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백제본기’ 편에서 유독 눈길을 머물게 하는 한 단어가 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것. 검소함과 누추함 사이에 있는 그 무엇. 검이불루 네 글자를 품고 있다가 붓끝에 새겨 처음으로 종이 위에 내려놓은 이는 백제의 무엇을 체험했던 것일까. 그 네 글자를 읽을 후대의 누군가들이 백제의 무엇을 봐주기를 바란 것일까.
브람스 말년의 작품인 클라리넷 소나타와 비올라 소나타를 들을 때면 검이불루 네 글자가 머릿속을 떠다니곤 한다. 작품의 선율이나 구성보다는 클라리넷과 비올라가 품고 있는 고유의 음색 덕이다. 플루트처럼 티 없이 맑고 여리거나 트럼펫처럼 박력 넘치고 민첩하지 않은 클라리넷. 바이올린처럼 한없이 위로 향하거나 첼로처럼 마음을 부여잡고 심연으로* 내려가지 않는 비올라. 탁한 음색과 억눌린 음량의 클라리넷, 그리고 수수한 음색과 양가적 음역대의 비올라. 스스로 창작력의 고갈을 감지하고 평범한 나날 지내던 브람스에게 창작의 불꽃을 다시금 피어 오르게 한 고요한 충동의 소리들. 평생 감정의 범람을 삼가했던** 브람스로 하여금 ‘정열적으로appassionato’라는 악장 지시어를 사용하게 만든, 정열을 내면에서 삭이고 있던 악기들.
노년의 브람스가 클라리넷과 비올라에게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화려하게 자신을 뽐내는 악기가 아니라 검소하게 드러나지 않는 듯 드러나는, 누추하지 않게 드러나는 듯 드러나지 않는 절제의 미덕 아니었을까. 검소함과 누추함이라는 두 무게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게 나란히 받치고 있는 중용의 분투 아니었을까.
지금의 우리가 백제의 검이불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이름없는 손들이 만들어 낸 유물들뿐이다. 하지만 검이불루 네 글자를 그러모아 하나의 의미로 삼게 한 것은 백제의 어떤 음악 아니었을까. 어느 늦가을, 조금은 먼 데로 가고자 다다른 부여박물관에서 금동대향로를 마주한 후 든 생각이었다. 봉황의 높이와 용의 깊이 사이 우뚝 솟은 수미산에 참선하듯 앉아 있는 다섯 악사들이 하늘로 피워 올린 소리의 향響 혹은 향香.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줄곧 브람스의 클라리넷 소나타와 비올라 소나타를 기억하려 했다. 기억 속의 연주는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순서가 뒤엉키기도 했으나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음색만큼은 짐짓 애쓰지 않아도 넉넉히 떠올릴 수 있었다.
* “나는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상처가 나의 무덤이 되었다 / 검은 나무에 다가갔다 / 첼로의 가장 낮고 무거운 현이 가슴을 베었다 / 텅 비어 있었다 / 이 상처가 깊다 / 잠들지 못하는 검은 나무의 숲에 / 저녁 무렵 같은 새벽이 다시 또 밀려오는데” 박남준,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중에서.
** 브람스의 작품엔 ‘지나치지 않게non troppo’라는 지시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