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달개비 도라지 개미취 패랭이 민들레 맨드라미 오이 가지 수박 원추리 땅꽈리 양귀비 여뀌 어숭이 봉선화. 나비 방아깨비 개구리 쇠똥벌레 사마귀 메뚜기 여치 풍뎅이 잠자리 벌.
사임당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꽃 풀 야채 과일과 곤충들이다. 그림의 소재로는 소박하다면 소박하달까. 물론 사임당 당시 문인들이 즐겨 그린 매란국죽 및 산수와 비교하자면 그렇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재가 소박하다기보다는 인간이 덧씌운 의미와 상징이 소박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실로 사임당이 사대부의 전유물로 여겨진 산수, 사군자에 관심이 적었다든가 그릴 만한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안견의 산수화를 모사한 그림이 지극히 신묘하다고 한 아들 이이의 기록이나, 난초화가 오행의 정수를 얻고 천지의 융화를 모아 참다운 조화를 이루었다는 송시열의 글을 들춰 보자면 사임당을 그저 풀과 곤충 등 소박한 것들을 잘 그린 여류화가라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남아 전해지는 사임당의 작품들은 <초충도>와 이처럼 뜨락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 자연을 그린 부류가 대다수이다. 우리 옛 그림을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사임당의 예술성을 존경하는 후인으로서 어찌 아쉬움이 없지 않겠냐마는, 사임당의 사군자와 산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그의 풀과 벌레의 그림이 소위 선비들의 품격을 표상했다 하는 사군자와 산수에 전혀 덜하지 않은 때문이다.
추위를 무릅쓰고 꽃을 피워 올리는 매화만큼이나 겨울이면 땅속에서 죽은 듯 잠들어 있다가도 여름이면 비탈진 곳에서도 움을 틔우는 봉숭아꽃의 미덕이 아름답다. 깊은 산중에서도 은은한 향을 멀리 보내는 난초의 고고한 자태만큼이나 생명을 유지하고 잇기 위해 제 몸보다 큰 것을 수고로이 옮기는 쇠똥구리의 뒷발질이 우아하다. 사군자가 선비 정신의 사의寫意이고 산수가 자연의 표상이라면 가녀린 꽃과 풀에도 천지 운행의 손길은 한결같으며, 작은 곤충들에도 존재의 의미는 그득하다. 이 모두가 어우러진 뜰 안 작은 공간은 생명의 경이와 원리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즐김과 배움과 깨달음의 터이다. 그 터에서 격물치지를 궁구한 이에게 화초의 가치와 매란국죽산수의 가치는 차등이 없을 것이며, 인간의 정도와 곤충의 정도에 경중이 없을 것이니 좁은 뜰을 거대한 자연의 은밀한 뜻으로 삼아 뭇 존재들의 형상을 스스로의 뜻으로 옮긴 사임당이야 말로 군자 아니겠는가.
산책길 듬성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잠시 앉아 군데군데 핀 갖가지 꽃과 풀의 살랑거림을 바라본다. 그 사이사이에 홀로 또는 무리 지어 움직이는 벌레들의 부지런함도 더불어 보인다. 무질서한 듯하나 나름의 질서를 갖고서 작은 생태계를 운영하고 있는 저들의 세계가 내가 속한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굳게 이어져 있음을,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홀연 감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