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더 특별하게 이어주는, 비밀약속
4교시 끝나기 10분 전, 선생님이 칠판 앞으로 나를 불렀다.
“반장, 나와서 밥 먹을 준비 잘 된 모둠 순서 정해라.”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까지 걷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친구들은 선생님 몰래 나를 툭툭 건드리고 눈을 반짝였다. 내가 칠판 앞에 서면 교실은 갑자기 얼음이 됐다. T자로 옹기종기 붙어있던 책상들 사이로 꿀꺽, 침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우리 반 친구들한테 급식 순서는 마치 절대 질 수 없는 옆반과의 피구 전쟁 같은 것이었다. 평소에 수업 시간마다 까불던 친구들도 이때만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콕콕 가리켰다. ‘우리 모둠 좀 봐줘.’ 하는 얼굴들이었다.
누가 작게 ‘에취!’ 재채기만 해도 난리가 났다. 다른 모둠 친구들이 일제히 손가락으로 그 친구를 가리키며 양손으로 엑스(X)를 그렸다. 친한 친구들이 눈을 맞추며 하트를 뿅뿅 보내기도 했지만, 나는 못 본 척 칠판만 봤다. 사실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내 눈빛 한 번에 교실이 조용해지니까 괜히 어깨가 으쓱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검정 안경을 쓴 우리 선생님은 목소리 한 번 크게 지르는 법 없이 항상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교실을 휘어잡는 개구쟁이 남자애들에게조차 화 한번 내신 적이 없었다. 작고 여리여리해 보이셨지만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분이었기에, 그 조용한 음성은 오히려 우리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급식 순서도 반장인 내가 정하면 선생님은 그 원칙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지키셨다.
나는 분필을 꽉 쥐고 신중하게 숫자를 적었다. 첫 번째 모둠 이름을 쓸 때는 ‘와!’ 하는 환호성이 나왔고, 그다음 순서를 적을 때부터는 ‘아으...’ 하고 여기저기서 짜증 섞인 한숨이 터졌다. “야, 너 때문이잖아!” 하고 서로 탓하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반장인 나는 항상 제일 마지막에 먹으니까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선생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 유리 아래만 뚫어져라 보고 계셨다. 우리 선생님 모니터는 책상 유리 밑에 쏙 들어가 있었는데, 그럴 때 보면 꼭 선생님이 책상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반 애들이 급식 순서 때문에 투덜대며 시끄럽게 굴어도 선생님은 평소처럼 미동도 없으셨다. 나는 방해 안 되게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제 줄 서라고 말해도 되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그때 선생님 화면에 눈이 갔다.
“어?”
그 순간,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더니 팔로 화면을 팍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순서대로 급식받아라!” 하고 교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셨다. 평생 화 한번 안 내시던 선생님의 큰 목소리에 친구들이 빠릿빠릿 움직였다.
친구들이 헐레벌떡 나가는 소란을 틈타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곁으로 부르셨다. 선생님은 내 어깨를 꽉 잡고 눈을 아주 크게 뜨셨다. 안경 너머로 떨리던 그 눈동자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반장, 방금 본 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알았지? 엄마한테도 말하면 안 돼. 이건 무덤까지 가져가는 거야. 약속!”
늘 차분하던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가장 강렬한 목소리였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저 고개만 세게 끄덕였다. 그날 내 입에는 진짜로 커다란 자물쇠가 덜컥 채워진 것 같았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도 참, 그럴 수도 있지’ 싶지만, 그날의 선생님 얼굴은 마치 받아쓰기 30점을 맞고 엄마 몰래 시험지를 숨기던 내 얼굴과 똑같았다. 완벽해 보이던 어른에게도 지켜줘야 할 아이 같은 틈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래서 그 비밀이 뭐였냐고?
미안하지만 그 약속은 아직 유효하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3학년 7반 반장이니까.
초등학교 3학년인 내게 선생님은 세상의 모든 정답을 아는 가장 완벽한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나와 같은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커다란 충격인 동시에,
그 비밀을 지켜줘야 한다는 반장으로서의 비장한 책임감을 깨웠습니다.
나는 엄마에게조차 그날의 일을 두고두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완벽해 보이는 타인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특별한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나를 키워낸 건 타인의 비밀을 지켜내려 애쓰던 그 묵직한 무게의 감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