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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Apr 01. 2024

음악으로서의 삶, 지향으로서의 자연-예술

「댈러웨이 부인」노트

https://www.youtube.com/watch?v=WWKS1ws71eU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에 태어나서 1941년에 자살했다. 장아이링이나 박경리보다 40살 안팎으로 연상이고, 히구치 이치요보다 10살 어리다. 자살할 때 이미 환갑의 연로한 노인이었다. 1914년에 1차대전이 있었으니 서른 두 살부터 서른 일곱 살까지 전쟁의 시절을 살았다. 30대의 한복판을 전쟁으로 보낸 것이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문필가의 커리어가 어떻게 제 궤도에 오를 수 있을까. 작품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진정한 커리어는 전후에 시작된다. 델러웨이 부인(1925)을 시작으로 등대로(1927), 올란도(1928), 자기만의 방(1929). 2년이나 1년 간격으로, 오늘날의 버지니아 울프를 만든 대표작을 쏟아낸 시기다. 역사적으로는 전간기라고 부르지만, 이런 의미에서는 전후문학이다.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 조금 찾아보다 보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어디에나 이 사람이 남편에게 남긴 유서가 노출되어 있다. 심지어 그 유명한 “여자가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문장보다도 더 많이, “Tuesday,”하고 시작되는 유서가 나무위키에도, 막스 리히터의 음악에도, 영화 디 아워스에도 노출되어 있다. 이 사적인 글이 없으면 이 작가가 평생 그린 세계의 정수를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관음증과 예술가의 작품이 아닌 삶에 대한 숭배가 뒤섞여 있다. 

    내가 댈러웨이 부인에서 가장 먼저 직감한 것은 그 두드러진 음악성이었다. 


What a lark!

What a plunge!

For so it had always seemed to her, 

When, with a little squeak of the hinges, 

Which she could hear now, 

She had burst open the French windows 

And plunged at Bourton into the open air

How fresh, 

How calm,

Stiller than this of course, 

The air was in the early morning

Like the flap of a wave

The kiss of a wave

Chill and sharp 

And yet solemn

Feeling as she did

Standing there at the open window

That something awful was about to happen 

Looking at the flowers

At trees

With the smoke winding off them

And the rooks rising

Falling 

Standing

And looking

Until Peter Walsh said……


    이건 시가 아니다. 영시에 필요한 모든 형식적인 조건들이 여기엔 없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에 더 본질적으로 노래다. 이 사전성事前性이 이 사람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모든 작품들이 이와 같지는 않다. 


曾祖母自身はとりたててヨーロッパ文化への郷愁など持ち合わさず、島での生活に満足しきっていたので、尊敬される結婚に興味はなかったし、フランス本国にぜひとも戻りたいという願いもなかった。島の娘たちと仲間よく縫い物をしたり、病院で包帯やシーツを洗ったり、本国から劇団が来れば、うきうきと俳優たちに付きまとった。島の娘並みに上達した伝統的な歌と踊りを、腰蓑を付けたスタイルで本国の俳優たちに披露し、大いに喜んでもらうことができた。

증조모 자신은 특별히 유럽 문화에 향수가 없고, 섬에서의 생활에 만족했기 때문에, ‘존경 받는 결혼’에 흥미는 없었고, 프랑스 본국으로 반드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도 없었다. 섬의 원주민 소녀들과 사이 좋게 바느질을 하고, 병원에서 포대나 시트를 빨고, 본국에서 극단이 오면, 신이 나서 배우들을 따라다녔다. 섬의 소녀들처럼 실력이 오른 전통민요나 무용을, 훌라춤 치마 같은 것을 입고 본국의 배우들에게 선보여, 큰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었다.


    쓰시마 유코의 “오토바이, 꿈의 감촉”의 일부다. 

    여기도 여기 나름의 리듬이 있다. 물론, 리듬이 없는 글은 없다. 이것은 노래라기보다는 이야기이며, 분출과 발산이라기보다는 정리하는 글이고, 일본말로 하면, 声を出す가 아닌 声をかける다. 대단히 차분한 이 목소리에 비하면 댈러웨이 부인의 목소리는 영탄조다. 

