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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Mar 26. 2024

중국의 무술은 대련이 끝난 후 시작된다

1.

    

    중국의 무술은 대련이 끝난 후 시작된다. 이 말은 큰 감동을 줬다. 중국의 협은 무술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말도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중국의 무술은 사람을 모으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며, 그 무술의 본, 품새, 형은 군대 제식이나 체조에 가깝다는 것이다. 중국무술에 대한 이러한 가차없는 비하에 가까운 묘사는 아마 중국인이라면 결코 하지 못할, 외부자의 뛰어난 탁견일 것이다. 리링李零은 손자를 다룬 자신의 책 제목을 이소룡의 말을 빌려서 "유일한 규칙(은 규칙이 없다는 것)" 혹은 "병불염사兵不厭詐(병법은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라고 지었는데, 이는 고상하고 우아한 표현이지만, '중국의 무술은 대련이 끝난 후 시작된다'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 사람들은 많지만, 병법이 현실에서 하나의 문화가 된 곳은 중국이다. 종이 위에서 독자가 받는 충격은 '문화 충격'에는 비할 수 없다. 병불염사를 상식처럼 대수롭지 않게 이해하는 사람도, 대련에서 이긴 자를 습격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모여드는 중국인들의 모습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련은 왜 하는 것인가? 그렇게 질문한다면 당신은 스스로 중국의 평면적 지혜를 이해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그 따위 대련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 당신은 대련에는 없는 의미가 대련 바깥 어딘가에는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것이 중국인과 당신의 차이점일텐데, 중국인에게 의미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대련도 의미가 없고, 대련 바깥의 실전도 의미가 없다. 반대로 대련도 권모술수이며 대련 바깥의 실전도 권모술수인 것이다. 대회장을 설치하고 관중들을 도열시키고 흥행이 왔다갔다하는 대련에 왜 의미가 없겠는가? 대련은 강자를 가려내는 연극무대이며 강함이란 이러저러한 것이고, 사람들은 그에 합당하다고 道義적으로 합의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념과 실천이 부합하고 명실이 상부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승자는 강자다. 그 '강함'만이 의미 있다고 하겠는가? 혹은, 바깥의 '실전'을 중시하는 입장에 서서 대련 승자의 '강함'은 가짜 강함이라고 하겠는가? 대련 승자의 강함은 연극무대의 강함이다. 그렇다면 실전의 승자도 연극무대의 강함인 것이다. 대련에서는 대련에서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이 있고 이용할 수 있는 기정奇正형세가 있다. 바깥에서는 바깥에서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이 있고 이용할 수 있는 기정형세가 있다. 인생은 끝나지 않는 연극이며, 연극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닌, 리얼리티 그 자체의 연속된 흐름이다. 원한과 분노는 풀 수 있을 때 풀어야 하며, 한 명을 보면 한 명을 죽이고 두 명을 보면 두 명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상쾌, 통쾌, 장쾌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 이것이 카타르시스의 주위를 맴도는 그리스인들과 다른, 중국식 강자의 모습이며, 대장부의 심리상태가 아닐까? 

    금병매도 홍루몽도 각 회차의 마지막이나 중간에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겠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남녀가 운우지정을 나누며 서로 희롱하고 즐긴다. 그리고 서술자는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겠다"고 말한다. 한때의 운우지정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 며칠 전에 죽은 하인의 모친 장례 문제 같은 것이 등장한다. 러시아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중국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겠다." 그리고 전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운우지정을 벌이던 사람들이 멸하여 사라진 것처럼. 처음부터 그 둘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이것이 다케다 다이준이 말한 '멸망에 익숙한 여인'이 바라보는 세계다. '멸망에 익숙한 여인' 중 한 명인 여태후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썼다. 


