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인가?'
예기치 못한 상황 앞에서 혼란한 마음에 심장마저 두근거리기 시작하는데, 키가 무척 크고 아름답고 영어도 유창한 고풍스러운 (4성급) 호텔의 매니저가 사과를 해댄다. 그래도 내가 계속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서,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어떤 상황인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줄로 아는 그는, 영어로 계속 설명하다못해급기야 한국어 구글번역기까지 돌려서 보여준다.
"그래 그건 알겠다고, 네 말을 못 알아들은 게 아니고, 그냥 이런 상황 자체가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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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며칠을 지내던 우리는 '난데없이'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집 떠난 지 십여 일이 된 터라 여행의 피로도 제법 누적된 데다가, 비 오고 추운 날씨 속을 걷다가 돌아왔을 때 따뜻한 욕조가 문득 그리웠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저렴한 호텔의 세 명이 묵는 방의 침대 하나는 소파 베드였는데, 물론 둘째는 스스로 그게 좋다며 본인이 그걸 쓰겠다고 고집했지만, 엄마인 나로선 일주일 간이나 계속 아이를 소파에서 재우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 여행 와서 숙소비 아껴서 얼마나 부자가 되겠다고, 우리도 남은 이틀은 위치도 좋고 시설도 좋고 서비스도 좋을 4성급 호텔에 가서 좀 편하게 쉬어보자.
그래서 나는 창밖으로 대성당의 두오모가 보이는 피렌체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아담하지만 유서깊은 4성급 호텔을 바로 이틀 전에 예약 했던 것이다. 드디어 4성급 호텔에 입성하기로 한 날, 저렴하게 별 일 없이 잘 머물던 호텔의 체크 아웃을 일찌감치 마친 우리는 곧바로 그 고급 호텔로 직진해 가서 짐을 맡겼다. 고급 호텔의 아름다운 매니저는 방이 준비되면 연락을 준다며 잘 놀다 오라고 우리를 배웅했다.
우리는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이 숙소에서 불과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에 감탄하며, 따뜻하고 한가하고 쾌적한 박물관 안에서 호텔 체크인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4성급 호텔의 입성을 눈앞에 두어서인지 몰라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이젠 지긋지긋하다던 딸들도 아주 유쾌하게 작품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며칠 만에 딸들 눈치 안보며 마음 편히 작품 감상할 기회를 맞이한 나는, 신나게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도나텔로의 막달레나와 다빈치의 반디니 피에타 사이에 앉아 감동과 전율에 휩싸여 있는데, 갑자기 전화기가 진동했다. 받아보니 아까 호텔에서 만났던 아름답고 키 큰 매니저의 목소리다. 대충 들어보니 호텔로 오라는 이야기인 것 같아 딸들을 불러 모아 '아직 체크인 시간 전인데, 친절하게도 방을 일찍도 준비해 주네'라면서 룰루랄라 하며 함께 호텔로 갔다.
그런데 나를 본 그 아름다운 매니저의 낯빛이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매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대충 알아들은 바로는, 우리가 예약한 방-셋이 함께 묵을 수 있는 가장 크고 좋은 방-에 전날 묵었던 투숙객이 아침에 투어를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호텔에서 그에게 전화를 했으나 투어를 멀리 가서 돌아올 수도 없고, 예약을 대행한 여행사에서 짐을 빼라는 말을 전달받지 못했다면서 끊어버리더니 이제 더 이상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게다가 그가 알려준 여행사나 가이드 역시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게다가 또 마침 주말이라 다른 빈 방도 하나도 없다고. 이런 긴 이야기의 결론은 그날 우리가 그곳에 묵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황망한 표정의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매니저는, 그래서 그 호텔과 제휴된 다른 고급 호텔을 여기보다 훨씬 더 저렴한 가격에 예약해 줄 수 있으며, 투숙가격에 원래는 포함되지 않는 '피자리아'에서의 저녁 식사와 최신식 스파까지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곳의 위치가 중심과는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여기에서 그곳까지 호텔에서 택시와 벨보이까지 동반해 데려다 줄 것이며, 언제든지 중심가로 나오고 싶을 때는 부르기만 하면 오는 택시를 이용하라며, 그곳과 지금 이 호텔 앞 사이를 오가는 모든 택시비도 호텔 측에서 다 낼 테니 걱정 말라고도 했다. 또 우리가 이틀밤을 예약했으니 두 번째 밤에는 (다시 돌아오고 싶다면) 그땐 반드시 방을 준비해 놓겠다고도 말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을 들어보면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가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젊은 딸들은 그 아름다운 매니저가 말한 다른 호텔의 이름을 재빨리 검색해 보더니 그곳이 더 '쌔삥'이라며 좋을 것 같다고 얼른 가자고 나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은 나는, 이게 진짜 인종차별인가 아닌가, 저들이 제안한 호텔로 가야 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른 호텔을 알아볼까, 아니면 원래 그냥 잘 묵고 있던 소박한 호텔로 다시 돌아갈까, 내가 괜한 호텔 욕심을 부려서 이런 '벌'을 받는 건가, 저들이 새로운 호텔에 모셔다 준다면서 혹시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저들이 저렴한 가격에 제안한 새로운 호텔이 사실은 원래 저렴한 호텔이라 알고 보면 손해 보는 게 아닐까, 이러한 저절로 떠오르는 수많은 망상에 시달리면서 아니 그러느라고 다른 선택의 여지를 찾지 못한 채 내가 모르는 곳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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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끌려간 새로운 호텔은 과연 '고풍'과는 거리가 아주 먼, 페인트 냄새도 미처 다 벗지 못한 '쌔삥'의 딱 떨어지는 모던한 스타일이었다. 레스토랑이며 헬스클럽이며 스파까지 있어서 4성급이 아니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지만, 아직 벗지 못한 페인트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내 영혼이 '고풍'이라는 관념에 매달린 탓인지, 그 곳의 모든 것들이 내겐 매우 어설프게 고급을 흉내낸 싸구려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그런 어설픈 곳으로 억지로 나를 보낸 모든 인간들에 대해 다시금 화가 터져나왔다.
