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무게를 나누는 법
아홉 살의 내게 죽음은 100원짜리 종이 뽑기에서 시작되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커다란 종이 판에 붙은 '뽑기'가 있었다. 100원을 내고 신중하게 종이 하나를 떼어냈던 그날, 나는 토끼를 뽑았다. 새끼토끼를 품에 안고 집에 가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엄마와 아빠는 옥상에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셨고, 혼자인 토끼가 외로울까 봐 한 마리를 더 데려오셨다. 두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놀면 나는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상추를 오물거리는 토끼의 분홍빛 코가 내 손등에 닿을 때면, 축축한 침이 묻어 조금 찝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포근한 온기가 내 마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오히려 좋았다.
그 작은 생명이 내는 규칙적인 심장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이 아이들의 엄마가 된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꼭 지켜줘야지, 하고 몇 번이나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열 마리나 태어난 새끼들은 기력을 찾지 못했다. 학교를 다녀올 때마다 상자 안에는 차갑게 식은 몸뚱이가 하나둘 늘어났다. 가족 모두가 매달려 애지중지 보살폈지만, 결국 보름을 넘기지 못한 채 마지막 한 마리까지 죽고 말았다.
같은 마음일 줄 알았던 가족들은 이제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았다. 열 마리나 죽어가면서 덤덤해졌나 보다. 나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데 가족들은 벌써 다 잊은 것 같아 심술이 났다.
이 슬픈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걸 그냥 딱 알았다.
"나만큼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너를 안 맡길 거야. 나 혼자서라도 끝까지 너를 기억할 거야."
나는 차갑게 식은 마지막 토끼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가족들 몰래 토끼를 구출해 내듯, 나 혼자만의 장례식을 위해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 가장자리,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나무 아래에 깊숙이 흙을 파내어 토끼를 묻어주었다. 예쁜 꽃을 꺾어 나만의 표시를 해두었지만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나 혼자 이 무거운 마음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지만, 아홉 살의 어깨에 그건 너무나 무겁고 서러운 일이었다. 흙 묻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시소에 앉아 한참을 울고 있을 때였다.
하늘색 니트 조끼를 입은, 하얗고 동그란 여자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너 몇 살이야?"
"안녕... 나는 아홉 살이야."
"나도 아홉 살인데! 우리 친구네! 근데 너 왜 울고 있어?"
"내 토끼가 죽었어. 그래서 여기에 묻어줬어..."
내 말을 들은 아이의 맑은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러더니 나보다 더 크게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놀라 울음을 멈추고 물었다.
"내 토끼가 죽었는데, 네가 왜 울어?"
"네가 울잖아. 그래서 나도 슬퍼!"
어안이 벙벙했다. 함께 토끼를 키웠던 가족조차 울지 않는데, 방금 처음 본 아이가 어떻게 내 슬픔을 자기 것처럼 똑같이 꺼내서 울 수 있는 걸까.
가까이서 본 그 친구의 얼굴은 예쁘지 않았다. 벌렁거리는 코 밑엔 콧물이 맺혀 '킁'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기 바빴고, 커다랗게 벌린 입가엔 거미줄 같은 침까지 보였다.
그 엉망진창인 얼굴을 보는데, 이상하게 내 입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 본 아이가 나보다 더 서럽게 우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눈이 부셨다.
그건 꼭 밤바람을 가르며 화려하게 등장하는 놀이동산의 퍼레이드 같았다. 캄캄했던 내 마음 위로 갑자기 수만 개의 전구가 한꺼번에 켜지고, 반짝이는 것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
그 얼굴이 너무나 예뻐 마음에 콕 박혔다.
죽은 토끼 때문에 텅 비어버린 줄 알았던 내 가슴속으로, 친구의 울음소리가 따뜻한 물처럼 찰랑찰랑 차오르기 시작했다. 혼자서만 꾹 참고 슬퍼하려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직 눈물이 다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저 친구와 시소를 타고 싶다는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그 친구는 내 시소 맞은편에 앉아 나를 하늘로 보냈다가, 다시 발을 맞춰 수평을 이뤘다. 우리는 시소 위에서 한참을 그렇게 울고 웃었다.
세상을 열심히 부딪치며 살아온 내 단짝 친구는 가끔 본인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 같다며 속상해합니다. 그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다정한 마음을 보며 위로를 받고 치유를 얻곤 하지요.
친구는 모를 겁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나의 순수함이, 실은 당신에게 배운 나의 ‘전략적인 다정함’이라는 것을요.
내가 당신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아홉 살의 내게 보여준 그 말도 안 되는 진심이 자라나 다시 당신에게 돌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때 내게 알려줘서 고마워.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바로 그날의 너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