태후가 죽이려 했으나 틈이 없었다. 효혜제 원년 12월, 효혜제는 아침 일찍 활을 쏘러 나갔다. 조왕은 아직 어려 일어나지 않았다. 태후가 혼자 있다는 것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독주를 마시게 했다. 날이 밝을 무렵 효혜제가 돌아왔으나 조왕이 이미 죽어 있었다. 회양왕 유우를 조왕으로 옮겼다.  여름, 조서를 내려서 역후의 부친(여택呂澤)에게 영무후(令武侯)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태후는 마침내 척 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서 돼지우리에서 살게 하고는 ‘사람돼지’라 부르게 했다. 몇일 뒤 태후는 효혜제를 불러서 ‘사람돼지’를 보게 했다. 효혜제가 보고 묻고서야 그것이 척 부인임을 알고는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이 때문에 병이 나서 한 해 남짓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을 보내 태후를 청해서는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신은 태후의 아들로서 천하를 끝까지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효혜제는 이로부터 날마다 술과 쾌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병이 났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걸핏하면 '신이 없다면 인간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주제로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장광설을 펼치게 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이 잔인함에서 중국인에 뒤지기 때문이 아니다. 신을 갖고도 러시아인들은 잔인했다. 또 신이 없기에 여태후가 '잔인'했던 것도 아니다. 효혜제는 울고 병이 나고 암군이 되었다지만 사마천의 행간에는 놀라움도 대수롭게 여기는 감각도 없다. "몇일 뒤 태후는 효혜제를 불러서 '사람돼지'를 보게 했다". '사람돼지'라 부르게 한 태후의 명을 따라드리는 것처럼 쓰고 있는 이 구절에서 느껴지는 것은 공감과 냉소다. 여태후가 저지른 짓에 대한 냉소이자, 나약한 효혜제에 대한 냉소이자 여태후를 이해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냉소일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효혜제는 이렇게 말했지만 사람인 여태후는 자신의 정치력에 걸맞게 큰 반격 없이 천수를 누렸다. 저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효혜제야말로 스스로를 망쳤다. 실로, 노자에서 말하는 것처럼(사마천은 황로사상의 신봉자였다) "자기 몸을 귀히 여기는 사람에게야말로 천하를 기탁할 수 있고, 자기 몸을 천하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야말로 천하를 맡길 수 있다." 성인을 배출한 족속은 '정상적인' 족속일 수가 없다. 노자는 여태후와 같은 무수한 중국인들을 깊이 이해하였을 것이다. 사마천 역시 여태후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여태후가 저지른 짓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으로, 그 짓을 기록하는 사마천의 필법이기도 하다. 그것은 반드시 신을 믿지 않는 자의 필법일 필요는 없다(신을 믿고 안 믿고는 사실 별 상관이 없다). 대련에서 승리한 상대 문파의 대련자를 살해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매복하는 자의 필법이다.  

    

2.


    메이지의 걸출한 학자들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개 도쿠가와 한학의 계보를 계승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막말에는 히라타平田 국학, 소라이학徂徠学, 주자학, 양명학, 미토학水戸学, 거기다 이 여러 학파를 서로 다른 비율로 배합한 온갖 종류의 절충학파가 난립하여 실로 백가쟁명을 방불케 했다. 친부가 히라타 국학과 관계가 깊은 신관이었던 천황의 신하(농정農政관료)이자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는 '붓을 든 사무라이' 중에서도 독특한 존재였다. 여기서는 사무라이의 귀족-전사 문화를 배척하는 야나기타의 특이한 접근법을 소개한다.  


