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코리아의 다른 뜻

by 박정훈

홀아비 미국 대통령은 맘에 두고 있는 여인을 백악관에 초대해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준다. 그러던 중 역대 대통령들이 사용한 도자기들을 전시한 곳으로 인도하면서 하는 말이 “This is the dish room.”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살짝 웃으면서 이렇게 정정해준다. “It’s the china room.” 롭 라이너 감독의 영화 <대통령의 연인The American President>에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식기로서의 접시류는 dish라고 하지만, 실용적인 면을 포함해 그 외의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것들은 소문자 c로 시작하는 china라고 한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고유명사, 특히 국가명을 소문자로 시작하는 보통명사로 삼는 경우가 하나 더 있다. 위에서 언급한 china가 그렇고 japan도 그렇다. 명사로는 ‘옻’ ‘옻칠’이다. china와는 달리 동사 및 형용사로도 사용한다. 동사로 하면 ‘옻칠을 하다’, 형용사로 하면 ‘옻칠을 한’ ‘칠기의’ 뜻이 된다. (물론 china를 동사나 형용사로 활용한다 해서 어법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china 동사: 도자기를 빗다 / china 형용사: 도자기로 된, 자기로 만들어진.) 일본에서 서구로 건너간 것들 중 가장 먼저 도착했거나, 제일 매력적으로 보인 물건이 칠기였는가 보다. 아마도 무역항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을 법하다. “마감이 색다른 이 진기한 물건이 뭐죠?” “모르겠는데요. 그냥 일본에서 온 거 말고는.” “그럼 당분간 일본이라고 불러야겠군요.” 그러고보니 china도 japan도 모두 그릇의 종류라는 게 흥미롭다. 유럽인들에게 으뜸으로 각광받은 동아시아 수입품이 그릇류였다는 뜻이겠다.


유감스럽게도 소문자로 시작하는 korea나 corea는 없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유럽과의 교역에 늦게 혹은 소규모로 뛰어든 탓일까. 고려청자와 나전칠기를 중국이나 일본의 것들과 따져보자면 그 이름을 선취 당한 게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단어를 새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소문자로 시작하는 코리아 말이다. 세계 곳곳에서 한류가 유행하고 있는 지금, 바다 밖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아니면 가장 강렬한 한국의 이미지는 뭘까? 달리 말해 Korea를 korea로 한다면 어떤 의미를 부가할 수 있을까? 아주 먼 옛날 중국인들이 사서에 기록했듯이, 그리고 지금 많은 세계인들이 다양한 매체로 기록하고 있듯이 군무나 가창이라 하면 어떨까? 가령 korea 명사: 군무 / 동사: 군무를 (잘) 하다 / 형용사: 군무에 뛰어난. 아니면 korea 명사: 가창 / 동사: 노래를 (잘) 하다 / 형용사: 가창력이 뛰어난. 군무와 가창에 고개가 끄덕여지더라도 중국과 일본의 것처럼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어서 뭔가 아쉽긴 하다. 바로 딱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니 그만큼 손에 꼽을 만한 물품이 없다기보다는 내가 그만큼 우리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뜻일 게다. 아쉬워해야 하는 건 바로 이 점일 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집과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