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방에 슬쩍 들어가 말을 건네봤다. 요즘 들어 부쩍 자기 이야기를 안 하는 딸이다.
지난번 어떤 남자아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걱정되는 마음에 "나중에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라고
모질게 말했던 게 화근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한 말도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이후 딸은 "다시는 엄마한테 내 얘기 안 할 거야"라며 입을 닫았다. 집에 오면 아이패드만 보거나
친구들과 카톡만 한다. 나에게 하는 말은 고작 "돈 좀 보내줘" 정도다. 한소리 하면서 돈을 보내주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끈이 이어져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웃음이 난다.
그런데 요즘 마음이 좀 풀렸는지, 딸이 친구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한다. "그 친구에게 남자친구 생겼는데 너무 잘해준대. 근데 고3이라 1년 동안은 안 만나기로 했대." 부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 친구가 그 남학생을 알게 된 계기가 학급 일로 학년 선배에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부터란다.
듣다 보니 웃음이 났다. 나랑 똑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남편을 만난 것도 뭔가 필요한 부탁이 있어 연락한 게 시작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연락을 안 했다면, 우리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라도 생겼을까? 엄마 연애사를 듣던 딸은 "엄마랑 내 친구 상황이 똑같네" 하며 신기해한다. 그 덕분에 나의 연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사실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연애 하수'의 이야기다. 나는 짝사랑을 오래 했고, 남들이 말하는 진한 아픔이 있는 연애 경험도 없다. 고미숙 작가님의 말처럼, 짝사랑만으로 끝난 건 어쩌면 '안 될 인연'이었기에 그랬던 걸까.
지금의 내가 20대가 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아마 그때보다는 연애를 좀 더 해보고 싶을 것 같다. 물론 책을 더 읽고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긴 하지만.
60세가 넘어서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려는 내 모습이 가끔 기특하다.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실력이 훨씬 좋았겠지만, 더 늦기 전에 시작했으니 잘했다고 스스로를 토닥여 본다.
사랑, 그 뜨거운 감정.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현실이 늘 발목을 잡지만, 순수한 사랑의 느낌은 오래도록 기억되니까.
지금은 살이 빠져 왜소해진 남편이지만, 연애할 때는 어깨가 그렇게 넓어 보였다. 처음 우리 집에 방문했던 날, 조심스럽게 서로를 안았던 그 짧은 순간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뒤로 밀려온 건 후회와 두려움이었다.
"난 크리스천인데, 결혼도 하기 전에 이 일이 알려지면 어떡하지? 교회를 떠나야 할까?"
절망적인 마음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관계를 어떻게 할 건지 물었다. 괴롭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때 남편은 투박하지만 묵직하게 대답했다.
"내가 책임질게. 우리 결혼하자."
그 한마디에 엉켰던 실타래가 풀리듯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오랫동안 결혼을 놓고 기도할 때는 좀처럼 안 풀리던 일들이, 그 믿음 하나로 신기하게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간절했던 기도가 응답받는 순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남녀 간의 사랑은 결국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다. 너무 거룩하고 교과서적인 대답 같지만,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 마지막까지 남는 온기는 결국 '이 사람은 나를 놓지 않는다'는 단단한 믿음이었다.
딸아이가 앞으로 만날 사랑도 그랬으면 좋겠다. 뜨겁게 사랑하되, 그 뜨거움 너머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단단한 신뢰를 배울 수 있는 그런 사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