"이건 인종차별인 게 틀림없어!"
'새삥'의 호텔에서 배정해 준 모던하고 (저렴한 숙소보다 특히 욕실이!) 널찍하고 깔끔하며 시원한 통창에 전용 발코니까지 있는 침실에서 나는 외쳤다. 그런 나를 향해 '매서운 눈매'의 둘째 딸이 대꾸했다.
"아닌 것 같은데! 엄마가 너무 사람을 못 믿는 거 아니야?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주면서, 인종차별을 할까? 게다가 구글에 후기 올리면, 자기들 평판도 안 좋아질 텐데!"
그래서 아직 어려서 (무섭고 비정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딸에게 나는 한 수 가르쳐야(만 한다고 생각) 했다.
"얘들이 인종차별을 대놓고 하겠어? 중요한(?) 사람들이 오는 주말에 동양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기 싫어서 여기로 보낸 거겠지, 보내도 찍소리 못하게 하려고 이것저것 얹어주면서 이리로 보낸 거지. 이 비수기에 남은 방이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되니?"
그러면서 나는 인종차별에 대한 항거 대신, 이상하게도 스마트폰으로 우리에게 배정된 방의 가격 조건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도 세 명이 묵을 수 있는 방은 우리가 든 방이 유일한 지 이미 체크인이 된 그 방의 그날 가격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 예약되지 않은 다른 날의 숙박비는 조금 더 저렴했다. '그러면 그렇지. 속은 게 틀림 없어.' 이런 생각을 하며 표정을 구기고 있는 내게, '소매치기가 딱 좋아할 인상의' 큰 딸이 다가와 말했다.
"엄마,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엄마 마음이 편해질 만큼,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 내가 같이 가서 도울게요."
그 말에 용기가 난 나는, 고풍스러운 호텔의 아름다운 매니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여긴 중심에서 너무 멀고 '쌔삥'이라 마음에 안 드니, 무조건 다시 그곳 호텔로 돌아가겠다고 우겼다. 그랬더니 잠시 후 누군가 우리 방문을 노크했다. 나가보니 그 아름다운 매니저가 아니라, 그보다는 키가 훨씬 더 작아 내 키와 비슷하고 그러나 몸집은 나의 두서너 배나 되는, 그렇지만 안 아름답지는 않은 '쌔삥' 호텔의 매니저 '루크레치아'가 서 있었다. 그는 고풍스러운 호텔의 아름다운 매니저가 내게 했던 설명을 또다시 되풀이하면서 또다시 사과했다. 그러면서 이 새로운 호텔의 최신식 스파를 예약해 놓았으니 거기에 가서 마음을 좀 풀라고도 했다.
나는 그에게 스마트 폰에서 내가 검색한 숙박비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숙박비는 매일 다른데 그날은 주말이라 더 비싼 것이라 설명했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이전 호텔에서는 두 밤을 예약했기 때문에 추가 할인을 받았는데, 여기는 하루만 있을 거라 추가 할인은 안 해준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자 지금껏 나긋나긋 설명하던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톤을 높이면서 그렇지 않다고, 그와 동일하게 연박의 할인을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야, 그리고 만약 네가 '에삐'면, 거기에서 또 그만큼 깍아 줄께!"
"에삐? 그게 뭔데?"
"에삐! 에삐! 네가 '에삐'면!"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딸들이 내게 말했다.