싸움의 기원은 오래되었겠지만 그 필요성은 아마 나중에 더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일어나는 싸움은 협박이나 습격, 그밖에도 계획이 음험하거나 동기가 복잡하여 오랫동안 원한 관계로 남게 되는 것이 대부분 이지만, 당시에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던 싸움은 오히려 애교가 있는 것이었다. 우선 제례나 연극, 스모, 그 중에서도 하나미 때는 반드시 싸움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대개는 술을 마셔서 흥분된 날인 데다가 싸움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 모두 우연한 것이어서 나중에는 술기운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항상 중재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만한 장소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남녀노소 무리를 이루어서 구경했다. 무승부라든가 7대 3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한쪽이 완패하는 싸움은 적었다. 약간의 부상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죽는 사람이 생길 만큼 죽을 각오로 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래는 위험을 무릅쓰고 싸울 만한 그 다음의 효과를 기대했던 것이다. 밥보다도 싸움을 좋아한다고 하는 남자나 남의 싸움을 대신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지만, 싸움의 동기가 단순히 남자의 체면을 세우고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는 것뿐이었다면 아마 그런 이기주의는 천박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효과, 즉 새로 아는 사람을 늘려가는 즐거움이었다. 재주 좋은 중재인이 쌍방에서 존경받고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싸움은 사실상 당사자가 바라고 있던 일종의 사회적 기회로, 화해의 잔을 주고받는 일은 지금까지 타인이었던 많은 사람을 곧바로 친근한 관계로 연결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 매우 부자연스러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싸움 이상으로 쉽게 서로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누가 이기고 졌다는 불쾌한 대결을 그만두고 서로 평등하게 교제하도록 하는 방법을 달리 찾을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야나기타는 평범한 사람들(상민常民)의 전문가였다. 그에 따르면 '평범한 싸움'이란 문파의 명예를 위해서는 대련 하다 남을 죽이거나 스스로 죽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무라이들의 문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물론 대련에서 승리한 상대 문파의 검술가를 귀갓길에 집단으로 습격하여 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가능성이 높은 것은, 패배했음에도 스스로 배를 가르지 않은, 수치를 모르는 자기 문파 사람에게 징벌을 가하는, 혹은 그런 징벌이 가해지기 전에 알아서 패배한 자가 책임을 지는 시나리오다. 야나기타는 일견 사무라이 문화와도, 중국의 무술 문화와도 무관한 싸움의 사회적 효과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로 평등하게 교제"하는 장을 열어젖히는 싸움의 역할이란 결국 유학이 막말유신기에 수행한 역할과 어떤 의미에서 동일한 것이며, 이것이 곧 자오위안赵园이 말한 "도학적 평등"이나 와타나베 히로시渡辺浩가 말하는 "데모크라시"와 이어지는 것을 쉽게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야나기타의 조심스러운 문체를 흐트러뜨려보자면, '싸움은 사회를 평면화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야나기타의 이러한 지적은 중국을 바라보는데 유용한 시각을 제공해준다. 

    도가, 법가, 병가兵家에 대한 흔한 언설이 여전히 정치(전쟁)의 '격심함'(激しさ, 중국말로는 리하이厉害)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경향을 되돌아봐야 한다. 중국인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아무리 선을 넘는, 격심한, 격렬한, 극악스러운 일이라도 저지른다. 양생, 치국, 전승을 위해 먹지 못하는 것이 없고 끊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떠나지 못하는 곳이 없고 머무르지 못하는 곳이 없다. 모든 전통적 도덕은 천하와 그 천하를 지탱하는 '이름 없는 도'의 작용에 의해 그 절대적, 종교적 가치를 잃고 꼬마들의 인형 놀이 비슷한 것이 되고 만다. 리하이하다는 것은 전통적 도덕에 비추어볼 때 리하이하다는 것인데,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말처럼 중국인들에게 리하이하다는 것은 장자에게 도가 그렇듯이 편재하는 것이다. '중국의 무술은 대련이 끝난 후 시작된다'는 말은 리하이의 핵심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케다 다이준이나 리링조차 "싸움 이상으로 쉽게 서로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누가 이기고 졌다는 불쾌한 대결을 그만두고 서로 평등하게 교제하도록 하는 방법을 달리 찾을 수 없"다는 감각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풍매화風媒花>에서 다케다는 이렇게 썼다. 


