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릴 때는 사우디에서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일하시던 아빠가 어느 순간, 괌이라는 작은 섬에 자리를 잡으셨다. 나에게 괌은 이름도 낯선 곳이고 그곳으로 우리 형제들을 초청하겠다는 아버지의 계획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지지 못한 채 진행 중인 상태였다. 할머니와 서울에서 살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미국에 가게 된다. 그렇게 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아주 오래전부터 부유하는 삶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제 곧, 이제 곧 하던 그날이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현실화되었다. 이미 5-6년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마음의 큰 동요 같은 것은 없었으나 그것을 기회로 한 일탈은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기독교 학교로 매년 학년 초에 합창 대회 같은 것을 했는데 그 합창 대회 날짜가 내가 한국을 떠난 이후로 잡혀있었다. 따라서 나는 어차피 외울 필요 없는 노래라는 생각에 줄기차게 선생님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농땡이를 쳤고 그 와중에 내 친구 한 명도 나와 함께 합창 연습을 빠지게 되었다. 그 이후, 그 친구가 어떻게 합창 대회를 헤쳐나갔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워낙 노래를 잘하는 친구니 금세 따라잡았을 것이라고 뒤늦은 유추를 해볼 뿐이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1개월을 마치고 간 곳이 괌이었다. 딱히 기억에 남는 인상 같은 것은 없으나 다만 공항이 매우 더웠고 당시 매우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던 내가 수업은커녕, 선생님의 짧은 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충격이고 상처였다. 학교가 낯설고 공부는 어려웠고 나는 사춘기였다.
작은 섬에도 한국 사람들은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또 타국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처음 만났지만 그래도 같은 동포라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니 더욱 반가웠고 대놓고 표현은 안 했지만 지나치게 의지했던 듯도 하다. 정확히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내 인간 불신이 생겨난 시기가 이때가 본격적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학교는 매우 지루하고 싫었고 영어를 못하는 것으로 인해 마주해야 하는 다양한 상황들이 매우 부끄러웠던 나는 꽤 삐뚤어지고 겉돌았던 듯 하다. 원래도 사교성이 좋았던 것 같지는 않지만 영어를 못하니 더더욱 한국어에 집착하게 되어 한국 소설을 더욱 열심히 읽었고 한국말이 서툴거나 말하는 것은 능숙하지만 어휘가 부족한 친구들 앞에서 좀 더 잘난 척을 하기도 하고 가르치려 했던 듯도 하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영어 습득의 기회가 멀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더욱 하락하여 정작 내가 영어를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대학 졸업 이후였다.
좀 더 일찍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틀리건 말건 자신감 있게 부딪혔다면 훨씬 더 즐거운 학교 생활이 되었을 테지만 사춘기의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밥 먹듯이 학교를 빠졌고 학교에 결석 사유서로 병원 진료 기록을 가지고 가기 위해 사이비 같은 중국 의사가 있던 한의원을 매우 자주 찾는 단골 고객 중 하나였다. 한국 학생들이 자주 찾던 그 한의원은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진료 기록을 써주었고 그 덕분에 출석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구세주와도 같은 선생님이었다. 실제 아파서 찾아간 적이 없으므로 침술과 같은 의료적 능력은 알 수 없으나 큰 스트레스를 해결해주었던 것은 확실하니 나름 치료 능력도 좋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격동의 고등학생 시절을 어떻게든 마친 이후 대학에 들어가서는 정신을 차리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완전 단절되어 혼자 열심히 공부만 했다. 여전히 부족한 영어 실력이지만 성적이 낮은 건 또 싫었던 자존심만 강했던 나는 꽤 열심히 공부했고 그러다 보니 친하던 친구들과는 만나지도 않아 어느 순간인가 연락하는 것 조차 서먹해졌으므로 나는 그야말로 타국에 혼자인 이방인의 모습으로 대학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남들은 대학 시절이 추억이 많고 행복하다지만 나에게 남은 대학 시절의 기억은 새벽에 아무도 없는 미니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거나 공강 시간에 혼자 윈첼스나 KFC에서 점심을 먹던 모습이다. 그렇다고 딱히 불행했다거나 외로움이 사무쳤다는 기억은 아니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굳이 고독을 선택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한다.
열심히 공부를 한 덕에 성적은 좋았지만 말은 여전히 서툴어 같은 학과라 수업이 다수 겹치는 학생들과도 크게 교류가 없었고 토론 수업이 예정된 날에는 매우 성실한 와중에도 학교를 빠졌다. 그렇게 조용하고 고독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뿐으로 그곳이 내 장소라는 소속감 같은 것은 없었던 듯하다. 물론,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나의 모교라고 매우 따스하게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 졸업을 한 이후 한국에 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고 영주권을 유지하려면 6개월에 한 번은 괌이나 미국에 들어가야 했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한국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기나긴 떠다니는 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플로터인 나는 어느 순간 이질적인 존재가 된 듯 공감받지 못하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