    박경리 토지의 한 부분을 보면


거리굿 한다고 음식을 차려놓고 수없이 혼신을 불러대는 봉순이, 영신이 실리기라도 한 듯이 목소리는 낭랑했으며, 눈은 흥분에 번쩍번쩍 빛나고, 손짓 몸짓이 단순한 아이들 소꿉놀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너무 진박하여 처연한 귀기마저 느끼게 한다. 

봉순이의 이런 장난은 어미에게 큰 근심거리였다. 무당놀이뿐만 아니라 광대놀음도 혀를 내두를만큼 기막히게 잘하는 봉순이는 서희보다 두 살 위인 일곱 살이다. 가녈가녈하게 생긴 모습이나 성미도 안존한 편인데 어떤 내부의 소리가 있었던지 광대놀음, 무당놀음이라면 들린 것 같은, 한 번 들은 것이면 총기 있게 외는 것도 그러려니와 이 아이의 목소리는, 매우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것은 숙명적인 천부의 자질인 성싶고 슬픈 여정의 약속인 듯도 하다.


    리듬은 목소리에 어울리고 목소리는 리듬에 어울린다. 박경리 소설은 일본어 문장과 대입해도 거의 오차가 없을 정도로 근대일본소설의 문체를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여기에 쓰시마 유코와 맥을 같이하는 다소 딱딱한 객관성(예를 들어 봉순이에 대하여 “영신이 실리기라도 한 듯이 목소리는 낭랑”하다고 쓰고 있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바로 그 영신 실린 낭랑한 목소리가 있다면 이랬을 법한 투로, 그 처연한 귀기로 쓰여져 있다. 그러니 여기서 댈러웨이 부인이 비평적 언어, 학문하는 언어와 갖는 거리, 그리고 박경리나 쓰시마 유코가 그것과 갖는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이 있지만 또 그와 다르게 강렬한 격정이 두드러진다. 어쩌면 그 격정은 다소 과장해서 말하는 버릇이고, 반대로 그런 과장에 의해서만 풀어질 수 있는 심사의 비분강개일 지도 모른다. 비분강개라고 하니 박경리가 흠모했던 사마천이 생각난다. 


屈原者, 名平, 楚之同姓也. 

為楚懐王左徒. 

博聞彊志, 明於治亂, 嫺於辭令. 

入則與王図議國事, 以出號令;

出則接遇賓客, 應対諸侯. 

王甚任之.

    

    리듬이 두드러지고, 심지어 글의 음악성이 근대문학보다 훨씬 중요한 글이지만, 댈러웨이 부인과는 다르게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음악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 (그 음악성을 포함하여) 표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움’, ‘사전성’이라면, 이 글은 ‘인위성’, ‘사후성’을 표상한다. 문자 자체도, 한문은 문자라는 게 원래 얼마나 우리의 ‘목소리’와 동떨어져 있으며 얼마나 인위적인 것인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각각의 글자의 선택, 배열은 지극히 인위적으로 선택된 것이며, 그 하나하나가 사마천의 의도와 생각을 무수히 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노래를 부르듯이, 민요가 불리듯이 이런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자격 자체도 그렇다. 이런 글은 그냥은 못 쓰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글의 수준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저런 형식의 한문 문장을 쓰기 위해 필요한 지독히 인위적인 공부와 훈련이 없으면 말 그대로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대화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며, 장인의 도자기 같은 것이다. 쓰시마 유코가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글을,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방향을 지향했다면,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더 근본적인, 장인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수준 높은 탁월함, 노래의 탁월함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사마천은 아무것도 특별히 지향할 필요가 없는 게, 당대에 글쓰기라는 업은 장인적인 것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버지니아 울프는 미시마 유키오와 비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시마 유키오야말로 내가 아는 한 한자문화권(한중일)을 통틀어서 문학의 래디컬한 인위성을 회복하려고 한 유일한 작가이기 때문이다.[1] 

