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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Apr 01. 2024

골든카무이를 보고

    골든카무이ゴールデンカムイ(2014-2022)를 정신 없이 봤다. 메이지 말기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패자의 정신사精神史. 러일전쟁의 PTSD 환각 체험이기도 하고, 보신전쟁戊辰戦争의 패배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멸망'한 아이누アイヌ 민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역사의 패배자들을 온통 끌어모아 한 편의 활극을 버무려냈다.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시절의 이야기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군대와 전쟁 체험은 많은 개개의 병사들을 인격적으로 붕괴시켰다. 승리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전후 배상의 측면에서부터 개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물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골든카무이는 확실히 흔해 빠진 전쟁 포르노에 불과하다. 전쟁을 끔찍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다지 끔찍해보이지 않는다. 물론 시체와 피와 내장과 죽음들은 물릴 정도로 계속 나오지만, 거기엔 어떤 산뜻한 쾌감조차 있으며, 깔끔하고 우아하게 잘 포장된 다기茶器 선물 세트와 같은 정결함은 끝끝내 남는다. 포르노는 문화인들이 곧잘 사용하는 멸칭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소위 포르노가 흥분성 마약이라면 소위 일류 문학이란 안정성 마약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러일전쟁의 PTSD 문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 점을 발굴하고 널리 알렸다는 데 골든카무이의 공적이 있다. 전쟁은 현실감각을 앗아간다. 전장에서 살다가 제대하고 돌아온 이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까닭은, 민간 사회의 현실이 참전장병들에게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꾸로 전쟁의 현실이 민간인들에게 비현실적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따라서 총력전 후에는 항상 '현실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 사회의 암묵적인 화제가 되어왔다.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고민했던 이들은 전쟁의 리얼한 모습을 찾아헤맸다. 2차대전 직후에 문학, 미술, 사진 등 논단 전반에서 리얼리즘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러일전쟁 후에도 '자연주의 논쟁'이라는, 이름만 다른 이슈가 불거졌다. 자연주의 문학자들이 종종 다루었던 것이 러일전쟁이라는 주제였다(가령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의 '일병졸'-1908년작이 한 사례). 

    전쟁이 끝났음에도 민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 속 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다시 전쟁 상태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가타尾形라는 캐릭터가 러시아 국경수비대와 싸우며 러일전쟁의 연장전이라는 말을 하는데, 실은 만화의 서사 전체가 러일전쟁의 연장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귀환병들이 일본 국내로 돌아와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낭만화되어 있지만 그들은 만주의 마적이나 미국의 트럼피스트 준군사조직들과 다르지 않으며, 중국이었다면 중앙정부에 의해 교화되거나 교화를 거부하는 경우 초멸되어야 할 오랑캐 혹은 저잣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효수되어야 할 난신적자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에게는 이러저러한 목표가 있지만, 결국 근저에 있는 것은 사선死線을 누비는 일 이외에 좋아할 수 있는 게 없어져버린 인간들의 전쟁 중독이다. 그러한 전쟁중독은 '사냥꾼-아이누-아시리파アシㇼパ'라는 원초적 전사-귀족의 형상과 접속한다. Hell or High Water에서 은행 도난범 형제를 쫓는 게 남부 백인과 인디언 보안관인 것처럼. 스내치에서 최종보스 격인 브릭탑을 잡는 게 결국 기층의 집시 집단인 것처럼. 집시든 인디언이든 아이누든 문명세계의 활극에 한 번 데려오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들은 대체로 귀족-전사적인 것의 가장 강력한 원형 중 하나인 '사냥'하는 자들로서, 총력전을 치른 군인들과의 대비 속에서 그들과 대등하거나 그들을 뛰어넘는 깊이, 의미를 부여 받는 패턴을 보인다. 