"엄마 그건 해피happy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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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삐'가 '해피 happy'라는 걸 깨닫자마자, 나는 이상하게도 갑자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의심으로 괴로워하고 화를 내고 있던 나를 계속 진정시키려던 딸들을 향해 '그래,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 상황을 즐기자!'라고 선언했다. 우리 셋은 곧바로 루크레치아의 충고대로 '쌔삥' 호텔 스파로 뛰어 들어갔다. 페인트 향에 더해 락스 냄새까지 물씬 풍겼지만 사우나실에 대자로 눕기도 하고 우리끼리만 있는 널찍한 탕 안에서 물장구도 치면서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 그만 잘못해서 비상벨을 눌러버리는 바람에, 놀라서 달려온 직원에게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사과를 해야 했다! ㅠㅠ)
그날 저녁에는 야경투어를 예약해 두어서, 관광지 중심에 있는 고풍스러운 호텔에서 약속했던 택시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또한 시험해 보았다. 우리가 프런트로 내려가자 호텔직원들은 득달 같이 달려와 택시를 불러 주었고, 그 택시는 우리를 그 고풍스러운 호텔의 코앞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택시가 도착하자 그 호텔 직원들이 또 곧장 뛰어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 (우리로서는) 낯선 호사에 '정말 공주라도 된 것 같다'라고 속닥거리며 우리는 시시덕거렸다. (그러나 그날 저녁 비바람과 함께 굉장한 추위가 몰려와 야경 투어를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다시 택시 서비스를 이용해 곧장 '쌔삥' 호텔로 돌아갔다!)
추위에 호되게 당하고 돌아온 우리는, 이번에는 약속받은 저녁 식사를 즐기러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타이틀이 '피자리아'였기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탓인지, 레스토랑은 예상보다 아주 번듯했고 화덕 피자는 이탈리아에서 맛본 것 중 최고였으며, 아란치니와 감자 요리도 훌륭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방에 있던, 호텔에서 웰컴 선물로 준 와인을 가지고 내려왔다. 레스토랑 직원은 그걸 보더니 시원하게 온도가 맞춰진 것으로 바꿔 주고, 나와 큰 딸의 잔이 비어갈 때마다 조용히 다가와 계속 잔을 채워주었다. 그런 서비스 덕분에 내 영혼이 높은 곳으로 붕~떠올라서 그랬는지, 와인을 따라주던 직원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 안 좋은 일이 일어나 정말 힘들었는데, 여기에서 모두들 친절히 대해줘서 기분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아주 잘 됐네, 그게 바로 내 일(job)인데!"
그렇다. 그들은 일을 너무 잘했다. 그래서 나와 큰 딸은 그날 저녁 원래의 주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와인을 마셔버렸다. 우리 셋은 본래 대화 없이 밥만 먹는 습관을 가졌다. 그러나 이탈리아 여행 중에는 식당에 앉을 때마다 붙는 자릿세가 아까워서 최대한 오래 천천히 먹어보자고 다짐을 했지만, 그래도 한 시간을 채우기 어려웠다. 그 때마다 우리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들은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는 우리도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몇 시간을 앉아서 끊임없이 웃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날 벌어진 상황이 정말 인종차별인가 아닌가에 대한 토론, 나의 의심과 '진상 고객 짓'에 대한 품평, 대학'까지 나왔다는' 사람이 '에삐'도 못 알아들은 것에 대한 조롱 등 할 말이 끝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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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영어를 못 듣고, 루크레치아의 발음이 다소 이탈리아적이라도 그렇지, 그날 '에삐'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건, 지금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너무, 어이가 없다. 아마 그건 내 영어 실력이나 발음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때 내 마음 속의 (정형화된) 문맥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상황에서 '행복'이란 말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나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평소 누군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 때, 특히 돈을 주고받는 상거래에서는 '너에게만 특별히 이 가격에'라든가 '이러면 우리도 남는 게 진짜 없다'는 형식적인 (거짓) 말을 듣곤 한다. 그래서 인종 차별에 대한 의심과 미리 알아보지 못한 거래에서 손해를 봐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만 꽉 찬 내 마음이 예상한 것도 아마 그런 말들이지,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말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리라!
나의 행복을 염려한 루크레치아가 방값을 더 깎아주었던 그날에 나는 분명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싼 가격으로 같은 물건을 얻으면 행복한가? 당연히 그렇다. 남보다 더 이득을 보았으니까. 그런데 남보다 더 이득을 봤다고 행복해하는 건, 사실 그건 '인종차별'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도둑놈 심보' 아닌가? 그래서 행복했던 생각의 발걸음이 여기까지에 이르면, 나는 약간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다. 루크레치아가 말한 '에삐'를 못 알아듣던 나는, 실은 '해피happy'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