    댈러웨이 부인의 음악성은 주파하는 음악성이다. 떠오르는 것을 자유롭게 리듬 속에서 주파하기. 이것은 다른 음유시인들, 괴테나 셰익스피어와도 아주 다르다. 댈러웨이 부인의 방식은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파우스트나 리처드 2세[2]가 훨씬 정형적이고 리드미컬하다는 점이 명약관화하다. 댈러웨이 부인의 방식은 형식을 따르거나, 완성된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이라는 것이 애초에 어떻게 하다가 만들어진 것인지, 형식의 기원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는 듯한 방식이다. 노래란 무엇일까? 노래가 먼저 있고, 우리는 그걸 배워서 부른다. 그러나 노래가 먼저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노래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어야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 노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하는 말이 노래여야 한다. 그러려면 들리는 모든 것이 노래이고 음악이어야 한다. “For having lived in Westminster, one feels even in the midst of the traffic, or waking at night, Clarissa was positive, a particular hush, or solemnity; an indescribable pause; a suspense before Big Ben strikes. There! Out It boomed. First a warning, musical; then the hour, irrevocable.” 댈러웨이 부인은 도시의 소리가 가져오는 역동성, 서스펜스를 느낀다. 바꿔 말해 그것을 음악으로 인식했다는 것이고, 또 작곡을 해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이처럼 댈러웨이 부인에게 있어 세상의 진실은 그 음악성, 리드미컬한 호흡 속에서 드러난다. 가장 진실된 것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글쓰기는 가파른 호흡을 원-음악적인 리듬을 그린다. 예를 들어 댈러웨이 부인에게 종전은 무엇이었나? 종전에 관한 댈러웨이 부인의 진실은 무엇인가? “It was June/ The King and Queen were at the Palace/ And everywhere/ though it was still so early/ there was a beating/ a stirring of galloping ponies/ tapping of cricket bats/ Lords/ Ascot/ Ranelagh/ and all the rest of it/ wrapped in the soft mesh of the grey-blue morning air/ which as the day wore on would unwind them/ and set down on their lawns and pitches/ the bouncing ponies/ whose forefeet just struck the ground/ and up they sprung/ the whirling young men/ and laughing girls in their transparent muslins/ who even now after dancing all night/ were taking their absurd woolly dogs for a run/ and even now……” 베르사유 조약이 채결된 1919년의 6월을 언급하는 것이 초반부가 된다. 우리가 1980년의 5월을 특별한 마음으로 기억하듯이, 여느 때와 다름 없는 6월이면서도 역사적인 6월이라는 감개를 서서히 떠올리며 생각한다. 왕과 여왕이 더 이상 피신해 있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들이 돌아온 궁을 떠올리고 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마음이 서서히 부풀듯이 리듬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한다. 완성된 음악이 아니라 음악이 되어가는 과정, 흐르기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비교적 뚝뚝 끊기는 두 부분을 지나며 서서히 종전이 실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실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흐름이 되어 온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펜이 비로소 제대로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작두를 타듯 리듬을 탄다. 리듬을 타며 이미지들을 주파한다. Galloping ponies가 지나가고, Tapping of cricket bats가 지나가고, Lords, Ascot, Ranelagh가 지나가고, 계속된다. 계속되지 않으면 흐름은 멈춰버리고, 음악은 끊기게 되고, 실감, 진실은 중지되기 때문에, 계속되어야 하고, 다음 순간에 적절하게 춰야 하고, 절실한 것을 찾아야 하고, 그런 식으로 춤은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흐름은 끊길 수밖에 없다. 그러면 돌연 글의 리듬도 뚝 끊어진다. 끊어진 자리엔 당혹, 낭패, 침묵, 체념이 남는다. 춤은 다시 시작될 것이고, 다시 노래하게 될 터이지만, 당분간은 이 막막함을 견디며 글이 계속된다. 처음 인용한 부분의 마지막이 그렇다. When Peter Walsh said, “Musing among the vegetables?” – Was that it? “I prefer men to cauliflowers” – Was that it?” 처음부터 피터가 댈러웨이 부인에게 갖는 거의 본질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무례하게 끼어드는 자. Bourton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이 유려한 흐름이 되어 감미롭게 계속되는데, 갑자기 끼어들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저런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멍청하고 게다가 냉소적인 독까지 뿜어내는 말들이다. 힘차게 춤을 추던 펜은 혼란에 빠지고, 호흡은 턱 막혀버리며, 음악은 끝나고 더듬거림만 남는다. 주의할 점은, 댈러웨이 부인이 피터를 좋아한다는, 적어도 좋아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남부끄럽게도, 차라리 즐거운 창피함이겠지만, 저런 형언할 수 없는 멍청함에서 그녀는 유머와 매력, 어쩌면 일종의 해방감까지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달리고 세계를 주파하여 끊임없이 춤을 춰야하는 진실된 삶의 숨막힘으로부터의 해방감. 흐름이 끊기는 다른 사례를 보자. 


