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오일] 언니가 나를 버렸다.

어린 날의 독기를 잠재운 엄마냄새

by 사소한수집가
아이의 독기는, 버스정류장에 오래도록 앉아 있게 만들었다


1층 로비에 언니의 파란색 티셔츠는 없었다. 톡, 톡. 가슴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수영 가방을 들고 현관에 설 때마다 '옷 갈아입기 전에 꼭 발라야 한다'며 신신당부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드라이기도 쓰지 않은 채 뛰어 내려온 보람이 있었다. 머리카락에선 차가운 물기가 뚝뚝 떨어졌지만, 팔다리에선 엄마가 당부한 오일이 미끈거렸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지만, 입가에는 자꾸 웃음이 번졌다.


"아싸, 일등이다! 헤헤"



내가 언니보다 먼저 나왔다. 오늘은 내가 이겼다. 로비에는 사람이 많았다. 키를 받는 사람,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쟤가 나랑 같은 반 노란 모자인가?' 수영모를 벗은 친구들을 추측하는 게임은 꽤 재밌었다.


언니가 나오지 않아 수영장이 내려다보이는 유리창으로 달려갔다. 파란 물속에서 사람들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우리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 방방 뛰며 소리쳤다. 손을 흔들며 불렀지만, 선생님은 나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유형으로 일제히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자 심장 소리가 귀밑까지 쿵쿵 울렸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원래 있던 자리로 힘껏 뛰었다.


로비에 많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들어오던 사람도, 남아 있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벽면의 거울 속 내 모습만 커다랗게 남았다. 머리카락이 닿는 티셔츠 뒷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살에 착 달라붙었다.


1층 데스크 선생님께 물었다. "우리 언니 나왔어요?" 선생님은 키를 나눠주느라 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탈의실에 슬리퍼를 벗어던졌다. 한 바퀴를 돌았다. 언니는 없었다. 샤워장 안쪽까지 들어갔다.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후다닥 슬리퍼를 신었다. 번개처럼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역시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언니가 나를 버렸다.


그 순간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맨날 다니는 곳인데 처음 와본 듯한 기분이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소파에 주저앉았다. 데스크 선생님이 다가와 물으셨다. "집에 전화해 줄까? 번호 외웠니?" 나는 턱을 바짝 치켜들고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혼자 집 갈 수 있어요."


수영장 유리문을 나서자마자 발치에 치이는 돌들을 걷어찼다. 수영복 가방을 든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씩씩거려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뛰어가면 언니보다 빨리 집에 갈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길가 정류장 의자에 툭, 수영복 가방을 던져놓고 앉았다. '내가 깜깜해질 때까지 안 가면 엄마가 언니를 많이 혼내주겠지? 흥, 어린 동생을 버리고 갔으니 언니는 혼나야 해.' 생각할수록 언니가 미웠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다. 어차피 울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한테 혼날 언니여야 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노래를 불렀다. ​작게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커졌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노래를 멈추면 무서운 생각이 빈틈을 치고 들어올 것 같아 멈출 수 없었다. 아직 햇빛이 쨍쨍한데도 어쩐지 깜깜한 밤이 된 기분이었다.


노래를 계속 불렀다. 다 부르면 또 부르고 또 불렀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검은색 차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나를 찾지 마라.


"아빠!!!!!!! 쟤 저기 있어!!!!!"

언니는 뒷좌석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언니는 보물 찾기라도 찾은 것처럼 기뻐했다. 언니의 환한 얼굴에 나는 더 마음이 뾰족해졌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뒷좌석 구석에 몸을 구겼다.


집에 돌아와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참았던 것이 터져 나왔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는데 말이다. 언니는 옆에서 폴짝거리며 엄마에게 자랑했다.


"엄마, 내가 찾았다! 아빠는 못 봤는데 내가 제일 먼저 봤다!"


내 눈길조차 모르고 신난 언니를 째려봤다.


​엄마가 내 얼굴을 감싸 쥐며 물으셨다. 엄마눈에는 예쁜 별이 콕 박혀있었다.


"예진아, 집 오는 길 몰랐어?"


​엄마에게 안겨 코를 가슴에 묻을 때, 나랑 같은 베이비오일 냄새가 확 올라왔다. 온몸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나는 엄마 품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엄마에게 혼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립을 자처하던
나의 어린 계략은 차가운 바람과 같았다.
하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이듯,
나의 날카로운 독기를 녹여낸 건 엄마의 다정한 포옹과 베이비오일 향기였다.
​어른이 되어 알았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완벽한 처방은 아니었을지라도,
내 거친 피부를 보며 애태우던 엄마에겐 오일 한 방울이 간절한 기도였다는 것을.
언니는 바르지 않아도 되었던 그 미끈거리는 액체를 왜 나에게만 그토록 당부했는지,
그 투박한 사랑의 이유를 이제야 가늠해 본다.
​나를 키워낸 건 잘못을 따져 묻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나의 영악함과 상처까지 통째로 품어주던 그 압도적인 이해의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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