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 파던 날

조무래기들의 대오

by 강쌍용



칡 파던 날



원동을 지나 삼랑진으로 곧장 넘어가는 1022번 지방도는 생각보다 가파르고, 구불구불해서 운전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산세도 그렇거니와 낙동강을 끼고도는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자칫 한눈팔다가 큰 실수를 할 수 있다.

나목이 즐비한 겨울 산은 을씨년스러워도 단순하고 정제된 모습이 언제 보아도 좋다. 더군다나 강변 철로와 어우러진 한낮의 윤슬은 시선을 빼앗아 가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주말이면 마치 정례화된 것 같은 무작정의 드라이브는 일상의 지친 마음과 몸을 풀어주는 청량제와도 같다. 무작정이라고 하지만 사실 목적지는 대략 정해두고 가는 편이다.

오늘은 가볍게 삼랑진으로 해서 밀양을 지나 청도까지 다녀올 생각이었다. 산을 넘어가는 이곳 구도로의 수려함은 여느 곳에 비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렇게 붐비는 길이 아니라서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 수 있다.

원동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반쯤 내려갔을까? 삼랑진 초입에 전망대라고 적인 표지판이 보였다. 뒤로 차 몇 대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있고, 그 안쪽으로 작은 포장마차가 서넛 자리 잡고 있었다.

안 그래도 멀리 산 중턱에 있는 하얀 건물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런 곳에서 잠깐 입맛을 다시는 여유도 여행의 즐거움이라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외진 곳이라 번잡하지 않아 더 좋았다.

궁금한 것도 물어볼 겸 잠시 차에서 내렸다.

얇은 널빤지에 유난히 붉은 "생 칡즙"이라는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시지 않겠다는 아내를 겁박해(?) 두 잔을 주문했다. 손님이 한참 뜸했던지 호의가 지극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린 날 칡 파던 날이 살며시 떠올랐다.




큰일을 앞두고 전의를 다지는 조무래기들 준비가 소란스러웠다. 문드러진 삽과 호미 그리고 괭이를 챙겨 넣은 자루에 낫과 톱을 같이 담았다.


"가자!"


형아(형님)가 자루를 어깨에 훑여 매고 나서자 조무래기들이 뒤따랐다.


“남의 밭을 함부로 파헤치면 못쓴다.”


걱정돼서 타이르는 어머니의 당부를 근성으로 흘려들었는지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삽짝을 나섰다.

해풍에 키를 낮춘 청보리밭을 가로지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몇 바퀴씩 예사로 굴렀다. 파란 양탄자를 펼친 듯한 보리밭을 몸 풀듯이 삐 대고 다니면 놀란 꿩이 후드득 달아났다.

몰려간 언덕배기에는 이미 칡을 파냈던 구덩이가 군데군데 널려있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칡은 고구마와 함께 겨울나기에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먼저 적당한 칡넝쿨을 찾아야 했다. 흔한 게 칡넝쿨이지만 마른 잎을 보고 줄기가 실한 놈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찾아서 헤매다 보면 어머니가 당부한 말은 어느새 안중에 없었다. 밭 언덕이 그저 만만하니 헤집고 다니기에 편했다. 운이 좋은 날이 아니면 제대로 된 대물을 찾는데 거의 한나절을 보낼 때도 있었다.

적당한 넝쿨을 찾으면 우선 낫으로 줄기를 쳐내고 자리를 잡았다. 괭이와 호미로 땅을 파기 시작하면 성급한 녀석들은 멋대로 칡의 상태를 가늠했다. 팔뚝만 할 것이라 지레짐작하는가 하면 '가래 칡이다.' '나무 칡이다.'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옆으로 뻗은 칡은 괭이질이 한결 수월했지만 아래로 내린 칡은 애를 먹었다. 뿌리가 어디로 뻗었든 굵은 가래 칡은 힘이 났다. 엷은 가루에 배인 씁조룸한 맛이 일품인 가래 칡은 그래서 인기가 좋았다.

이에 비해 나무껍질처럼 단단한 나무 칡은 씹기가 여간 어려울 뿐 아니라 쓰고 맛이 없어 대부분 외면했다. 이때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서둘러 다른 곳을 물색했다.

어느 정도 칡뿌리를 팠다 싶으면 우러러 몰려들어 있는 힘껏 칡을 당겼다. 구령에 맞춰 용 껏 힘을 쓰다가 칡뿌리가 떨어져 나가면 서너 걸음 뒤로 나 자빠졌다. 인정사정없이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래도 손에 잡힌 전리품 때문인지 아픈 줄 몰랐다.

칡을 파낸 구덩이는 다시 고르게 메웠다. 마른 가지를 깔고 솔잎을 덮으면 금세 까치집 같은 보금자리가 되었다. 가져온 실톱을 쥔 녀석이 칡을 반 뼘 크기로 일일이 잘랐다. 그렇게 자른 칡은 입으로 찢기에 편했다. 어거정 거리고 씹다 보면 입술이며 혓바닥이 까맣게 변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마주 보고 웃었다. 혀가 날름거리는 입천장에는 송진 같은 누런 녹말이 덕지덕지 붙었다.

칡을 씹으며 바라보는 남쪽 바다는 푸르고 넓었다. 봉분처럼 엎어진 삼 형제섬이 수평선에 걸터앉아 귀를 열고 이쪽으로 쫑긋했다.

아이들은 도회지에 갔다 온 이야기며 만화 속 주인공을 들먹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은 여태껏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상상 속의 그곳을 시샘했다. 그러다 시샘은 곧 동경으로 변해 하늘로 훌훌 날았다.

돛배를 타고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 동경의 세상을 아이들은 칡을 씹으며 마음껏 떠다녔다. 그곳이 어디든 다다르고 싶은 섬 아이들의 눈망울에 사철나무보다 푸른 물빛이 아른거렸다.

방금까지 비추던 햇볕이 산꼭대기에 걸려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만 내려가자!"


형아의 아쉬운 부추김이 잠시의 공백을 깼다.

대오를 지은 조무래기들이 좁은 밭길을 따라 내려왔다. 구름에 가린 옅은 햇살이 등 뒤를 비추었다.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한 손으로 붙든 막내 녀석이 바빴다. 따라가기 힘들었는지 숨소리가 쌔근쌔근했다.


1620321748937-12.jpg?type=w773


실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는데 어느새 칡즙을 들고 나온 주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저기, 천태산에서 직접 팠습니다."


설레발치는 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참 많은 세월이 흘렀구나! 먼저 한 잔 들이켰다. 씁조룸한 맛에 그때 따라다니던 조무래기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질긴 칡처럼 열심히 살고 있으리라 여겼다.

진작 궁금했던 것은 물어보지 못한 채 다시 차를 몰았다. 이렇게 삶은 늘 예기치 않은 일로 시행착오를 거듭한다고 생각했다. 잠시 입맛을 다셨다.

멀리 왼편으로 유유한 낙동강이 심한 가뭄 탓에 잔뜩 수위를 낮췄다.

한잔 칡 때문인지 한결 운전이 수월했다.




이전 08화달집 태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