And as she began to go with Miss Pym from jar to jar, choosing/ nonsense, nonsense/ she said to herself/ more and more gently/ as if this beauty/ this scent/ this colour/ and Miss Pym liking her/ trusting her/ were a wave which she let flow over her/ and surmount that hatred/ that monster/ surmount it all/ and it lifted her up and up/ when – Oh! A pistol shot in the street outside! 

“Dear, those motor cars,” said Miss Pym, going to the window to look, and coming back and smiling apologetically with her hands full of sweet peas, as if those motor cars, those tyres of motor cars, were all her fault.” 


    초반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처럼 흐름이 끊긴다는 것에 대한 복잡미묘한 이해의 경지를 드러낸다. Miss Kilman에 대한 증오의 물결을 꽃집과 꽃집 주인 Miss Pym이 주는 긍정적인 물결로 순화하며 넘어가는 감동적이고 숭고한 고조의 리듬이 자동차 소리로 뚝 끊어지는 참사가 일어난다. 참사와 파국이 없다면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동요하지 않고 자기가 다 미안하다는 듯이 창가에서 돌아오는 Miss Pym과 그 손에 한가득 들린 꽃다발의 모습이 완전히 무력해진 댈러웨이 부인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 너무 고마워서 오히려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표현도 할 수 없는 굳은 마음의 애처로움이 건조한 문장의 행간에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흐름을 끊어버리는 무례한 세상에게 대체로 침묵하고 체념하는 듯하지만, 다음 장면에서는 예외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화를 낸다. 


Then came the most exquisite moment of her whole life passing a stone urn with flowers in it. Sally stopped/ picked a flower/ kissed her on the lips/ The whole world might have turned upside down! The others disappeared/ there she was alone with Sally/ And she felt that she had been given a present/ wrapped up/ and told just to keep it/ not to look at it/ a diamond/ something infinitely precious/ wrapped up/ which as they walked/ she uncovered/ or the radiance burnt through/ the revelation/ the religious feeling! – When old Joseph and Peter faced them:

“Star-gazing?” said Peter

It was like running one’s face against a granite wall in the darkness! It was shocking; it was horrible!