미네가 옛날에 나한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 일본인 전체가 중국인이 되든지 중국인 전체가 일본인이 되지 않으면 중일 양국 사이에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그치지 않을 거라고. 자네가 말하는 게 그런 의미 아닌가. 즉, 피비린내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작업을 하려는 거겠지. 공포와 전율을 수단으로 하여 융합이나 화합을 고려해보는 게 아닌가 말야. 서로 흘린 피가 양쪽에서 서로에게 접근하며 하나의 피로 합류한다는...... 


    다케다의 "화합"과 야나기타의 "교제", "사회적 기회". 다케다의 "공포와 전율"과 야나기타의 "애교". 다케다의 '하나로 합류하는 피'와 야나기타의 '화해의 잔 주고 받기'. 대련이 끝난 후 냉병기로 교전함으로써 문파들은 화해의 잔을 주고 받고 쉽게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며 평등하게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제국이란 그러한 화해의 잔 나누기 행사가 중첩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해의 잔 나누기 행사에서 중요한 것은 패자의 도량이다. 패자가 기꺼이 승자에게 원한을 거두고 마음을 풀어버리고 화해하기 위해서는 큰 도량이 필요하다. (물론 승자도 패자를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교제의 대상으로 여기기 위해서 도량이 필요할 때가 있다) 니체는 이 과정에서 발휘되는 패자의 정신적인 역량을 약자의 르상티망이라고 조롱했고, 동시에 인류의 가장 큰 악(그 악을 가장 잘 대표하는 민족이 유대인이라고 썼다)이 이 정신적 에너지에서 나온다고 경계했다. 그것은 그가 주로 기독교를 패자의 사례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자의 도량에 불필요한 의미부여를 제거한다면 우리는 야나기타처럼 보다 온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본래 싸움은 그와 같은 도량의 발휘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해온 평범한 전통과 사회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예수와 빌라도는 누가 이기고 졌다는 불쾌한 대결을 그만두고 서로 평등하게 교제하기 위해 화해의 잔을 나누는 의식을 치르지 못했다.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대신하여 기독교도들과 로마의 황제가 화해의 잔을 나누게 된 것은 4세기의 일이다. 이것을 양자가 서로를 이용하려는 이해관계의 문제로 환원할 수도 있겠지만, 야나기타의 시각에서 보면, 장기간에 걸쳐 양자의 싸움을 묵묵히 중재하고 말은 하지 않더라도 주의 깊게 화해의 기회를 바라고 있던 배후 사회의 평범한 힘이야말로 중요한 것으로 떠오른다. 그 평범함의 관점에서 보자면 권력기구가 기독교를 짓이긴 것과 기독교가 그에 처참하게 저항한 것도 "밥보다도 싸움을 좋아하는 남자"의 "애교"로서 인류의 "술기운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이고, "남녀노소가 구경"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싸울 만한 그 다음의 효과를 기대"했던 역사다. 화해란 일시적이며 가장된 것이고 누가 우위를 차지할 것이냐를 놓고 교권과 황권(혹은 왕권)이 영속적으로 투쟁했다는 관점은 야나기타가 배격하는 것으로, 그라면 도대체 그 모든 싸움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혹은 모든 것이 그저 '권력의지', "남자의 체면을 세우고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는" 천박한 이기주의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논의들이 비통에 빠진 채 고립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반문할 것이다. 기독교 고난사의 모든 봉우리와 골짜기들을 황폐하게 평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이 사대부의 독특한 '상민민속학'은 싸움의 승패, 권력의 유지 유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법가, 병가와 대립한다. 또한 그가 말하는 상민의 무의식의 전승을 도가적 자연으로 파악하는 것도 오해가 될 텐데,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은 그걸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지극히 높은 수준의 '인간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노노아와레를 중시한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노장을 그것과 구분하면서 가라고코로라고 비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장자는 분명 똥오줌에도 도가 있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야나기타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범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상민이라고 불렀다. 그 속에 깊이 파고 들어 민의 실정을 연구하는 것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황제(천황)의 관료이자 사대부의 한 유형이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도 유가적이다. 和를 강조한 것도 일본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유장儒将 오기의 "나라에 불화가 있으면 군사를 내서는 안 되고, 군사에 불화가 있으면 진영을 갖추어서는 안 되며, 진영에 불화가 있으면 전투에 나아가서는 안 되고, 전투에 불화가 있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린다. 야나기타는 교화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가 '옛날에는 이러저러했다'고 쓰고, 또 '이것을 밝히는 게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최근까지도 일본인들은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만큼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삼가고 또 삼가며 썼던 것은 물론 교화의 의지를 표현하는 그만의 문체였다. 

