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묘약'

여행의 순간

by 미르mihr


처음에는, 주어진 14일을 어떻게든 쪼개서 이탈리아 내에서도 가보고 싶었던 여러 곳을 들러볼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이 14일이지, 가는 날과 오는 날, 시차에 적응해야 하는 날, 또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짐 보따리를 싸고, 그 보따리를 들고 기차에 오르락내리락하고, 또다시 짐보따리를 풀어놓고 새로운 숙소에 적응할 일들을 떠올리자, 골치가 이만저만 아파오는 게 아니었다. 20년 전에는 이 주일간 3개국을 돌았었는데, 이제는 이탈리아 안의 3개 도시를 도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이제 정말로 늙어버린 것이다! ㅠㅠ


로마와 피렌체 외에 여행을 계획하면서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고민했던 도시는 밀라노였다. 어떤 사람들은 밀라노는 정말 볼 게 없어서 그냥 지나가는 도시라고도 하고, 밀라노야말로 소매치기들의 천국이며 위험한 도시라고도 했다. 그러나 내가 가본 적 없는 밀라노는, 화려한 대성당과 고즈넉한 운하와 번쩍거리는 명품 쇼핑센터와 고풍스러운 전차와 실험적인 건축물과 최후의 만찬 벽화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극장 라스칼라와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루노트라는 재즈 공연장이 있는, 정말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것들이 말도 안 되게 어울리고 있는 도시인 것 같았고, 나로서는 그런 도시에 볼 게 없다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진 않았다. 그러면 무엇하랴. (젊은 두 딸에게는 미안했지만) 늙은 나로서는 그림의 떡이었기에, (젊은 두 딸의 허락을 얻어) 로마와 피렌체를 충분히 만끽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 곳에 머물며 그곳을 '만끽한다'는 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이긴 하지만, 나는 여행지에서까지 집에서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내게 (특히나 가족과 함께하는) 집은 그저 하나로 족하기 때문이다.(아니 하나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ㅠㅠ) 봄이나 가을이었다면, 숙소 근처의 공원에 느긋하게 돗자리라도 펼쳐놓고 이국의 하늘과 사람들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름이라면 근교 바닷가 모래밭에 누워 또 느긋하게 파도와 사람을 구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때는 그런 야외 활동이 적합하지 않은 때인 겨울이고, 게다가 이탈리아의 겨울은 비도 잦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젊은 두 딸의 허락을 얻어) 특별한 실내 체험을 계획했으니, 그건 바로 집에 있었다면 결코 시도하지 않았을 '오페라 감상'과 '쿠킹 클래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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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페라 관람 경험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봐도 두 손가락이나 남는다. 약 4년 전, 오래전부터 미국에 사는 언니네 집을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언니는 드디어 멀리서 찾아온 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페라 티켓을 끊어놓았다. 물론 주머니 사정상 무대 하고는 아주 먼 고층의 저렴한 자리였지만, 어차피 나는 오페라가 뭔지도 몰랐고,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도 한다는 화려한 극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또 내게도 언니에게도 오페라 자체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자매 간의 함께 추억 만들기가 더 중요했으므로, 무대가 잘 보이는가 아닌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때 상영하던 오페라는 푸치니의 <<투란도트>>였는데, 나는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기대도, 예상도 없던 나에게 오페라 무대 장치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그동안 간혹 봤던 뮤지컬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노래 실력과 연기 실력을 겸비한 오페라 가수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아름다운 독창과 합창과 거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그 모든 것들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때까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앞으로 기회가 되면 종종 오페라를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나는 다시 본래의 게으른 내가 되어버렸다. 경기도 언저리의 내 집 근처에도 물론 공연장이 있고 간혹 오페라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린아이들을 동반하도록 교육용으로 가공된 공연이거나, 해설과 함께하는 마티네 공연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오페라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몰입이 안 되고 부산스러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공연에는 끌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공연을 하는 곳은 경기도 언저리의 우리 집과는 꽤 먼 거리라 뚜벅이인 내가 공연장까지 오고 가는 데만도 서너 시간을 소요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게으른 나와 오페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이 시작될 무렵, 나는 드디어 큰맘 먹고 혼자서 오페라를 보러 가기로 했다. 고3이던 큰 아이의 대입 원서 접수를 마친 직후였다.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친 나는 잠시 혼자서 조용히 있을 곳이 필요했는데, 그때 오페라 생각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사전 지식도, 기대도, 예상도 없이 그저 잡히는 대로 <<호프만 이야기>>라는 공연을 예약하고, 여행을 가듯 공연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이전의 경험과 달리 오페라 공연이 하도 지루해서, 나는 공연 내내 대체 왜 이렇게 지루할까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분주했다. 처음 무대에서 아주 높은 곳에서 봤던 오페라가 너무 감동이어서, 이번에는 큰맘 먹고 무대와도 매우 가까운 비싼 자리를 예약했기에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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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페라는 내게 확률이 딱 50%인 도박이었다. 별다른 할 일 없이 머물러 있는 이국 땅에서 그런 건전한(?) 도박을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았다. 나는 (젊은 두 딸의 허락을 얻어) 우리가 로마에서 지내는 동안에 맞춰 상연 중일 <<사랑의 묘약>>이라는,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오페라 티켓을 예약했다. 대신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리 오페라 예습도 여행 준비 삼아 해보기로 했다. 나는 오페라를 만든 음악가와 시대적 배경과 대략의 줄거리를 읽는 것을 넘어, 유튜브에서 한국어 자막이 있는 한국 오페라 가수들이 공연한 작품도 미리 꼼꼼히 시청했다. '듣도 보도 못한' 작품이었지만, 음악도 경쾌하고 작품의 내용 자체도 코믹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 로마에서 '찐' 공연을 감상했을 때, 나는 마치 이탈리아 관객인 것 마냥 환호성을 보낼 수 있었다.


