雑賀博愛,『杉田鶉山翁 再版』1929, 563쪽 이하
나는 민권자유를 위해 시종일관 힘을 기울여왔다. 나의 행로는 크게 나눠보자면 국내에서는 민권자유를 확립하고 그에 기초하여 헌법정치를 시행하고 책임내각제도를 수립하는 데 힘썼다. 밖으로는 아시아의 자유, 독립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힘을 다했다. 따라서 항상 나의 주안점은 군사와 외교에 있었다. 청불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이대로 방임한다면 지나대륙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각국에 분할되어버릴 것이 틀림없다. 일본과 지나는 동문동종으로 입술과 이빨, 바큇살과 수레처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지나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절개와 의로움이 있는 일본인으로서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동양의 가리발디가 될 결심으로 만리 파도를 넘어 지나로 건너갈 생각을 했다. 이때 일본인 된 자는 마땅히 크게 동양자유를 위해 분기해야 할 시기라고,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방문해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던 일도 있다. 그때 이타가키는 "스기타 군의 큰 얘기가 또 시작됐구만" 하며 웃었다. 나는 그러든말든 기죽지 않고 동양의 자유를 논했다. 그때 이타가키는 "동양의 자유도 물론 확립해야겠으나,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일본의 자유를 확립하는 거야. 우리 발등의 자유도 제대로 서지 않았는데 외국에 손을 뻗은들 결국 충분히 일이 될 수가 없어"라는 의견이었다. 나는 "국내는 국내, 외국은 외국이다. 국내의 자유확립에 적당한 사람은 따로 인재가 있을 거야. 이미 동양의 자유가 구미에게 유린되려 하는 이상 나는 크게 이 상황에 뛰어들어 지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논하고 드디어 청나라로 건너가는 길에 올랐던 것이다. 지나에 가보니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지경이었다. 인민은 자기들 나라가 외국인에게 빼앗기려고 하는데도 완전히 남일처럼 마이동풍,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관리들은 독립의 기상도 없고 그 내부사정은 몹시 부패해 있었다. 이대로 방임한다면 구미에게 빼앗겨버릴 것은 일목요연,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나카에 조민, 구리하라 료이치 등은 "어차피 구미에 빼앗길 거라면 일본이 빼앗아버리자"고 의논했다. 그 중에는 "일본 내지에서 꾸물꾸물 삿쵸에게 당할 바에야 대륙에서 국사범이 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구리하라 료이치가 말하기를 "제군들은 네즈미코조(鼠小僧)를 아는가. (...) 네즈미코조는 일본의 작은 도둑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의기는 볼만한 점이 있다. 우리는 지나라는 나라를 훔쳐보지 않겠는가. 그러다 발각되어서 일이 틀어지면 지나의 커다란 하늘 아래 네즈미코조의 의기를 모여주는 것도 또 통쾌한 일 아닌가."라고 했다. 지나에서 네즈미코조가 된다니, 몹시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모두가 찬성이었다. 나카에 조민은 한문을 잘 해서 문장이 뛰어났다. 그래서 나카에 조민이 말하기를, "나는 지나에 가서 문장을 써서 사백여주를 붓 끝으로 취할 작정이다. 지나는 옛날부터 문장의 나라다. (...) 일본인은 한문은 읽을 수 있지만 지나인을 놀라게 할 정도의 문장은 쓴 게 없다. 문장을 쓸 수 없거나 문장이 별로여서 지나인으로부터 경멸을 당해왔다. 나는 지나에 가서 명문장을 써서 그들을 굴복시키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나카에가 말하기를 "스기타군, 자네는 가서 지나의 한 쪽에서 왕을 해라. 나는 왕은 싫다. 문장으로 지나 4억 인민을 순식간에 문명인으로 만들어보이겠다"고 했다. 진심으로 그럴 작정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오늘날에 돌아보자면 어리석은 이야기라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우리는 아무튼 진심으로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