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이 내게 물었다.
"너는 왜 여행해? 그러니까 여행의 목적이 뭐야?"
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사촌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런 거 있잖아. 뭔가 보고 싶어서라든지, 뭘 먹고 싶어서라든지 아니면 그 나라의 뭔가를 해보고 싶어서라든지."
그러나 내가 바로 말하지 못했던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내게 여행은 사실 특별한 목적이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나중에 핑계가 붙듯 생기는 부차적인 결과값일 뿐. 결국에 내게 여행은 일상에서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싶어질 때 오는 일종의 일탈과도 같았다.
그랬기에 캐나다와 쿠바, 남미의 몇몇 나라들을 돌아다니던 기나긴 여행을 지나고 나서는 몇 년은 참 잠잠할 수 있었다. 물론 중간에 시베리아도 가고, 일본도 가고, 베트남도 다녀오고, 태국도 들러봤지만 사실상 내게 그건 여행이 아니라 짧은 휴가의 개념이 강했다. 그랬다. 그토록 잠잠하게 흘러가던 내 일상에 다시금 여행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제 그만 떠날 때가 되지 않았으냐고.
처음에는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라고 외면해보았다. 내게는 이제 예전만큼 훌쩍 떠날 수 없는 책임감의 무게가 생겼고, 해야할 일이 늘어났으며, 당장 처리할 것들도 산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자꾸만 내게 이만 긴 여행을 할 때가 되었다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내 신경도 쓰지 않았던 마일리지가 왕복 항공권을 구매할 만큼 쌓였다는 메일이 눈에 뜨였고, 아 저기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여행지가 하필이면 TV에 등장했으며 농담 삼아 같이 여행하겠느냐고 물었던 그녀가 대뜸 그러고 싶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솔직히 그때는 놀랐다. 왜냐면 그녀와 나는 동종업계에서 일하기는 했어도 얼굴만 몇 번 익혔을 뿐 서로에 관하여 제대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나는 원래 혼자 떠났고,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따지면 그녀와의 여행도 못 할 게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예전에 남미에서 한 달 반 동안 Y와 함께 다녀봤기에 낼 수 있었던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이래도 되나. 정말 가도 되나. 망설이던 끝에 엄마에게 먼저 동의를 구했다.
"나, 두 달쯤 여행 좀 하려는데 괜찮을까?"
내가 자리를 비우면 몸이 불편한, 아픈 아빠를 감당하는 건 오로지 엄마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데 정말로 문제 없겠느냐고. 내심 물으면서도 나는 엄마가 할 말을 알고 있었다. 역시나 엄마는 고민도 없이 말했다.
"가, 너한테도 쉴 시간이 필요해졌잖아."
그 말을 듣고야 깨달았다. 왜 여행이 내게 다시금 떠나야 할 때라고 속삭였는지. 나는 내색하지 않았음에도 안으로 차곡차곡 스트레스를 쌓고 있었고, 그건 언제 터지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찰랑거리는 상태였던 거다. 이제 그걸 덜어낼 때가 되었다고 여행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조금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티켓을 끊었고, 이번에도 36리터짜리 배낭에 꾸역꾸역 짐을 쌌다. 그리고 8월 초,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산 지 꼬박 361일만에 다시 긴 여행을 위하여 길을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첫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타러갔는데 자리가 없다는 천청벽력이 들린 것이다. 기사가 외쳤다.
"얼른 전철 타고 의정부 역으로 가세요! 거기서 공항버스 타셔야 해요."
동두천에 다시 공항버스가 다닌다면서 좋아했는데 또 이렇게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헐레벌떡 전철역으로 달렸다. 전철에서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어린 청년둘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의정부서 공항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어디서 타야 하는지 모르는듯하여 말로 설명했는데 잘 탔으려나. 내가 내리지 않으니 당황하여 쳐다보던 눈빛이 생생했다. 미안해요, 근데 난 전철로 갈 생각이거든. 오지랖은 여기까지. 내 가족의 책임감까지 두고 온 나로서는 타인을 향한 호의까지 더 짊어질 여력이 부족했다.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고 서울역서 환승하여 공항철도에 올랐다. 초조함에 자꾸만 핸드폰을 보았다. 왜냐면 공항에는 이번의 긴 여행을 함께 해줄 그녀가 이미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전 장기 여행을 누군가와 가본 적이 없었기에 누군가를 신경 쓰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나도 참 낯설었다.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그야말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렸다. 예전 생각이 났다. 13년도 동남아 여행을 갈 때도 나는 이렇게 초조하게 달음박질 쳤다. 그때는 공항버스가 단출한 내 가방을 보고 여행객인 줄 모르고 쌩하니 지나쳤었다. 이번에는 예약을 안 한 내 안일함의 결과였는데, 알고보니 이게 이제는 여행의 기본이 되어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더랬다. 어쨌든 공항에 무사히 도착해 발을 동동 굴리머 보안검색에 통과했다. 라운지에 간신히 도착해 그녀와 인사하고 간단히 요기한 후에 게이트로 향했다. 밀라노까지 우리를 태워줄 비행기는 싱가포르 항공. 기나긴 비행의 시작이었다.
싱가폴까지 갈 때는 좀 마음을 졸였다. 환승 시간이 고작 1시간 반인데 30분이나 연착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수화물을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다음 비행기를 놓치는 게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도착해보니 우리가 내린 게이트는 16번, 환승할 게이트는 12번. 5분만에 무사히 밀라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제야 안심했다.
그렇게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문득 창을 보았더니 무수한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저 별들을 머리에 이고도 까맣게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희는 언제부터 그렇게 가만히 빛나고 있었을까. 내게 돌아보라며 가만가만 속삭이고 있었을까.
내내 잊고 있던 여행이 문득 내게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며 속삭였던 것처럼. 모처럼 시작된 야간비행에서 나는 하나 더 놓치고 있던 순간과 마주했다.
그리고 비로소 체감했다.
내 여행이 진정 시작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