    골든카무이에서 아이누는 흔한 오리엔탈리즘에 포획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아이누 중에 러일전쟁 귀환병도 많고, 아이누 내부에도 온갖 종류의 아이누가 등장하며 서로 항쟁한다. 독립운동을 하는 아이누도 있고, 점 본다면서 사기 치는 듯한 아이누도 있고, 돈(작품의 제목인 '골든 카무이'가 가리키는 것)에 환장한 아이누도 있다. 그러나 야마토 민족에 의해 멸망해가는 아이누는 없다. 그리고 멸망해가는 와중에 그 멸망을 향락하는 아이누들도 없다. 오로지 건강하고 전사적이며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하고 분투해가는 여러 종류의 (남성 귀족적인) 아이누가 있을 뿐이다. 수동적이고 술과 마약에 찌들고, 기꺼이 야마토 민족의 관광상품이 되어 여러 시늉을 하고, 기꺼이 웃으며 사진을 찍어주는 대신 돈을 받아 챙기는 그런 아이누는 없다. 흥미로운 것은 부모를 잃은 아이누는 있어도 자식을 잃은 아이누는 없다는 것이다. 부모를 잃더라도 자식 세대는 나아가서 승리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는 어떻게 승리해야 할까? 오가타도 제 손으로 부모를 죽였고, 스기모토杉元도 부모가 결핵으로 죽었고, 아시리파도 부모가 죽었다. 다른 이들은 부모에 대해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부모 없는 아이들, 부모를 죽이고 나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부모가 없고 부모를 죽인 아이들을 위한, 그들이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자식이 죽은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 유의미한 성찰을 하려는 만화는 처음부터 아니었으며, 거의 유일하게 딸이 죽은 쓰루미 중위가, 그로 인해 흑화한 것처럼 묘사되는, 그조차도 불투명한 애매한 처리는 어찌보면 이 만화에서는 당연하다. 

    러일전쟁 귀환병들이 주연으로 활약하는 무대에, 러시아 황제 암살범이라든지 소수민족 독립운동 파르티잔이라든지 보신전쟁 패잔병 같은 캐릭터들이 추가된다. 덧붙여 싸이코패스, 반사회적 살인광들이 이 죽음의 무도에 양념처럼 어울린다. 러일전쟁에서 무수한 살육전을 겪고도 살아남은 스기모토는, 곰에게 동생이 먹히는 것을 보고 싸이코패스 살인자가 된 한 죄수를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러일전쟁에서 전두엽 일부가 날아가는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쓰루미 중위는, 인조가죽을 만드는 근대적 예술가의 광증을 이해한다. 사회에서 배척받던 정신병자들은 귀환병 출신들을 보고 드디어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기뻐한다. 

    과연 이 만화는 일본의 여타 창작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광장의 만화가 아니며 밀실의 만화다. 거짓말, 흑막, 음습한 지하감옥, 변태적 환락, 비밀들, 몰래 처리하기, 사이비 종교 같은 개인숭배의 여러 형태들(불사신 스기모토, 신선조 악령 히지카타, 쓰루미 중위에 대한 부하들의 숭배, 처녀 무사武士이자 무녀인 아시리파), 아이누에 대한 낭만화. 이런 것들이 이 작품의 정조를 결정한다. 특히 모든 귀환병은 따지고 보면, 흔하디 흔한 일반 민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화는 그들을 결코 그런 식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203고지를 점령한 것은 스기모토나 오가타나 쓰루미만의 공로가 아니며 국민군의 무서움이자 평범한 민중의 무서움에 의한 것이다. 아이누가 멸망해간 것은 몇몇 음모가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수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었던 야마토 민중의 자연재해 같은 유입 때문이었다. 

