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노선표] 나는 내가 P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10살 아들의 불안 속에서 찾아낸 나의 조각

by 사소한수집가
8정거장 손해를 봄으로 바꾼 엄마의 마법





"엄마! 뭔가 이상해!"



​지하철 안내방송을 듣자마자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엄마가 알려준 노선표 앞으로 달려가 고개를 쳐들었다. 분명 4 정거장만 더 가면 서울대공원역이 나와야 하는데, 스피커에서는 전혀 낯선 이름이 흘러나왔다.


​- 이번 내릴 역은 삼각지, 삼각지 역입니다.


​우리가 사당역에서 출발했는데, 삼각지? 사당, 남태령, 선바위, 경마공원, 대공원…. 노선표 어디에도 삼각지는 없었다. 망했다.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엄마! 우리 틀렸어! 위로 가고 있다고! 빨리 와봐!"



​내 속은 타 들어가는데 엄마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부터 언니 선생님 결혼식장에 다녀오느라 두 시간 넘게 지하철을 탔다.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은 내 마음도 모르고 엄마는 한 발짝, 두 발짝, 느릿느릿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엄마, 우리 지하철 잘못 탔어? 그렇지?"


​내 얼굴은 이미 울상이 되어 일그러졌는데, 엄마는 내 표정 따윈 보지도 않고 노선표를 천천히 훑었다.



​"음, 삼각지면… 서울역, 명동, 동대문!"



​엄마의 검지 손가락이 노선을 따라 경쾌하게 올라가며 중얼거렸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다시 내려서 반대편으로 가려면 4 정거장을 되돌아가야 하고, 거기서 다시 4 정거장을 더 가야 한다. 무려 8 정거장의 손해다. 어깨가 툭 떨어지고 입술이 댓 발 나오기 시작했다. 8 정거장이라니, 이건 대재앙이다.



​"어머! 잘됐다! 엄마 예진이랑 둘이서 동대문 가보고 싶었는데! 언제 가보나 했는데 오늘 가네!"



​엄마의 눈꼬리가 휘어지며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동대문? 그게 뭔데?"



​"동대문에 예쁜 옷이 진짜 많대! 예진이랑 꼭 가보고 싶었는데, 여기가 너무 멀어서 엄두를 못 냈거든.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가보네! 신나지?"



​나왔다. 엄마의 별이 박힌 눈.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눈에도 별이 놀러 오는 것 같았다. 8 정거장의 손해보다 엄마의 별빛이 더 강렬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엄마, 나랑만 가고 싶었어?"



"그럼"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순간, 조금 전까지 무겁던 다리의 아픔이 씻은 듯 사라졌다. 게임 속 마리오가 버섯을 먹고 몸집이 커질 때 이런 기분일까. 지금이라면 학교 운동장 다섯 바퀴는 거뜬히 1등으로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다시 의자에 앉아 콧노래를 불렀다. 나도 엄마의 박자에 맞춰 음~음~ 소리를 내며 다리를 펄럭거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 계산기는 멈추지 않았다. 동대문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남은 정거장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꼽으며 줄어들지 않는 숫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드디어 도착한 동대문 시장 입구는 별천지였다. 끝도 없이 줄지어 있는 포장마차와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들, 그리고 어깨를 툭툭치고 지나갈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겁이 났다.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땀이 나도록 꼭 붙잡았다.


​날씨도 추워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나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에 치이고 길을 헤매는 이 소란스러운 상황조차 엄마에게는 커다란 놀이터 같았다. 보물 찾기를 하는 아이처럼 반짝이는 엄마의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내 마음속 뾰족했던 불안감들이 조금씩 깎여 나갔다.


​나도 모르게 엄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무섭게만 보이던 시장 사람들의 활기가, 화려한 옷들의 색깔이 하나둘 '재미있는 것'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엄마가 골라준 흰색 니트를 몸에 대보던 순간을 기억한다.


​구두처럼 딱딱하지도, 남방처럼 까끌거리지도 않았다. 폭신폭신 구름처럼 부드러운 니트는 내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시장 밖은 여전히 살을 에듯 추운 겨울이었지만, 엄마가 내 품에 안겨준 건 화사한 봄 니트였다.



​"엄마, 이거 봄 옷 아니야? 지금 못 입잖아."



"원래 예쁜 봄은 겨울에 미리 준비하는 거야. 기분 좋지?"


".. 예뻐"


그 보들보들한 감촉을 느끼며 나는 처음으로 겨울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길을 잘못 든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봄을 선물 받았다. 8 정거장의 손해는 어느새 '남들보다 먼저 만난 봄'이라는 근사한 행운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나는 내가 원래부터 유연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 착각이 깨진 건 열 살 아들 때문이었다. 아들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야만 안심하는 아이였다. 지하철을 타면 10분마다 내게 물었다.



​“엄마, 몇 정거장 남았어요? 지금 어디쯤이에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아이의 깐깐함이 때로는 버거웠고, 도대체 누굴 닮아 저렇게 예민한 걸까 의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선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숫자를 세는 아들의 뒷모습 위로 삼각지 역에서 얼어붙어 있던 내가 겹쳐 보였다.


​맞다, 나 이런 아이였지.


​한 정거장만 어긋나도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뼛속까지 J였던 아이. 내가 그 기질을 까맣게 잊고 살 수 있었던 건, 내 불안을 ‘동대문 쇼핑’이라는 축제로 덮어버린 엄마의 거대한 다정함 때문이었다.


​나의 뾰족한 울타리로 가득했던 세상은 엄마의 낭만적인 세계에 자연스럽게 물들어갔다. 엄마는 나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예기치 못한 순간마다 나보다 더 아이처럼 기뻐하며 그 상황에서 재미를 찾아냈을 뿐이다.


​그 색깔이 내 삶에 번져오는 모양이 너무나 예뻐서, 나는 기꺼이 내가 정해둔 선 밖으로 발을 내딛곤 했다.






아들의 불안한 질문 속에서 잃어버린 나의 조각을 찾았다.

​나는 원래부터 물 같았던 사람이 아니라,
엄마라는 넓은 그릇에 담겨 겨우 물의 모양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딱딱한 얼음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나의 꼿꼿한 계획표 위에 ‘우연’이라는 물감을 떨어뜨려 나를 수채화로 만들어주었다.

​나를 키워낸 건 길을 잃은 순간에도 기어이 재미를 찾아내던 엄마의 시야였다.
이제 나는 아들의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한다.

​"틀려도 괜찮아. 그러면 또 재밌는 게 나타난다?"

​엄마가 내게 주었던 그 별 박힌 눈을, 이제는 내가 아들에게 물려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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