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모른 척 눈감아 본 적 있어요?

팔로 가려야 했던 친구 이름

by 사소한수집가
친구야, 어째서 너는 그럴 수 있었던거야?




‘없다.’

서랍 안에서 순서대로 정리된 책들을 하나씩 꺼냈지만, 딱 한 권, 다음 교시 교과서만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침에 오자마자 시간표에 맞춰 책 등을 가지런히 맞춰 두었는데. 손을 더 깊숙이 넣어 서랍 안쪽 구석 벽까지 찔러 넣었지만 손톱 끝에는 차가운 쇠뿐이었다.


"딩-동-댕-동."

종소리가 교실 천장에서부터 울리자 친구들의 함성 같은 소리가 단번에 터져 나왔다.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의자 다리로 바닥을 긁으며 일어났고, 사물함 앞은 가위바위보를 외치는 고함으로 금세 아수라장이 됐다.


가방을 책상 위로 낚아채듯 올렸다. 후크 두 개를 동시에 움켜쥐고 ‘탁’ 소리가 나게 젖혔다. 가방 안을 휘저었지만, 차가운 공기만 손에 걸릴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책상 서랍을 확인했다.

‘집에서 안 챙겨 온 걸까?’

웅성대는 친구들의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내뱉는 숨이 뜨거웠다. 손가락이 떨려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뛰기 시작했다. 그때, 툭- 하고 내 어깨에 올린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옆에 단짝 친구가 서 있었다. 친구는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고개를 숙여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뭐 찾아? 뭐 잃어버렸어?"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한 손으로 내 입을 가리고, 친구의 귓속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번 수업 시간 교과서가 없어.. 집에 두고 왔나 봐.."

목소리가 잘게 갈라졌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반장인데, 선생님께서 나에게 실망할까 봐 무서웠다. 친구들이 쳐다보는 한가운데서 뒤로 걸어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내 거 줄게."

너무 놀라 눈이 커지고 입술이 달싹였지만, 마른침을 삼킬 때 무언가 같이 넘어가 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친구의 눈만 보며 깜빡거렸다.


친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낸 친구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친구는 좌우를 살피더니 상의를 들어 교과서를 배 쪽으로 밀어 넣었다. 볼록해진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척척 걸어오는 친구의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 자리에 온 친구는 마지막까지 주변을 훑더니, 배 속에서 교과서를 꺼내 내 책상 위에 '스르륵' 올려주었다.


텅 비어 있던 책상 위에 교과서가 올려지자 친구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배 속에서 매섭게 치던 파도는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하지만 나는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에 풀이 칠해진 것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서랍 속에 넣은 내 손가락은 갈 곳을 몰라 꼼지락거렸다.


다시 종이 울렸다. 친구는 자리로 돌아갔다. 목이 따끔거렸다. 내뱉는 숨은 뜨거웠다. 짝꿍이 돌아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교과서 옆면에 크게 쓰인 친구의 이름을 팔로 가렸다. 짝꿍의 시선이 내 책상 쪽으로 닿을 때마다 친구 이름을 팔꿈치로 꾹 눌러 뭉개트렸다.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무심한 시선이 반 전체를 한 바퀴 훑었다.

"오늘도 책 안 가져온 사람, 뒤로 나가서 서라."


선생님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친구 쪽으로 눈길을 보냈는데, 친구는 벌떡 일어나 뒤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나는 얼른 교과서 페이지를 활짝 폈다. 페이지가 갈라지며 친구의 이름이 흩어져 알아보기 어려워지자 그제야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이 칠판에 분필을 휘두르는 '탁, 타다닥' 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책상 면에 맞닿은 팔 안쪽 접히는 부분에서 끈적한 땀이 배어 나왔다. 교과서가 땀에 젖어 눅눅해질까 봐 걱정하면서도 나는 팔을 뗄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볼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수업 시간은 마치 책상에 올라가 두 손을 들고 벌을 받을 때처럼 도통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누구 이름을 불러서 읽어보라고 할지 몰라 교과서를 째려보고는 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긴긴 시간을 끝내줄 딩-동-댕-동 소리가 들려서야 겨우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친구는 그저 내가 좋다는 듯 활짝 웃었다. 친구의 책이 친구의 품으로 돌아갈 때, 책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내 손가락에 스쳤다.






책에 베인 것처럼 아렸다.






​"예진아, 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나는 그것이 오롯이 내 본모습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감각의 출발 지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곳엔 아홉 살의 친구가 내게 두고 간 교과서가 있었다.

​"내 거 줄게."

그 한마디를 여태 기억하며,
나는 모른 척했던 비겁함의 괴로움을 오래도록 되새겼다.
이제는 안다.
어떤 행동이 내게 어떤 감각으로 남는지.

​나를 키워낸 건 친구의 다정함에 빚진 마음, 그 부채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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