    마치 빛바랜 낡은 사진을 보듯, 골든카무이 속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된 먼 과거의 이야기다. 1905년이 배경이기 때문은 아니다. 전설의 구조와 문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누의 구비서사시 유카라ユカラ에서처럼 주인공들은 영원히 젊고, 영원히 소년소녀이고, 영원히 도전과 모험을 반복한다. 이 만화에서 근대 서사시의 영웅들은 모두 죽음과 패배를 피하지 못한다. 신선조 일당이 그렇고 쓰루미 중위(나무위키에 따르면 그는 팬들에 의해 히틀러와 비슷하다고 지적을 받았다)가 그렇고 니힐리스트 히어로 오가타가 그렇다. 살아남아 승리하는 것은 탈옥왕과 아이누의 미래와 방랑자다. 요컨대 유카라와 아서왕 이야기, 니벨룽겐의 반지, 나니아 연대기, 반지의 제왕 등이 충돌하여 유카라가 승리하는 것이다. 판이 기독교화된 영웅들, 바그너와 나치의 영웅들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다. 최소한 만화는 그러한 구도를 의도했다. 물론 아시리파와 스기모토와 탈옥왕이 유카라의 정신을 체현하고 있는가는 별 문제다. 

    1년 5개월 정도 진행된 보신전쟁에서 전사자는 8천명 내외였다. 9개월 진행된 청일전쟁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400명 수준이고 병사자가 만 명 정도 했다. 1년 반 정도 진행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인 약 6만 명이 죽었다.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적백내전에 개입하여 약 6500명이 죽었다. 1939년 5월부터 9월까지 노몬한 사건으로 약 7000명이 죽었다. 45년의 소련 만주공세에서 일본군 2만~8만이 죽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수치가 널을 뛴다. 반면 중국과는 37년 이후만 계산하더라도 40만에서 100만 내외의 일본군이 죽었다. 영미와의 전쟁에서는 150만 내외로 죽었다. 전사자만 따지면 청일전쟁의 40배 이상이 나왔으니 러일전쟁의 충격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시점에서 보자면 일본과 중국은 그다지 많은 피를 흘린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일본에 위협이 될 수도 없었고, 러시아와 엄청난 피를 흘린 뒤에 보자니 중국과 대단한 은원이 있다고 할 것도 아니었다. 일본 제국의 관료들은 현실주의의 전통을 갖고 있었고, 그들이 중국에 접근한 것은 철저히 쩨쩨한 이권의 침탈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현실주의자들이 신선조를 도륙하고 막부를 굴복시키고 조선과 아이누를 '멸망'시키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전후 처리를 관철해갔던, 골든카무이에서 말하는 '중앙'의 인물들이다. 야마가타山縣有朋나 이토伊藤博文 같은 원훈들이 만주에서 죽은 일본인들의 피를 잊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역사는 그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만주를 잊을 수 없어했다. 고작 6만 명이 죽었을 뿐임에도, 온 열도가 러일전쟁 열광에 빠져 있었던 경험은 그들을 변화시켰으며, 그들 마음 속의 만주를 변화시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마련했다. 만주가 중국인들이 사는 중국 땅이라는 사실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그것을 안중에 두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상황을 그들은 착취했다. 러시아 문학은 읽어도 중국 문학은 읽지 않았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사할린에 완충국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골든카무이의 스토리다. 쓰루미 중위는 마지막에 만주에서 자신의 미래 계획을 구현하겠다고 말한다. 일본은 실제로 러시아를 막기 위해 조선을 병합하고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키다가 마침내 만주국을 만들었다. 현실주의자 원훈들의 '현실성'과 '합리성'의 힘은 어디까지 신뢰할 만한가? 그것은 결국 시대적 조건과 민중의 요구와의 타협의 산물이며, 반드시 일본 제국의 실익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조선은 결국 45년 8월 전까지는(조선이 일본을 대신하여 분단되었다는 시각을 취한다면 그만큼의 공로는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완충국으로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고(일본은 결코 조선인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교화할 수 없었다. 사실 일본이 조선을 교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제국의 경제에 무슨 대단한 도움을 주지도 않았으며 식민통치자들에게 무한한 좌절만을 안겨주었다. 골든카무이에서는 조선이나 중국의 이야기가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과 중국이라는 토지가 골든카무이의 구비서사시적 세계를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만주라면 구비서사시적 만화를 그려볼 수도 있겠지만 조선과 중국은 이미 구비서사시로서 성립하기조차 어렵다. 