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타 소리가 귀에 거슬린 지 며칠이나 되었다.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나, 혼자 중얼거리다 메고 있던 기타를 스탠드에 걸어 두고선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오늘의 날씨를 살펴본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삼각산을 바라본다. 산도 빤히 날 보고 있는 듯하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부르고 있는 듯하다. 그 눈맞춤과 손짓과 부름에 서슴없이 응답하기로 한다. 다녀오면 좀더 고운 소리가 나오려나. 지금의 나와 다른 내가 되어 있으려나. 이런 기대를 품었다 이내 내보내며 배낭에 물통을 집어 넣는다.
정릉 들머리가 가까워지니 ‘입산’과 ‘등산’이란 글자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다. 두 단어는 거의 같은 뜻인 듯해도 사용처가 엄연히 다르다. 가령 ‘입산금지’를 ‘등산금지’라고 하면 어딘가 어색하며, ‘등산용품’을 ‘입산용품’으로 바꾸면 역시 뭔가 부자연스럽다. 일상에서 굳어진 두 단어의 개별적 사용처는 아마 산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마음의 방향이 단어의 갈래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등산. 산을 오른다는 표현에는 산을 발 밑에 두고 정상을 향해 간다는 목적지향적인 어감이 있다. 성취감을 위해 오른다는 느낌도 든다. 반면 입산, 산에 들어가다라는 말에는 산속으로, 산의 품으로 내가 들어가 산에 내 자신을 내맡기고 잠시나마 머무른다는 어감이 있다.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목적 없이 노닐러 들어가는.
입산이란 표현에는 도를 닦기 위해 속세를 떠나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다라는 의미도 덧대어져 있다.* 신명이 강림하는 곳이라 불리는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조차도 얼마의 교통비를 지불하고 얼마의 발품을 팔면 누구나 쉽게 당도할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산은 여전히 자신과 속세를 단절해주는 별천지로 남아 있다. 이런 문화적 유전자의 발현으로 나 또한 마음을 다스리려 산을 그리워하고 기꺼이 몸을 들여놓는 게 아니겠는가.
겸재의 그림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을 바라본다. 단발령. 금강산에 이르는 첫 고개로, 여기서 금강산을 바라보면 속세를 뒤로 하고 머리를 깎게 된다 하여 붙은 지명. 그림 속 아득한 곳의 몇 사람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 속에 푹 잠겨 있는 것인가. 그 인물들에게도, 이들을 산속에 심어둔 겸재에게도 산은 올라야 할 대상이 아니라 품속으로 들어가 안겨야 할 합일의 모체였으리라. 이 작은 화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여백은 승과 속을 나누는 무한의 거리. 구름과 안개에 가려 다리는 보이지 않지만 두려움 없이 첫발을 내딛을 때 둘 사이를 잇는 좁은 길이 밝아지리라. 다리 건너 금강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 그때에야 비로소 승과 속이, 산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불이문不二門에 당도하게 되리라.**
엊그제 내린 비를 싣고 속세로 향하는 물의 속도가 무심하다. 한층 더 맑아진 대기를 타고 내려오는 햇살에 초록빛이 나긋하다. 점차 달궈지는 호흡과 체온을 달래주는 바람이 환하다. 이렇게 삼각산이 날 받아준다. 나도 산을 힘껏 들이마신다.
* 일본어와 중국어에도 ‘입산’의 이러한 뜻이 있다. 흥미롭게도 영어에 산중의 수도자mountaineering ascetic라는 단어가 있다. 물론 이 단어의 원형에 해당하는 동사 mount에는 ‘오르다’라는 뜻만 있고 ‘들어가다’라는 뜻은 없다.
** 산에 들어서 사찰 경내로 들어가려면 보통 네 개의 문을 통과하게 된다. 순서대로 일주문-금강문-사천왕문-불이문(해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