    흐름이 중요한만큼 끊어짐에 대한 유감도 크다. 흐름을 딱히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난리가 났다 조용해졌다 난리가 났다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무슨 난리가 나도 다 자신의 흐름 속에 편입해버리는 사람(그런 사람도 있다)이라면 마찬가지로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고 ‘끊어짐’을 의식하지도 않을 것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끊어짐’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또한 그녀의 흐름은, 조금만 어긋나도 산산이 부서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다. 이 불안정성,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작두날에 베이는 리듬 타기의 불안정성조차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말한 바와 같이, 흐름을 제대로 타기 전의 파편들, 흐름이 되지 못한 더듬거림들, 그리고 삐끗함과 흐름의 무너짐, 막막한 침묵까지도 유려한 흐름과 함께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정제된 정식 앨범이 아니다. 연습녹음까지 앨범으로 낸 셈이다. 정제된 앨범이 무대 위의 공식 퍼포먼스라면, 이것은 무대 뒤를 보여준다. 무대 뒤에야말로 리얼한 것이 있으리라는 믿음, 그 리얼한 것에 대한 고집이 댈러웨이 부인에는 있다. 이것을 밀어붙이면,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의 삶이라는 식이 된다. 이 문장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삶이 예술과 끊임없이 상호 침투하며 보호받지 못하는 위태로운 분열과 동요다. 미시마 유키오가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냐고 기자들이 묻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건 문학적 죽음이지요. 그렇게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이 때의 문학, 이러한 예술에는 위태로움, 불길함이 도사리고 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예술적 삶을 있는 그대로 작품화해서 팔면 그것은 잘 팔릴 것이고, 예술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그것은 가짜가 판치는 예술계에 드문 진짜가 될 것이다. 대가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완벽성과 탁월함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것이 자신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왔는지 철저히 숨기고, 그들의 작업은 비록 거장의 수준일지언정 순수하지 못하며,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이다. 그에 반해 당신의 작품은 소박하면서도 진실되고, 순수한 예술적 혼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대가의 어떤 권위보다 강하고, 빛날 것이다. 그 ‘진짜’의 힘만으로 당신은 모든 업계의 관행과 선배들의 권위와 앞을 가로막는 가짜의 장벽들을 모두 부수고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로, 당신에 관한 이야기인데, 당신은 성취 이후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원래 당신이 살았다는 그 ‘예술적 삶’은 성취를 위해서 산 것이 아니고, 성취를 의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살 수 없었던 삶이다. 그런데 이미 한 번 자신의 삶을 팔아 성공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팔아야 한다. 그러나 커리어를 계속하는 한, 당신은 전과 같이 순수한 예술적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순수한 삶으로 돌아가려면 커리어를 버려야 한다. 커리어를 계속하려면 순수한 삶이 필요하다. 이것이 딜레마다. Once의 남자 주인공이 방황하는 것도, 장아이링이 도미하여 침묵한 것도, 그보다 비극적으로 수많은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요절하고 마는 것도 나는 이런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더 큰 견지에서, 대중들에 대한 이야기다. 예술적 삶을 노출하여 파는 행위는 결국 대중을 관음증자로 기르는 짓이며, 대중에게 예술 작품보다도 예술가의 삶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가르치는 짓이다. 이렇게 가다보면 예술을 작품으로 향유하는 것보다 예술가의 삶을 아는 게 더 진실되게 느껴지고, 예술가의 삶을 들어서 아는 것보다 직접 예술가와 교류하는 게 더 진실되게 느껴지고, 예술가와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선을 넘어가다보면 범죄가 되고, 이 범죄가 극단으로 가면 존 레논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된다. 한마디로 이것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노래로, 천하에 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중독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허트로커>가 끝날 때쯤, 주인공은 자신의 아이에게, ‘아이 때는 좋아하는 게 많지만, 나이가 들면 좋아하는 게 점점 없어진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자신은 좋아하는 게 전쟁밖에 없어졌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에게 삶의 진실은 오직 전장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사회가 거짓으로 가득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소설에서 셉티머스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자가 되며 결국 자살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에서 이 문제, 내면의 분열, 동요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댈러웨이 부인의 음악성과 전쟁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루를 사는 것도 지극히 위험한 것이라고 그녀가 생각할 때, 댈러웨이 부인은 문자 그대로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버지니아 울프의 전쟁관,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버지니아 울프가 ‘겪은’ 전쟁, 그녀가 5년 동안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이웃들을 보며, 돌아온 군인들을 보며, 그들과 사회가 겪는 상호작용을 온 몸으로 느끼며 깨달은 전쟁의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작두를 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절실한 삶의 진실은, 종잇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셉티머스와 클라리사가 있는, 파티와 전쟁이 있는 살벌한 위태로움을 그 형세로 한다. 여기서 전쟁은 정치적인 역학관계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절실한 진실의 이면을 상징하는 관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물론 전장을 떠난 그 순간부터, 귀국한 군인들, PTSD로 고통 받는 병자들에게조차 전쟁은 관념이 된다는 점을 버지니아 울프는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지, 소리, 사실들을 주파하면서 전쟁의 구체적인 온갖 면모들,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 6월, 돌아온 왕과 여왕, 기뻐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구체적인 온갖 면모들은 지나가고, 또 얼마든지 더 지나갈 수 있다. 관념으로서의 전쟁은 이 주파하는 정신의 이면을 상징한다. 