그것은 유목민이나 준유목민이 만주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두만강 이남, 산해관 이서로는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던 오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언제나 두려워하면서도 무시한다. 조선인은 입만 살았으며 약하다고 무시하면서도 동시에 그 입을 무엇보다 무서워한다. 허황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품이 크고 거침없음에 놀라며 기가 죽는다. 조선인이 보기에 일본인은 비겁하고 쩨쩨한 꼼수와 말초적 음모에나 능하지 장계가 없고 그릇이 작아서 근본적으로 큰 일을 못한다. 쓰루미 중위 같은 사람의 카리스마를 벗겨내기 가장 좋은 방법도 그를 조선에 데려오는 것이다. 모든 니체주의적 영웅이 영웅스럽게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종의 보호 하에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도 특권층은 있으니 그들이 영웅주의 놀이를 해온 것은 당연하지만, 일본이나 유럽에 가보면 보호의 정도와 깊이가 다르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조선에서 니체주의적 영웅들에게는 언제나 애처로움이 뒤따른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처로울 정도로 노력해야 하고, 애처로울 정도로 자신을 옥죄어야 한다. 성공한 귀족 집안의 영애도 멀쩡히 수십년 제사 안 지내고 살다가 올해부터는 제사 준비를 제가 할게요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조선의 인간들을 옥죄는 의미망이다. 개인은 늙고 병들지만 이 의미망은 늙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 쓰루미 중위가 조선에 온다면, 우선 군인 동료들의 변화부터 체감하게 될 것이다. 한국군의 거의 모든 장교들이 사로잡혀 있는, 군인은 x 같은 직업이야, 민간인한테 늘 을이야, 하는 열패감의 후덥지근한 악취가 그를 맞이할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쉬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코미디 드라마에서처럼 그의 머리 상태에 대해 물어댈 것이다. 마치 그에게 할 말이 그것 밖에 없는 것처럼 오늘은 머리 괜찮으세요? 덥진 않으세요? 그 가리개는 왜 썼소? 아 저번에 여쭤봤는데 까먹었다. 정상성을 벗어난 모든 인간이 병자이자 장애인이 되는 땅에 온 것을 환영하기 위해 하이에나 같은 조선인들과 조선인화된 일본인들이 떼거지로 몰려들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그를 추종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그에게 이해받았다는, 골든카무이에 자주 나오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선인들이 그를 이해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가 조금도 이해받고 싶지 않고 위로받고 싶지 않더라도, 무차별적으로 그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그것을 정이라고 부르고, 다음날이 되면 모든 것을 까먹은 것처럼 다시 냉혹한 무관심과 정 나누기를 반복하는 인간의 무리들. 그런 위로와 이해는 오히려 쓰루미의 아내와 딸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짓밟고 더럽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네 아내와 딸이 그렇게 죽었나? 별 일이 다 있구만. 괜찮아, 그런 건 아무것도 아냐. 마시고 잊어.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쓰루미가 아내와 딸 얘기를 꺼낼 때까지 조선의 남자들은 양반다리를 하고 토방에 쫀쫀히 앉아 밤이 샐 때까지 술을 마시며 쓰루미를 노려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와 함께 뒤섞이세, 하고 헤어나올 수 없는 늪으로부터 손을 뻗는 무수한 조선인들을 상대로 쓰루미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 그 손을 잡지 않으면 통이 작고 음습하며 배포 없는 쪽바리가 되는 것(물론 그 손을 잡아도 통이 작고 음습하며 배포 없는 쪽바리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점이라면 '그는 쪽바리지만 우리 쪽바리'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이다. 그 손을 잡는다면 비련의 빌런, 비범한 외모와 경험, 러일전쟁의 영웅, 메이지의 마지막 흑막, 예술가에 필적하는 천재적 군인이자 음모가 쓰루미는 그 순간 무화되며, 장애인 쓰루미, 상처한 쓰루미, 자식 묻은 쓰루미(자식 실은 관은 부모 가슴에 묻고 그 못이 어느 천년에 빠지고 어느 천년에 부서질꼬), 술도 못하면서 정치를 한다고 나서는 글러먹은 쓰루미 같은 것들만 증식할 것이다(나는 이시와라 간지가 이 과정을 거치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출발했으리라는 심증이 있다). 이것이 골든카무이가 조선과 중국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다. 아시리파가 조선에 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스마트폰에 중독되고 입시에 시달리겠지. 죽고 말 것이다. 늑대 사이에서 키워진 아이가 인간들의 도시에서 살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도 조선인들은 노래방에서 나오는 마오리족의 춤을 보며 호통을 치는 종족이다. 어디서 혀를 날름거리나며.

