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로 지붕을 삼은 그럴싸한 한옥도, 자자손손 물려줄 저택도 아니거니와 내가 사는 곳에는 이름, 즉 당호堂號가 있다.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 살고 있는 낙산 자락 한 귀퉁이에 이사오면서 내가 붙인 것이다. 소사헌素絲軒. 흴 소, 실 사, 집 헌. 흰 실의 집, 소사헌. 현판은 없다. 걸 데가 없는 데다가 글씨를 받아서 새길 만한 형편이 아닌 때문이다. 대신 맘속으로 전서로도 달았다가 예서로도 했다가 해행서를 섞어 써보기도 하고, 광화문이나 다산초당의 현판처럼 집자集字한 것으로 만들어 보기도 한다. 당호가 있는 덕에 내 호는 자연스레 소사헌주인이 되었다.
소사라는 단어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자墨子 언행의 기록인 『묵자』 중 「소염편所染篇」에서 빌렸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해 말하기를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다르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에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빈 서판[tabula rasa]처럼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아 오히려 어느 색에도 쉽게 물들 수 있는 흰 실이기에 늘 주의해야 하지만 세상사 어찌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묵자는 좋은 것에 물들어야 함을 역설했다. 묵자의 소염론은 오래 지속되는 울림이었는지 기원전400년 사상가의 말이 기원후 500년의 『천자문』에도 등장하기를, 묵비소염墨悲絲染,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슬퍼했다.
소사헌을 당호로 삼은 것은 여러 사상가들 중 묵자를 특히 사숙해서는 아니다. 또한 그의 소염론에 남다른 감화를 받아서도 아니다. 그저 흰 것을 좋아하는 굳어 버린 버릇이랄까 성향을 소사라는 두 글자 뒤에 앉히고 싶었을 따름이다. 순수 정화 생명 등 흰색에 덧입혀진 의미들에도 마음은 기울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형이상학적인 이유가 내게 없다. 그저 흰 것을 희게 유지하는 데 드는 노력이 좋고,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과 인간에 의해 점점 애초의 색깔을 잃게 되는 그 불가항력을 순순히 받아들일 따름이다. 체념이 아닌 포용. 멀리 보면 참 부질없는 노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찌 하든 결국 고유의 빛을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 그럼에도 그 덧없는 애씀을 변함없이 지속하는 건 그것이 바로 오늘 하루를 이루는 귀한 소재가 된다고 믿기에.
차디찬 투명의 바람이 불던 어느 겨울날 저녁, 맑은 차를 사이에 두고 존경하는 노스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불쑥 왜 흰 것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 평소의 생각을 들은 후 그는 그럼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보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내가 지금 머무르는 곳 어디이기에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걸까. 한 발 더 나아간 곳은 어디일까.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그 미지의 것을 따라 간 미지의 곳에선 흰 것에 대한 내 마음의 지형이 밝게 보이려나. 그땐 소사헌이라는 이름을 이 집에서 내려놓아도 좋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래도 좋을 것만 같다. 그 이후의 당호는 아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