    주파하는 정신이란, 자신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소리, 이미지, 사실들의 연쇄와 부딪친다는 것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말과 생각은 이 역동성, 순간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옛 친구들과 밤을 지새며 춤을 추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추억하다가도 그녀는 단언한다. “What she loved was this, here, now, in front of her; the fat lady in the cab.” 마치 자기 자신을 추억에서 끄집어내려는 듯이, 현재,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고집스러운 지향이 엿보인다. 이렇게 클라리사는 자신을 추억에 잠긴 자신으로부터 떼어낸다. 그러나 이 말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순간에 그녀는 이동하기 때문이다. “somehow in the streets of London, on the ebb and flow of things, here, there, she survived, Peter survived, lived in each other, she being part, she was positive, of the trees at home; of the house there, ugly, rambling all to bits and pieces as it was; part of people she had never met; being laid out like a mist between the people she knew best, who lifted her on their branches as she had seen the trees lift the mist, but it spread ever so far, her life, herself.” 그녀는 이제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말처럼 “it was absolutely absorbing”, 그녀는 하나에서 열을 보고, 열에서 백을 보고, 만난 적 없는 모든 이들을, 자신 속에서 보고, 이해한다. 그녀는 오직 현재에만 충실하기를 원하기도 하고, 모든 과거와 미래에 걸쳐 있기도 하다.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이것을 모순으로 파악하는 것은 Peter Walsh 같은 이들의 몫이다. “it was the state of the world that interested him” 피터는 정적인 존재다. 클라리사는 동적이며, 이동한다. “그녀는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자마자 다음 문장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녀는 자신이 아주 어리다고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다고 느낀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피터라면 뭐야 왜 말이 바뀌나, 핀잔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클라리사에게는 말의 논리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하다. 자신이 그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에 말한 것뿐이다. 이것을 주체적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그런데 클라리사가 피터는 세상의 정적인 상태(state)가 그의 관심을 끈다고 말할 때, 실제로 그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과 다른 지이다. 그녀에 의하면, 피터는 정적인 것에 관심이 있고, 이것은 그의 권위에 대한 관심, 나아가 권위의식,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defects of her own soul을 말하는)과 이어진다. 이것이 클라리사의 직감이다. 그런데 그녀의 직감은 사실 그녀의 지향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무의식은 그녀가 원하는 삶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은가? 내 생각에 클라리사의 이 같은 인물평론은 결국 클라리사가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혐오스러운 소질을 피터에게 투영한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소질이 아니고서야 이해나 언급이 가능하겠는가? 정적인 삶, 유연하지 않은 삶, Eternal한 것과 결부되어 뻣뻣한 삶, 흐르지 않고 고인, 자기 안의 멀어지고 싶기만 한 그 측면. 반대로 클라리사의 의지는(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녀 자신은 모든 것을 마치 자연스러운 사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결국 피터에게 그녀가 돌린 모든 특질과 반대되는 것들, 흐르는 삶, 유연한 삶, 역동적인 삶,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지 그 자체는 대단히 고집스럽고 뻣뻣한 것이다. 여기에 클라리사와 버지니아가 겹치는 분열이 있다. 