    야나기타학을 가령 마르셀 모스의 인류학보다 비과학적이며 내셔널리즘에 오염된 민속학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하루투니언은 야나기타가 일본이라는 원향을 실재하는 것처럼 썼다는 이유로 비판했는데 그때 그는 한편으로 야나기타와 유사한 인류학, 그리고 야나기타를 비판하는 자신의 비판적 인문학의 과학으로서의 권위를 긍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네이션으로서의 일본과 쇼와 정치사의 전개를 연결 짓고 있다. 나의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후자인데, 정치와 과학의 미분리가 왜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일본만큼 검증된 동네북은 1945년 이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투니언의 주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왔던 것이 문제의 핵심에 있다. 유학은 정치와 과학을 분리하지 않는다(서구인들은 자신들이 근대인이라고 믿으면서, 그리고 자신들은 이 양자를 홉스와 보일 이래 분리해왔다고 믿으면서 유학의 전근대성을 지적하고 온갖 문제가 그로부터 비롯된다고 증명하고 싶어한다). 야나기타는 유학의 계승자로서 학문을 했고, 그의 민속학은 사대부 경세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가 일본을 말한 것은 사대부가 천하를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일본을 천하라고 부른 일본 사대부들의 특수한 조건이 개입되어 있다. 쑨거는 틈만 나면 '중국의 민족주의'라고 서구인들이 부르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중국을 민족주의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같은 이야기를 일본에 대해 할 수 없다는 편견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중국 대륙의 비민족주의적(천하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중국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반대로 일본 열도의 민족주의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식인들의 비민족주의적(천하적) 측면에 대해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야나기타가 네이션이라는 "공동 환상"을 창출해냈다기보다는, 차라리 천하=열도라는 "공동 환상"을 창출해냈다고 말해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문혁 키드이자 손자병법의 최고 권위자 리링은 중국인의 특성 중 하나로, 군자보구십년불만, 원한은 반드시 갚으며, 갚을 때는 깡그리 죽여버려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갚는다(비례의 원칙이 작동하지 않음)는 점을 들고 있다. 척부인은 여후와 화해할 수 없었다. 사마천은 무제와 화해할 수 있었을까? 사마천을 주인공으로 어떤 중국 작가가 쓴 소설에서는 가상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사마천과 한무제는 마치 술 마시고 서로 앙금을 푸는 오랜 친구처럼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를 대등한 인간으로서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것은 등소평 이래 중국의 자본주의화, 서구화, 마오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인해 나타난 일탈, 반중국성에 불과한가? 굴원은 화해할 수 없어 멱라강에 몸을 던졌고 오자서는 화해할 수 없어 평왕의 시체를 채찍질했으며 명말청초 사대부들은 화해할 수 없어 자손들의 출사를 금했다. 한족 사대부는 청말이 되어서 군자보구십년불만을 외치며 멸만흥한을 실천했고 만주족은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어떻게 만주족과 한족이 대등하게 '화해의 잔을 나누는'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다케다 다이준의 처참한 표현대로 "서로 흘린 피가 양쪽에서 서로에게 접근하며 하나의 피로 합류한다"는 이미지가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우한 전역에서 중국 농부들의 목을 일본도로 내리치는 것, 반동분자로 몰린 교장을 묶어놓고 매일 고문하여 죽게 만드는 것이 '애교'일 수 있다는 것에 다케다나 리링이 동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두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의 무던함을 약간 과소평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해는 때로 투쟁보다 무시무시하다. 미시마三島由紀夫는 쿠데타군과 제국군 사이의 투쟁을 막기 위해 '둘 다 그만해! 이럴 바에야 내가 죽고 말지'라는 아침 드라마의 대사를 할복자살로 실천하는 인물을 <우국>에서 그렸다. 야나기타가 말하는 "쌍방에서 존경받고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재주 좋은 중재인"들이 얼마나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우며 끔찍한 존재들인지 마틴 맥도나는 <이니셰린의 벤시>에서 잘 그려내고 있다. '비 온 뒤 땅 굳는다'는 속담이 현실에서 실천되지 않을 때 작동하기 시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유언 무언의 압박은 자연재해처럼 거대하고, 멈출 수 없으며, 육중하다.  

