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비행은 동이 터오면서 조금씩 끝날 기미를 보였다. 푸르게 밝아오는 아침 아래로 깍아지른 듯한 검고 높은 알프스 산맥들이 들여다보이고, 길쭉한 호수가 눈에 뜨였을 땐 아, 이제 정말 거의 다 왔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탈리아 지형을 닮은 기다란 호수가 알프스에서 흐른 빙하가 고여 만들어진 가르다겠구나 싶은 짐작이 들었다.
저 호수의 시작에는 오늘 내가 잠시 들렀다가 갈 호수 마을 시르미오네가 있었다. 어디쯤일까 가늠하던 중 방송이 나왔다. 곧 밀라노 국제 공항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가다 쿨피스 색으로 물든 하늘을 오른쪽에 두고 검은 활주로에 내려섰다. 땅과 하늘 사이에는 옅은 안개마저 핀 시간이었다.
이른 새벽 밀라노 공항은 한적했다. 자동출입국심사가 가능했기에 입국 심사도 단조로웠고, 허츠에서 차를 빌리는 것도 크게 어려울 것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럽에서 차를 빌려서 다닌다니 예전의 나였다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순전히 그녀가 함께한 여행인 덕분에 진행한 것이었지.
그녀는 나를 베테랑 여행자로 생각한 듯했지만 사실 나만큼 어설프고 얼렁뚱땅인 사람도 없었다. 계획은 언제나 얼기설기 세웠고, 무언가를 준비하지만 그다지 꼼꼼하게 하는 편은 아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언제나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발생했고 무언가를 준비해도 그대로 실행이 안 되는 걸 겪어봤기에 생겨난 버릇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내심 뭐든 나를 믿겠다는 그녀를 곁에 두고 있자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새삼스러운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 영 낯선 나라에서 차를 받고도 그다지 긴장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옆에 누군가 함께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래서 여행 내내 그녀에게 고마웠다.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구글맵으로 지도를 맞춘 후 서서히 출발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올라서는 순간까지도 믿기지도 않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어쩌면 이것도 초심자의 행운쯤 되려나. 한 번의 환승을 거친 기나긴 이동이었음에도 피로하지 않았고 도리어 약간의 기대감만이 미열처럼 몸을 기분 좋게 데웠다. 아침이 밝아오는 도로를 달리는 기분도 끝내주게 좋았다. 낯선 풍경이 빠르게 스치는 걸 힐끔힐끔 바라보는 즐거움이란!
밀라노에서 시르미오네까지는 차로 약 2시간 반 정도. 내비게이션에서는 그보다 좀 더 빠르게 도착한다고 알려왔는데, 고속도로 규정속도인 130을 못 미치게 달리느라 예정보다 한참 늦었다. 예전에는 언제나 정해진 속도보다는 좀 빠르게 달리는 편이었다. 운전을 좋아하기도 했고, 빠른 속도감을 즐기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새인가부터는 너무 급하게 가는 것보다는 여유를 두고 가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그걸 두고 나이를 먹었다고 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그만큼 주변을 돌아볼 만큼 마음이 넉넉해졌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뭐가 되었든 안전을 생각한다면 너무 빠른 것보다는 적당히 맞춰가는 게 맞지 싶었다.
성수기 시르미오네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고 당연하게도 주차장 역시 북적거렸다. 이리저리 빈 자리를 찾던 끝에 호숫가가 보이는 적당한 지점에 안착했다. 차에서 내려서 바로 보이는 풍경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푸른 호수.
만약 누군가 먼저 여기가 알스프의 빙하가 만들어낸 호수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직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여 나도 모르는 새 바다에 왔나 보다고 착각하지 않았을까 했다. 그만큼 엄청나게 크고 또 넉넉한 풍경이었다. 마음껏 감탄하며 호수를 따라 걷다가 높다란 성벽을 통과해 들어섰다.
실상 시르미오네에서는 특별하게 볼 것도, 꼭 챙겨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유유자적하게 호수를 따라 산책하다가 오뚝하니 솟아난 성채를 따라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 보면 그만일 터였다. 그래도 이른 시간부터 이동한 터라 허기가 져 간단하게 요기를 하기 위해 호수가 보이는 카페를 찾아가 앉았다.
이탈리아에서 맛보는 첫끼는 거품이 그득한 진한 커피와 그보다 더 진하고 강렬한 단맛이 도는 초코 크림 크루아상이었다. 카페 직원은 친절하게 응대하면서 한국인이냐고 물어왔다. 좀 놀랐다. 해외에 돌아다니면서 처음부터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같은 한국인이 아니고는 거의 경험해 본 적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더더군다나 유럽에서. 내가 잠시 긴 여행을 하지 않은 동안 한국에 대한 인식이 이만큼 좋아졌나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요기를 마치고 호수를 걸었다. 8월 초 태양볕은 뜨거웠고, 눈이 부셨으며,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가수 누군가가 버스킹을 했다는 나무 선착장에 도착했지만, 끝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안전상의 이유로 막았다는 안내가 있었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이 워낙 인기를 끌다보니 여행객들이 찾아와 자꾸만 사진을 찍어대는 통에 그랬나 보다 했다.
좀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어여쁜 강변이 나타났다. 모래는 희게 빛났고, 까슬까슬한 느낌이 제법 좋은 곳이었으며 수심이 깊지 않아 부담없이 수영하기에 안성맞춤 같았다. 수영복을 입고 올걸 잠시 후회했고, 운동화를 신고 있는 것에 아쉬움이 들었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사실 신을 벗고 발만 담가도 되었을 텐데.
아직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데면데면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우리는 그저 멍하니 풍경만 감상하다가 그만 다시 걷기에 나섰다. 사실은 뜨거운 볕 아래 더 버티는 게 고역이었기에 후퇴한 것에 가까웠다.
한낮의 태양을 피해 그늘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일단 물 한 병을 사서 목을 축이고 천천히 마을을 돌아다녀 보았다. 호숫가 풍경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여름 같다면, 그늘에 가려진 골목은 마치 100년쯤 과거로 거슬러 온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회색 벽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만들어낸 조화였으리라.
그 좁디좁은 골목을 그득한 관광객과 비집고 들어서는 차들로 마을은 다소 어수선한 느낌을 주었다. 결국 그 복잡스러움을 피해서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시르미오네를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스칼리제 성이었다. 10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소 협소하고 경사가 있는 계단을 타박타박 올라갔다. 성곽 하나를 올라서자 짙푸른 가르다 호수를 배경 삼아 다닥다닥 달라붙은 마을의 전경이 드러났다. 마치 영화 세트장에라도 들어선 듯한 풍경은 감탄을 절로 불러 일으켰다.
이탈리아 여행의 시작점으로 이곳을 택한 건 꽤나 잘한 일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비록 잠시 들렀다가 지나칠 곳이었을지언정. 숨을 고르듯 이곳에 머문 덕분에 돌로미티의 베이스캠프로 삼았던 볼차노까지 다시 떠나야 하는 걸음이 좀 더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