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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그릿 박종숙 Jan 13. 2023

말실수

지금 그 언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36년 전 그때의 일이 지금도 주홍 글씨처럼 마음에 새겨져 있다.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에게 나의 말실수로 상처를 주게 된 일이다. 그 시절이 이토록 선명한 것은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지금 그때의 일을 잊었을까!!


영어영문학과를 전공한 나는 중등교육과정도 함께 이수를 했다. 대학 졸업반 때 모 중학교에 교생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비록 교직의 길로 가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선생님이 되리라는 벅찬 포부를 안고  떨리는 마음으로 모 중학교에 갔다. 내 모습은 양장점에서 맞춘 정장 복 차림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껏 멋을 부렸다. 첫날 배정을 받은 교생들은 함께 모여서 교무실로  갔다. 지나가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난 듯 힐끔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먼저 교감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침조회시간에 선생님들 앞에서 인사를 했다. 그다음 학년별로 적절하게 맡을 반을 배치시켜 주셨는데, 난 1학년 반에 배치되었다. 담임선생님을 따라 반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반겨주었다. 선생님은 멋지게 나를 소개해 주셨고, 첫 교생실습이 시작되었다.  담임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열심히 배웠고 아이들의 수업을 뒤에서 도왔다. 청소와  종례시간에는 교생인 내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낯익어 보이는 선생님이 내게 찾아와 친구의 이름을 대며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친구의 언니였다. 아주 친한 친구는 아닌 데다 외국에 나가 있어 연락은 못했지만, 친구의 언니라는 자체만으로 금세 간격이 좁혀졌다. 그녀는 정식교사는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일 잘하는 선생님으로 인정을 받아 계약 기간이 연장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녀는 나를 동생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아이들도 잘 따랐고 담임선생님도 나를 믿어주셨기에 그때를 기억하면 즐겁다. 우리 때만 해도 여전히 선생님은 하늘이었기에 선생님과 함께 가르치는 이일에 교사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교생실습이 끝나갈 무렵 교생들의 수업시연이 있다. 교감선생님을 위시한 선생님들을 모셔놓고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수업시연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지만 아이들도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부모님과 친구들을 영어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니 아이들에게 가족들 사진을 준비해오라고 했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영어로 소개해 볼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모두 손을 들었다. 한 아이가 선택되어 나왔다. 그런데 그 학생이 영어로 자기 가족 소개를 멋지게 해냈다. 큰 도화지에 가족들 사진을 붙이고 영어로 소개를 하는데 어찌나 잘하는지 놀랠 정도였다. 그 학생 덕분에 평이할 수 있는 수업이 완전 성공적으로 끝났다. 교감선생님과 참석한 선생님도 흡족해하셨다. 교생실습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생겼다. 친구 언니와 친하게 지내다 보니 서로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그 이야기 중에는 우리 과 선배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영문과 선배였던 그녀는 예쁜 데다 남자한테 인기도 많았고, 공부도 잘했다. 그런데 남자친구와 오랜 사귀다 보니 두 사람이 깊은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나 보다. 사실 학교 선배와 내가 친한 사이라는 것을 모른 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학교 선배의 소문을 기정사실처럼 말한 것이다. 그 소문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놀라기는 했지만 그 선배와 친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대학 선배 집으로 놀러 갔다. 대화를 나누다 선배에게 혹시 선배에 대한 이런 소문이 있었다는 데 알고 있었나고 물었다. 그런데 그 말에 선배는 화를 내며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며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말하라고 했다. 난  학교에서 만난 친구 언니 이야기를 해주었다. 


며칠 후 들려온 소식은 할 말을 잃게 했다. 내 얘기를 들은 선배는 이 말을 남자친구에게 전했나 보다. 그 남자는 중학교에 전화를 걸어 그 선생님(친구 언니)에 대한 험담을 했다고 한다. 민원 전화로 인해 그녀는 학교에서 난처한 상황에 처했고, 내가 그 일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확장될 일이 아니었는데, 나의 말실수로 내게 호의를 베풀어준 친구 언니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곤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일로 친구 언니를 다시 만났다. 언니에게 솔직하게 상황을 말했고 진정으로 용서를 빌었지만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녀가 퍼트린 소문도 아니고 그녀도 들은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 무작정 학교에 전화를 걸어 험한 말은 한 것은 심했다는 생각이 드니 더욱 그녀에게 미안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그리고 학교 선배와는 그렇게 쉽게 끝낼 사이는 아니었다..


수심에 가득 찬 내 모습을 본 아빠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셨고, 결국 이실직고를 했다. 야단만 맞을 줄 알았는데 그때 아빠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이제 엎질러진 물은 더 이상 바라보지 마라. 그 선생한테 실수했지만 용서를 빌었으니 이제 더 이상 뒤를 돌아보며 낙담 말고, 앞으로 이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라." 아빠의 말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덕분에 난 그 자책감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늘 아프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하필 학교 선배와 눈 오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 언니를 만났다. 서로 어색한 인사를 하며 헤어졌지만, 우리를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난다. 긴 세월 사는 동안 언어 사용에 조심하며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스쳐간 나의 말로 상처받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사랑의 말, 살리는 말은 많이 할수록 좋겠지만, 이제는 말보다는 글쓰기에 좀 더 에너지를 쓰고 싶다. 2023년이 되었다. 새해를 맞이해도 뭔가 달라지는 것이 딱히 없어 보이지만 마음만은  "일신우일신"해야겠다. 새해에는 더욱 잘 될 거라는 말, 너는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낌없이 말하자. 평생 가슴에 새길 말, 살리는 언어를 자주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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