    당초 오자서는 신포서(申包胥)와 친구였다. 오자서가 도망치면서 신포서에게 “내가 기어이 초나라를 엎을 것이다!”라고 하자 포서는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보존할 것이다!”라고 했다. 오나라의 병사들이 영에 들어왔을 때 오자서는 소왕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300번 채찍질을 가한 다음 그만두었다. 신포서가 산속으로 도망가서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그대의 복수가 이렇게 심하다니! 내가 듣기에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기지만 끝내는 하늘이 사람을 깨트린다고 했소. 그대는 과거 평왕의 신하로서 북면하고 그를 섬겼거늘 지금 죽은 사람을 욕보이니 천도가 없음이 어찌 심하지 않은가!”라고 했다. 오자서는 “나를 위해 신포서에게 사과하고 내가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이 멀어 뒤집힌 일이지만 오히려 행해야 했다’고 일러 주시오.”라 했다. 이에 신포서는 진(秦)나라로 가서 위급함을 알리고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신포서는 진나라의 궁궐 뜰에서 밤낮으로 통곡을 하는데 7일 밤낮 동안 그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진나라의 애공(哀公)이 이를 가엾게 여겨 “초나라가 무도하긴 하지만 이런 신하가 있으니 어찌 존속하지 않으리오?”라며 바로 전차 500승을 보내 초나라를 구원하여 오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야나기타가 열전식 역사서술을 싫어했던 것은 당연하다. "끝내는 하늘이 사람을 깨트린다"는 것은 결국 평범한 다수(중국에서 이는 종종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한다, "인민은 물이고 당은 물고기다")가 '많은 사람'을 이긴다는 것이며 "천도天道"란 '상민常民'의 도에 다름 아니다. 신포서에게 유자의 모습을 엿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싸움이란 화해와 교제의 확대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자서는 그런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자서는 평왕과 화해할 생각이 없었으며, 평왕 및 그 추종자들에게 자신과 화해할 생각이 들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 오자서를 '평범한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신포서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표하여(유자는 본래 '평범한 사람들'의 대표자인 것이다) 그들의 뜻을 행한 것일 뿐이다. "밤낮으로 통곡을 하는데 7일 밤낮 동안 그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야나기타의 평생의 작업은 결국 이 곡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그로 인해 오자서는 초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또한 태재 백비는 "오자서는 사람이 사납고 각박하고 잔인합니다. 그의 원망이 큰 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겁이 납니다"라고 하여 결국 그에 의해 오자서는 자결해야 했다. 사마천이 오자서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것은 당연하다. 사마천이라는 사람은 루쉰의 표현대로 글을 좀 안다고 남을 쉬이 업신여겼던 오만한 문인의 전형이다. 대학 수업에서도 어떤 학생은 자신이 글을 좀 많이 읽었다고 입이 근질거려서 참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공론을 논하지 않으면 속이 뒤틀려서 참을 수 없는 성격이 있다. 사마천은 바로 그런 성격으로서 언제나 비분강개를 간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히 천자 앞에서 토해낼 정도로 분란을 일으키는 지식인, 글로 법을 어지럽히는 유생의 전형(물론 본인은 황로사상을 더 좋아했다)이었다. 야나기타는 이런 분란 일으키기 좋아하는 오만한 지식인들을 혐오했다. 그가 문학을 그만둔 이유도 부분적으로 거기에 있다. 자유민권운동에 대해서도 그는 경멸해 마지 않았다. '그 시절 자유란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을 의미했다. 술을 먹고 가정집에 침입해서 난동을 피우던 사람이 지금은 자유 시대이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떠들어댔다'. 사화한 사무라이들이 자유민권운동을 한결같이 지지하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 것이다. 민권과 국권은 구분되지 않았으며, 신정부와 재야 민당의 입장 차이는 나중에 정리된 것만큼 커다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90년대 이래의 통설이다. 야나기타는 그 복잡한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메이지 일본의 신포서가 되고자 했다.