내가 말하는 분열은 다음과 같은 분열은 아니다. “She sliced like a knife through everything; at the same time was outside, looking on.” 종합적으로 표현하려면, 이렇게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클라리사는 여기에 있다, 고 말하는 순간 저기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요한 기로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기서 쓴 저 표현은, 김지하가 탈춤을 얘기하며 쓴 쌍동자를 연상시킨다. “탈판을 보는 눈은 보통의 눈일까요? 보통의 눈이지요. 그러나 그냥 보통식 보통의 눈이 아닙니다. (…)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쌍동자’라는 겁니다. 쌍동자는 반역자만 타고난다고 그럽니다. 수운 선생이 쌍동자였다는데, 쌍동자는 뭐를 예상하는가 하면, 눈동자 네 개, 네 눈동자를 예상합니다. 네 개의 눈동자는 인간 안에 있는 눈이라 그럽니다. 밖에 있는 눈과 안에 있는 눈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융은 정신병에 걸린 눈을 네 개라 그러지요.” 김지하는 예언자, 치우, 신화의 영웅들 이야기를 하며, 쌍동자는 위대한 예술가(탈춤을 추는 춤꾼도 포함된다) 또는 예외적 상황의 인간들에게서 발견이 된다고 말한다. 쌍동자가 좋은 거라면, 춤을 못 추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기로란, 누구에게나 쌍동자가 있다고 볼 것이냐, 아니면 쌍동자가 김지하 말처럼 예외적인 인간들에게 나타난다고 볼 것이냐 하는 점에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다고 본다면 쌍동자는 특별히 쌍동자라고 이름 붙일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저 흔한 인간의 한 쌍의 눈동자에 지나지 않는다. 김지하가 쌍동자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클라리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마치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그랬다는 식으로 쓴다. “She sliced like a knife through everything; at the same time was outside, looking on” 피터와 대비되는 이 쌍동자스러운 분열증이 실은 클라리사의 의지의 표현이며 지향이라고 본다는 점은 밝혔다. 그녀는 이 같은 분열증을 원하고 지향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위험을 지향한다. 현재의 이 순간을 사랑하기를 지향한다. 매 순간 이동하기를 지향한다. 지향한다는 것은 특권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기로가 있다. 클라리사가 이것들이 자신의 특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그녀 자신의 무의식의 지향의 대상들, 그것들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는 흔해 빠진 것인가 아니면 예외적인 것인가? 그것이 흔해 빠진 것이라면, 예를 들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잠 자는 것 같은 일이라면 특별히 지향할 필요도 없고, 애초에 여기에 클라리사가 나는 이럽네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클라리사의 음악에 대한 지향과 이어진다. 그녀에게는 세계가 음악일 뿐만 아니라, 그녀 스스로 세계가 음악이기를 지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악을 비좁은 직업의 세계에 가두는 모든 종류의 전문주의, 형식주의, 업으로서의 음악을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보호도 거부하는 것이기에 위험하고, 어떠한 안전한 종합도 거부하는 것이기에 분열증적이고, 어떠한 과거에도, 관습에도 기대지 않기 때문에 현재적이며, 끊임없이 리듬을 타며 즉흥연주를 해야 하는 유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파티를 원한다. 사회생활을 원한다. 삶이란 곧 사회생활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병원에 가게 될 뿐이다. 보호가 필요하고 안정적인 종합이 필요하고 직업이 필요하고 관습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클라리사가 위에서 지향한 것과 충돌한다. 클라리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진퇴양난이고 피할 수 없는 분열이다. 

    이것은 예술적 삶(분열증적, 유동적, 원-음악적, 위험한, 현재적)을 예외적으로 특권화하여 일상적 삶과 분리시키는 고집스러운 구도의 자연스러운 귀결일 뿐이다. 클라리사는 그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지만, 그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겠다는 그 고집스러운 지향에만큼은 끝끝내 머물러 떠나지 않는다. 끊기고 헤매면서도 계속되는 노래의 산문은 그 물질적 증례가 된다. 클라리사는 피터가 정적이라고 했다. 이 때 자신 속의 한 가능성으로서의 정적 인생에 대한 거부가 보였다. 그러나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그 한 가능성으로서의 정적 소질은 다른 방식의 고착을 낳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뻣뻣한 것은 오히려 클라리사가 되기 때문이다.  



[1] 버지니아 울프가 다른 방식으로는 쓸 수 없었듯이, 미시마 유키오도 다른 방식으로는 쓸 수 없었던 면이 있었을 것 같다. 유명한 이야기로, 그의 검도사범은 5단까지 따고도 그가 운동신경 부족으로 얼마나 뻣뻣하고 부자연스럽게 뒤뚱거렸는지 회고한다. 

[2] Old John of Gaunt, time-honour'd Lancaster,
 Hast thou, according to thy oath and band,
 Brought hither Henry Hereford thy bold son,
 Here to make good the boisterous late appeal,
 Which then our leisure would not let us hear,
 Against the Duke of Norfolk, Thomas Mowb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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