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좋아하지 않은 팝콘을 두 주먹이나 먹은 이유

꼬마 연출가가 건네는 늦은 답장

by 사소한수집가
그날 팝콘은 무슨 맛이었을까?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 집 놀러 올래? 우리 엄마가 초대해도 된대."



​평소 목소리가 크고 까랑까랑 잘 웃던 친구가 내 옆에 다가와 몸을 낮췄다. 그러고는 아무도 못 듣게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건넸다.



​"누구누구 가는 거야?"



"너만 초대하는 거야."



​친구는 나를 참 좋아했다. 같은 모둠이 된 뒤로 쉬는 시간이며 점심시간마다 늘 내 옆자리를 지켰다. 실내화를 바라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친구의 진심 어린 눈빛 앞에서, 나는 도저히 "좋아"가 아닌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내 대답에 친구는 금세 평소의 시원시원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쳐다보며 빨리 수업이 끝나면 좋겠다고 들떠 있는 친구와 달리, 나는 걱정이 앞섰다. 무리 속에 섞여 있는 게 편한 내게 '단독 초대'란, 둘만 있을 때의 어색함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무게감이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를 따라갔다. 재잘재잘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친구가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활짝 웃으며 대장처럼 앞장선 친구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엄마!" 하고 크게 소리치자, 드르륵 문이 열리며 친구 어머니가 얼굴을 내미셨다. 나는 눈을 최대한 동그랗게 뜬 채 입꼬리를 올리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듣던 대로 예쁘네, 얼른 들어와!"



​환영 속에 들어선 친구의 집은 형광등이 켜져 있었음에도 밖보다 어두웠다. 나는 우리 집과는 사뭇 다른 그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주방과 거실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방이 하나뿐인 아담한 집. 모서리에 놓인 작은 식탁 위에는 예쁜 그릇에 종류별로 과자가 담겨 있었다. 그날의 나는 '아, 친구 집은 이렇구나' 하고 그 낯선 공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서 와, 네가 예진이구나? 단짝 친구라며?"



​아줌마가 친구를 놀리듯이 장난치며 말씀하셨다. 아줌마와 셋이 마주 앉으니 다시 어색함이 밀려왔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힘주어 방긋 웃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친구와 소곤소곤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아줌마에게 눈짓을 보냈다.



​"지금 할까?"



​어머니의 물음에 친구가 웃음을 참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와 아줌마가 주고받는 싸인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기대가 되었다. 곧이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더니, 전자레인지 안에서 전쟁이라도 난 듯 소리가 들려왔다.

펑! 펑! 펑!


​깜짝 놀라 토끼 눈이 된 나를 보며 친구와 아주머니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봉투 안에서 쏟아진 건 황금빛 팝콘이었다. 아주머니는 갓 튀겨진 팝콘 한 알을 내 입에 쏙 넣어주셨다.



​"집에서 팝콘 처음이지? 맛있지?"



​기대에 찬 두 사람의 눈 속에 수많은 별이 박혀 반짝였다. 사실 팝콘은 신기하긴 했어도 내 목소리가 그렇게 커질 만큼 새로운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용기를 내서 소심한 아이를 뚫고 나와 꼬마 연출가가 되기로 했다.


"우와! 정말 신기해요! 저 이런 거 처음이에요. 진짜 맛있어요!"



​평소의 나답지 않은 커다란 목소리였다. 내 리액션이 커질 수록 아주머니의 얼굴은 해바라기처럼 활짝 폈다, 질수 없다는 듯이 친구는 붉은 얼굴 속에서도 활짝 핀 봉선화 꽃이 되었다. 늘 털털하고 씩씩하던 친구가, 봉선화 꽃처럼 물든 게 참 예뻤다.

그 눈빛이 너무 좋아 나는 마음속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내 몸 깊숙한 곳에 친구에게서 처음 본 웃음이 사진처럼 새겨졌다. 내가 조금 더 크게 웃고, 조금 더 크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친구의 세계를 온통 꽃빛 축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큰 기쁨으로 벅차게 했다.


​사실 나는 팝콘을 한 주먹 이상 먹지 못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날은 멈추지 않고 두 주먹, 세 주먹을 입에 넣었다. 어두운 거실을 환하게 밝히는 건 천장의 형광등이 아니라,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두 사람의 기쁨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9살 아들이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를 위해 집을 치우고, 간식을 고민하고, 혹여나 우리 집이 친구 눈에 부족해 보이지 않을까 마음 졸이는 엄마의 긴장을. 92년생인 내가 학부모가 되고 나서야, 빛이 다 닿지 않던 그 좁은 거실을 환하게 닦아놓고 기다렸을 친구 어머니의 '사랑'이 보였다.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도 딸의 단짝 친구를 위해 준비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이벤트. 펑펑 소리 내며 터지던 그 팝콘 한 봉지에 담긴 한 여자의 최선을 말이다.


​아들이 은근히 냉장고 아이스메이커를 자랑하며 친구의 감탄을 즐기는 모습을 보는데, 불현듯 그날의 팝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의 나는 본능적으로 친구 엄마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었던 아이였다. 팝콘 한 주먹을 억지로 더 입에 밀어 넣으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환하게 웃어주었던 내가 마웠다.


​그날 나의 리액션은, 한 사람의 지극한 진심에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답장이었다.



어린 날에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밖보다 조금 어두웠던 친구네 집이, 실은 내내 온기로 가득했음을요.
​저는 남달리 예민하고 분위기를 잘 읽는 아이였지만, 그런 저조차도 그때는 엄마가 떨릴 수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 온기를 정의할 수 있는 '엄마'가 되어보니 이제야 보이더라고요. 따뜻함 안에는 한 여자의 수많은 고민과 떨림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요.
​아이들이 왁자지껄 한바탕 웃고 간 자리에 엄마는 기운이 다 빠지곤 하죠. 아이가 즐거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준비했을 그 마음을, 그때의 저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도 누군가에게 기꺼이 팝콘을 튀겨주는 엄마가 되려 노력합니다.

아줌마, 그날의 팝콘은 정말이지 제 생애 최고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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