3.


    저우언라이가 중일 국교회복 회담에서 강조했던 것은 중국의 민중만큼이나 일본의 민중 역시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장강 유역에서 무수한 중국 농민을 상간시키고 불태워 죽이고 목 베 죽인 무수한 일본 병사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일본 전쟁 체험자들이, 중공 당국의 그 한마디를 얼마나 애타게 기대하며 공허하고 고통에 가득 찬 여생을 보내고 있었겠는가. 마치 잠수 이별을 당하고 패닉에 빠진 외로운 사람처럼, 그들은 마지막 싸움의 기억만을 간직한 채, 분명히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국 측으로부터 그 어떤 상호이해의 발언도 들을 수 없었다. 어떤 화해는 도저히 몇몇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의 모든 시기에 저류로 흐르며 결국 언젠가는 조상들의 바람을 실현시킬 것이다. 싸움은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가혹하든 간에 결국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국 그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의 한 표현이다. 싸움이 지배와 피지배를 야기하고, 패자를 노예로, 승자를 추악한 권력자로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이 반드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사고 방식을 리얼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겁 많은 식자들의 섣부른 판단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제국은(일본의 경우에도 중국의 경우에도) 결국 싸움을 거쳐 온갖 인간 집단의 평등한 교제와 상호이해를 확대해왔다. 야나기타는 이것을 칸트 식의 '자연의 간지' 같은 용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 점을 골짜기마다 퍼져 있는 무라村들에서 메이지 초까지만 해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흔한 일들을 통해 말한다. 야나기타는 결코 중국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중국을 잘 알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비판하는 측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가 진정한 '제국의 관료'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메이지 이래 일본에서 일본 '제국'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중국 '제국'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과연 피는 강물처럼 흐를 것이다. 모든 일본인이 중국인이 되지 않거나 모든 중국인이 일본인이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다케다는 그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태연히 바라볼 일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정말 태연히 바라본 적이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상기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까스로 자신이 걸을 길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 중의 평범한 사람, 오시마 다이준이 어떻게, 저우언라이의 그 한마디를 스스로 마음 속 깊이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다케다가 중일전쟁에 대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을 때 야나기타는 <선조 이야기>를 썼다. 상해에서 다케다가 멸망해가는 대동아의 꿈을 절망과 쾌락 속에서 무기력하게 향락하고 있을 때 야나기타는 묵묵하게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몰살에 대처할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는 죽었기 때문에 빌라도와 화해할 수 없었다. (다시 살아난 예수는 왜 빌라도를 찾아가지 않았나?) 척부인은 인간돼지가 되었기 때문에 여후와 화해할 수 없었다. 방효유는 일족이 몰살당했기 때문에 그와 명나라 황실의 화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유방은 항후를 죽인 후 후하게 제사 지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죽은 미국인은커녕 죽은 일본인을 제사 지낼 사람조차 몰살 당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집안 전체가 사라져갔다. 태평양에서 죽은 일본군을 누가 제사 지낼 것인가? 이들의 원한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미즈시 시게루처럼 군국주의에 대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안고 답답한 싸움을 반복하다가 죽어간 이들, 그 망자들의 싸움이 갖는 '평등한 교제'의 기능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인가? 야나기타의 답은, 그 망자들을 살아남은 자들의 양자로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제사 지내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망자들은 일본 땅에서 일본인들과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일본 열도와 일본인들이 그들과 화해의 잔을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야나기타는 생각했다. 그에 의해서 평등한 교제의 확대를 요구하는 망자들의 목소리가 활성화될 수 있다. <패전후론>의 저자가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야나기타를 전용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야나기타 역시 일본인들은 주제 넘게 조선이나 중국에 대해서, 혹은 미국에 대해서 이것저것 명령하고 요구하기보다 일본인들 자신의 앞가림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패전후론>은 창비주의자들이 부정한 일본군 사망자들을 복권하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완전히 요점을 벗어난 것이다. 그 일이라면 이미 저우언라이가 70년대에 했다. 그 발언의 중요성을 전후 세대인 <패전후론>의 저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케다와 다케우치가 왜 70년대 후반에 견디다 견디다 죽은 사람들처럼 죽었는지 그로서는 짐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군 사망자들은 창비주의자들과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중국군, 미군과 싸우다 죽은 것이겠지만, 그 이전에 일본 정부와, 일본 군대와, 상관들과, 선임들과, 제국군의 악폐습들과, 자식을 군대로 보내는 부모 친척들과, 이웃의 군국주의자들과, 친구들의 피어프레셔와, 그 모든 것에 엉성한 반항의 틀 밖에 제공해주지 않는 다이쇼 교양주의의 형편없음과, 죽음의 이유를 설명해줄 수 없는 일본 제국 70년이 축적한 인문사상의 빈약함과, 중요할 때는 모습을 감추고 침묵하는 천황의 그늘진 얼굴과, 아시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갖고, 국가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명예를 빛내고 수치를 피하기 위해, 민족과 동종동문의 아시아 동포들을 위해 버티고 또 버텼고 싸우고 또 싸웠다. 야나기타가 45년 공습으로 불타는 열도에서 묵묵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 싸움의 의미였다. 그는 절망하지도 않았고 히스테리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향락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전쟁의 공포와 잔혹함에 무지했으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온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오자서로부터 몸을 빼낸 신포서와 같이, 자신의 행운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하여, 밤낮을 곡하듯이 글을 써서 <선조 이야기>를 탈고했을 것이다. 