    실제 역사에서 골든카무이의 꿈은 조선과 만주와 중국에서 이루어졌다. 기타 잇키는 신해혁명이 러일전쟁의 결과라고 단언한다. 이시와라 간지는 조선에서 복무할 때 신해혁명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데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다 함께 만세를 외쳤다. 러일전쟁의 연장전이 중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면, 러일전쟁의 연장전에 고투하는 일본인들은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역사 속의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 작업에 고심했다. 나이토 고난도 그랬고 이시와라 간지도 그랬고 기타 잇키도 그랬고 다케우치 요시미와 다케다 다이준도 그랬다. 45년 8월 소련에게 일본 제국이 당했던 치욕은 이 러일전쟁의 연장전에 결국 일본이 실패했기 때문에 찾아온 당연한 귀결이었다. 첫째로는 영미를 따라하려는 현실주의Realpolitik 제국주의자들이 일을 그르쳤다. 둘째로는 일본이 유럽의 어느 나라 이름이라고 착각한 문화인들, 다이쇼 교양주의자들이 일을 그르쳤다. 셋째로는 조선과 중국을 에조나 대만 토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식한 일본인들, 특히 군인들이 일을 그르쳤다. 넷째로는 아시아라는 범주를 결코 인정하지 않고, 일본을 어디까지나 왜구라고 경멸한 조선과 중국의 중화주의자들이 일을 그르쳤다. 특히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일본이 말하는 아시아라는 것을 일관되게 조소해왔다. 

    정모 평론가의 골든카무이 평론(https://brunch.co.kr/@jesaluemary047/141)을 흥미롭게 읽었다. 독자들이 널리 공감할 수 있는 특징,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료가 되는 일의 무수한 반복들을 일본소년만화의 클리셰와도 다르고 근대 (서구)교양소설과도 다른 "유동적 이합집산"이라고 했다. 평자는 이것이 "신의의 조건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보려는 신중한 제스처"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요즘 무슨 광고에서는 "계산적"인 게 뭐 어때? 라는 문구가 등장하던데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신의를 둘러싸고 곡예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선악이 없지는 않다. 아시리파와 스기모토의 신의는 "계산을 초월한" 것이며, 쓰루미와 부하들의 신의는 "연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윤리와 술책의 차이라고도 했다. 여기까지는 사실 평자의 논리가 흥미롭다기보다는 평자가 사용하는 용어와 문체가 흥미로웠을 뿐이다. "유동적 이합집산"이 특별하다는 듯이 쓰고 있지만 전국시대 일본 다이묘들의 "유동적 이합집산" 스토리와 크게 다른가? 