예습 덕분에 오페라의 내용 이해는 물론이고, 무대 장치와 음악과 등장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도 즐길 수 있었던 나는, 한국에서의 지루했던 공연과 이 즐거운 공연은 뭐가 다른가에 대한 비교까지 여유롭게 해볼 수 있었다. 우선 스타일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사랑의 묘약>>은 밝고 코믹한데, <<호프만 이야기>>는 어둡고 진지했다. 그런 데다가 한국에서 본 오페라에서는 '성악가'인 가수, 특히나 주연만 중요해 보였다. 그러나 로마의 공연에서는 가수만큼이나, 노래 없이 밧줄만 타거나 (내가 보기엔) 출중한 춤과 몸매 덕분에만 등장한 공연자들도 오케스트라의 음악 연주와 함께 주목받았다. 연기와 춤까지 완벽히 해내는 오페라 가수들은 전혀 '성악가'같아 보이지 않았다.


또 큰 차이점은 합창이다. 합창하는 장면에서 등장인물의 숫자는 한국보다 훨씬 많아서, 독창에는 느낄 수 없는 웅장함의 감동을 전해준다. 그런 많은 합창의 등장인물 중에는 머리가 희끗한 나이 든 사람들도 꽤 많았다. 또 비록 한 번 밖에 안 봤지만 한국의 오페라 공연에서는 여자 주인공은 날씬하고 예쁜 반면, 남자 주인공은 키가 작고 허리와 배가 매우 굵었다(그래서인지 그만큼 힘 있게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 번 밖에 안 본 외국의 오페라 공연에서는 오히려 남자 주인공들이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미남형이었고, 여자 주인공은 키가 작고 허리가 굵어서 나로서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성량'면에서 독보적인 여주인공을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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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의 어리숙한 분석이 실제로 일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나 자신의 상태다. 여행지인 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오페라 극장을 찾았을 때의 나는, 얼마나 (고3 엄마라는) 일상에 찌들어 있었겠는가. 그러나 일상을 벗어나 별다른 할 일 없는 이국의 거리에서, 예습까지 해가며 사랑에 빠질 준비를 마친 내가 만난 <<사랑의 묘약>>은, 나를 오페라와의 사랑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사랑의 묘약>>에서 말하는 묘약은, 실은 단지 싸구려 술일뿐이다. 순진한 청년 네모리노는 콧대 높고 쌀쌀맞은 여인 아디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사기꾼 약장수에게서 싸구려 술을 묘약인줄 알고 비싸게 산다. 그러나 당연히 그 약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따지러 간 네모리노에게 약장수는, 약이란 본디 한 번으론 효과를 보기 어려운 것이니, 한 번 더 사서 복용해야 한다고 또다시 사기를 친다. 사기꾼의 말이긴 하지만, 무엇이든 단 한 번에 효과가 나타나고 변화되는 것은 없으니, 그 말은 그저 진실이 아닌가.


어쨌든 그러는 사이 몇 가지 우연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네모리노는 그 우연들이 만들어 낸 효과가 묘약의 효과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던 아디나 역시 곧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므로, 그간 해왔던 사랑의 구걸을 멈춘다. 그러자 아디나는 평소와 달라진 네모리노의 모습이 의아해 전에 없던 관심을 쏟게 되고, 결국 네모리노와 사랑에 빠진다. 이 모든 일은 그가 비싸게 산 싸구려 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니, 그것은 실제로 사랑의 묘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극을 관람하는 동안, 남녀 주인공보다 '사랑의 묘약'을 제공한 유쾌하고 능수능란한 사기꾼 약장수 둘카마라에게 훨씬 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두 주인공을 능가(해야)하는 노래 실력은 물론이고, 그 캐릭터가 구사하는 선악을 넘나드는 모습도 매력적이다. 그는 언뜻 보면 악하고 냉정하고 비열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세계에 대한 사랑과 지혜가 충만한 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변화를 위해 준비된 자들에게 그가 원하는 약을 나눠주며, 약을 받은 이들은 우연한 사건들 속에서 스스로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간다. 따지고 보면, 운명이라는 것은 (약을 먹든 안 먹든) 우연의 실 끝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하나의 견고한 매듭으로 엮어낸 것이 아닌가.


론 내가 이 즐거운 오페라와의 사랑에 빠지는 동안, 내 옆의 젊은 두 딸은 꾸벅꾸벅 졸았다. (물론 나는 공연장에서 조는 것도 공연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젊은) 그들이 아직 오페라와 운명적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지 않은 걸, (늙은) 내가 어찌하랴. (물론 나는 졸다가도 운명적 사랑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튼 오페라라는 내 건전한(?) 도박의 전체 승산은 이제 66.66...%로 상향 조정되었고, 만약 이국 땅에서라면? 나는 승산 100%의 걸출한, 늙은 도박꾼이 다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