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물] 사실 그건, 간수가 아니었어요.

준비물을 챙기지 못한 날,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아이들

by 사소한수집가
줄넘기를 챙기고 가는 등굣길




월요일 오전 7시.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번쩍 뜨려 노력한다. 쏴아아— 거칠게 쏟아지는 샤워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열 살 아들은 벌써 나보다 먼저 일어나 씻고 있었다. 미적거리다가는 아들의 조급함에 숨이 막힐 테니, 나도 평소보다 빠릿빠릿하게 몸을 움직인다.


​미역국을 데우고, 밥을 푸고, 남편의 아이스커피와 냉동해 둔 빵을 오븐에 넣는다. 씻고 나온 아들과 바통 터치하듯 욕실로 들어가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8시 10분. 평소 20분이면 칼같이 집을 나서는 아들인데, 웬일인지 집안이 고요하다

"화장실이야?"



굳게 닫힌 화장실 문에 대고 묻자 안에서 "네" 하는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그 사이 잊고 있던 물통을 챙겨 가방에 넣으며 안도한다. 평소보다 오래 머물다 나온 아이의 표정을 살피니 다행히 밝다. 8시 30분, 이제 정말 나가려는데 아이가 "아!" 하더니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엄마, 미안해요. 미리 못 드렸는데 이것 좀 해주실 수 있어요?"



​학부모회 임원 등록 안내문이였다. "이건 희망하는 사람만 하는 거라 안 해도 돼." 내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번엔 지우개다. 보이지 않는 지우개를 찾느라 아이의 입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1차 경보음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뛰어가 새 지우개를 군말 없이 쥐여주었다.



​"엄마, 먼저 가서 엘리베이터 잡아주세요!"



​35분.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뛰어나가 버튼을 눌렀다. 뒤따라 나온 아이는 어제 산 새 운동화가 잘 들어가지 않는다며 인상을 팍 쓰고 발만 걸친 채 나타났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일단 탄 뒤,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아이의 운동화 뒤축에 손가락을 넣고 다시 발을 밀어 넣어보라고 했다. 매끄럽게 쏙. 50분까지는 교실에 가야 한다는 아들의 말에 1층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함께 뛰었다.

숨이 차서 걷기 시작했을 무렵, 가벼운 대화를 건넸다. "오늘 방과 후 줄넘기니까 4시에 끝나지?"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엄마, 저 줄넘기 안 챙겼어요. 아... 가져오면 학교 늦을 텐데."



​아이의 세상이 멈춰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조금 늦더라도 줄넘기 챙겨가는 게 좋지 않을까? 줄넘기 첫날이라 가져가는 게 네 마음이 훨씬 편할 것 같아."


"네! 엄마, 뛰어요!"



​다시 집으로 달려가는 길. 엘리베이터는 꼭 이럴 때만 꼭대기 층에 머물러 있다. 10분 같은 1분이 지나 문이 열리고, 아이는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이거 새 운동화니까 그냥 신고 들어가서 제가 가져와도 될까요?"


"그럼 괜찮아."



나는 문을 잡고 서 있었고, 아이는 쏜살같이 줄넘기를 낚아채 내려왔다.



​교문으로 향하는 길, 신호등 빨간불을 핑계 삼아 잠시 숨을 골랐다. 아들은 물을 마시더니 사뭇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원래 50분까지 거든요? 준비물 챙겨둬야 하니까. 그런데 오늘은 53분에 도착하면 제가 빨리 꺼낼게요. 그러니까 조금 늦어도 괜찮아요."



​아이는 줄넘기를 가져온 것이 훨씬 잘한 선택임을 스스로 강조했다.



"첫날인데 선생님한테 빌려달라고 하는 건 좀 아니죠. 한 다섯 번째 수업이면 몰라도요. 어차피 수업은 9시니까 안 늦은 거예요. 이게 더 잘한 거예요."



​아이만의 정확한 선이 보였다.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문득 그 문 사이로 한 여자아이가 툭 튀어나왔다. 90년대 어느 아침, 웅크리고 있던 어린 날의 나였다.


​학교에서 두부 만들기 수업을 한다고 '간수'를 가져오라고 했던 날. 미리 말했는데도 챙겨주지 않은 엄마에게 화가 났다. 공책이나 연필 같은 건 내 선에서 얼마든지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간수'는 달랐다. 이건 엄마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 준비물이었으니까. 늘 선생님의 눈에 띄는 모범적인 반장이었던 내게, 준비물을 챙기지 못해 손을 드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나를 모르는 것 같아, 소금물 통을 든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수업 시간, 우유 팩에 든 콩물에 각자 가져온 간수를 부었다. 친구들의 팩 안에는 몽글몽글 하얀 덩어리들이 피어올랐지만, 내 것은 그저 맑은 물이었다. 당황한 선생님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왜 이러지? 예진이 잘 따라 했는데."



​선생님의 걱정 어린 눈길이 내 팩에 꽂힐수록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간절히 원했다. 선생님이 제발 내 팩에서 눈을 돌려주시기를. 선생님께서 간수가 아니란 걸 알아차릴까 봐 두근거렸다.



​"괜찮아요, 선생님. 더 저어보고 안 되면 친구 거 볼게요."



​나는 더 세게 젓가락을 휘저었다. 될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간수가 아니라 소금물이었으니까.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몽글몽글 피어나지 않는 두부를 묵묵히 젓가락으로 휘젓던 여자아이와, 늦더라도 줄넘기를 챙겨야 했던 열 살의 남자아이가 하나로 포개졌다.






아들의 예민함이 버거워 초등학교 입학 직후 적성 검사를 신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검사 결과는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에겐 흔치 않은 '완벽주의적 기질'이었죠.
​상담 선생님께서는 한 시간가량 저와 대화하신 뒤 나지막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무던하신 편이죠? 그래서 아이가 더 어렵게 느껴지셨겠네요."
​그때는 그 말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나를 하나둘 꺼내어 보다 보니, 아이의 기질이 실은 저를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사실을 10년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나를 그토록 고민하게 만들었던 아이는, 사실 나의 어린 시절 그 자체였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곧 법이었고, 준비물을 챙기지 못한 날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으며, 누구보다 완벽하게 해내야만 안심했던 아이. 그때의 나는 나를 이해하는 줄 알았는데, 실은 내 아이를 통해 꽁꽁 봉인해 두었던 나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아이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잊었던 나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너를, 그리고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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