    평론의 후반부는 논리도 흥미롭다. 역시 적당한 정도의 레퍼런스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깔끔하게 해내는 필력 좋은 문체다. "아시리파가 역사적 상황과 상관 없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채 식도락을 즐기며 힌나 힌나하는 아이에 그치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스기모토는 '힌나 힌나'하면서 노닥거리는 식도락과 지리한 폭력이 가득한 대문자 역사가 서로 동떨어진 게 아님을 간과하고 있다."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골든카무이가 본격 역사극으로서, 강철의 연금술사와 다른 지점이다. 불곰을 죽이고 뇌에 소금을 뿌려 호호 불어가며 먹는 것과 신선조 부장 히지카타가 혁명 계획에 방해되는 자를 칼로 베어 죽이는 것과 싸이코패스 킬러가 희생자를 천천히 포를 뜨는 것과 러일전쟁에서 병사들이 총력전의 현실 하에 갈려나가는 것은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는 것. 그 '동떨어지지 않음'을 만화로 보여주는 것이 골든카무이다. "인물들이 홋카이도를 누비며 하하호호 즐기는 식도락은 금괴 쟁탈을 위해 누군가를 무참히 살해하고 큰 역사로 나아가는 여행의 원동력이 되며 (...) 여기서 식도락 자체도 다른 동물을 살해함으로써 이루어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폭력이 일어난 직후 식도락이 이어지거나, 식도락 도중 폭력이 일어나는 특유의 이야기 패턴은 이질적인 무드의 두 상황을 과감하게 이어붙이면서 이런 상관관계를 강력하게 지시한다. (...) 그러므로 폭력의 관점에서 볼 때, 식도락과 역사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헤겔적 의미에서) 시차에 놓여 있다." 평자가 말하는 식도락과 역사의 관계는 원시적인 것과 문명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초-일상적인 것,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식도락의 폭력이 판의 폭력, 집시의 폭력, 인디언의 폭력, 사냥의 폭력, 방랑자 스기모토의 폭력이라면 역사의 폭력이란 총력전의 폭력, 쓰루미 중위의 폭력, 신선조의 폭력, 혁명의 폭력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만화에서는 근대-귀족적인 것과 원시-귀족적인 것이 접속한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원시-귀족적인 것이 승리를 거둔다(이 점은 평자의 관심 밖이다). 평자는 식도락과 역사의 접속에서 니체주의를 발견하며(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인용함), 폭력을 '선악을 넘어선 방식'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평자의 니체주의의며, 사실 오늘날 만연한 니체주의다. 한국의 넷플릭스 시리즈들이 기독교적 르상티망에 오염된 것에 반해 골든카무이는 니체주의적 건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선악을 넘어서는 것'이 문제이고 과제인가? 선악을 넘어서는 것을 선호하거나 과제로 삼는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 그들은 선악 관념을 갖추고 있는 자들이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선악을 욕망하는 이들이다. 정 평론가는 쓰고 있지 않지만, 골든카무이가 강철의 연금술사와 다를 바 없는 포르노 판타지인 까닭은 원시-귀족적인 것이 선한 것으로서 승리하기 때문이고, 스기모토와 아시리파와 시라이시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골든카무이는 당연히 권선징악 만화다. 단지 조선적인 '선함'과 다른 일본적 '선함'이랄까, 그 '선함'이라는 것이 성문헌법적으로 제시된다기보다는 관습법적으로, 알게 모르게, 분위기, 공기(쿠우키空気)로 전해져온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니체주의자, 일본주의자들이라면 관습법적인 선함은 성문법적 선함과 질적으로 다르며, 이미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일본적인 것이 조선적인 것보다 우월하고, 여성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보다 우월하고, 이념보다 모노노아와레가 우월하고 성문법보다 관습법, 관행이 우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니, 대놓고 우월하다고 하지는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행간과 문체 속에서 나타낼 것이다. 나는 그런 주장이 위험하며, 그런 주장이야말로 사이비종교의 온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이비종교는 말할 수 없는 것, 미묘한 것, 분명히 드러나면 오히려 그 가치가 사라져버리는 어떤 것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사이비종교인 것이다. 니체는 선악의 가치와 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독교적 선악이라는 걸 체화했던 사람이 니체다. 니체가 선악을 넘어서야 한다고 했던 것은 선악의 매력을 너무나 잘 알면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걸 망치로 부수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도 선악을 망치로 부수려한 니체보다는 선악의 가치를 체화하고 그 매력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니체를 조금 배워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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