    중국의 무술은 대련이 끝난 후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화해의 술잔을 교환하는 평등한 교제의 확대로 귀결된다. 그것은 동시에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바로 그것을 가리킴에 다름 아니다. 


      

[1]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45년 전후 중공의 승리에 의해 만들어진 '중공 사관'이 지금까지 중국에 대한 전 세계 인민들의 인식을 깊고 넓게 규정하고 있다. 마오쩌둥과 홍군의 파르티잔 신화는 신중국의 국체 이념이었다. 칼 슈미트에서부터 영미의 중국통들, 유럽과 아시아, 제 3세계의 좌파들에 이르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 동방의 새로운 국체론을 한 목소리로 인정하고 재생산했다. 문혁 당시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의 유사 내전 상태가 대미 전쟁을 위한 중국식 대비 태세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미국의 유사 내전 상태가 새로운 세계 대전을 위한 미국식 대비 태세라는 인식과 다르지 않다. 오늘날 원로급이 된 중국의 문혁 세대가 등소평 이래 마오주의에 대한 휴머니즘적 수정이 과도하지 않게 되도록 적절히 개입하는 과정에서 '중국성'의 정치군사적 partisanship을 강조해온 것은 자연스럽다.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칭송하는 '신국학'이라는 계통이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마오주의나 홍군 신화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중국론의 새로운 지도방침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2]

 야나기타가 유가적이라고 썼는데, 그는 형이상학(문학)을 배신하고 전향하여 실사구시, 격물치지로 나아간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격물치지와 자기수양 중 전자를 극대화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초강목>이 그렇듯이 주자학이라는 본사의 여러 계열사 중에는 언제나 그런 '原민속학' 내지 '原인류학'이 존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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