고 싶었다면 양공이 그 아버지를 죽였을 때 그 불공대천의 원수인 장공이 천자, 방백, 연솔에게 고하고 반드시 복수를 행하여 양공을 죽인 뒤 그쳤으면 장쾌한 것이다. 이제 이미 그렇게 할 수 없고, 친히 더불어 회맹하고 그 집안하고 혼인하고 하는 것이 그 정당한 복수자조차 이런데 그 자손이 무슨 죄를 묻는다는 것인가? (...) 이미 양공을 죽였다면 양가 집안 문제는 끝난 것이다. 양쪽이 공평하게 되었는데 환공과 회맹하는 것에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집안 문제는 집안 문제고 천하의 문제는 천하의 문제이며, 저울질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의리만이 아니다. 우리가 의리를 피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시세의 바깥에 있는 순수한 가치여서가 아니라, 천하의 생생무궁하고 간단없는 시세 변화 속에서 언제나 발휘될 수 있는 보편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주희에게는 가족이냐 국가냐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천하의 의리와 시세에 비하면 그 둘이 모두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큰 중은 고기도 먹고 큰 선비는 춤도 춘다는 말이 있는데, PTSD는 도쿄가 불바다가 되고 전선에서는 무수한 일본인들이 죽어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기는 믿지도 않는 팔굉일우를 천연덕스럽게 입에 담으며, 저녁마다 맛있는 대륙의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고 재즈 밴드의 공연을 듣는 일본인 촉탁들의 근무처인 상해 국책기관에서만큼이나, 「주자어류」 속에서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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