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스펙트럼과 그 너머

"의식의 내용은 의식적이자 동시에 무의식적이다." - 칼 G. 융

by 미르mihr


#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2권 <<원형과 무의식>> 중에서 <정신의 본질에 관한 이론적 고찰>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초기 심리학자들은 무의식의 존재를 한사코 부인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무의식을 인정한다면, '의식'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명해야 하는데 그게 실상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밥 할 때 나는 의식적이다. 밥이 되려면 얼마만큼의 쌀과 물과 열과 시간이 필요한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 간 매일 밥을 한 나는, (모든 신체적으로 각인된 활동들이 그러하듯) 거의 무의식적으로도 밥을 한다. 주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보면, 이렇듯 무의식과 의식이 흔히 뒤섞여 있다.


"무의식적 상태는 매우 상대적이고 의식과의 경계층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의식 역시 매우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의식의 경계 안에는 동질적이며 하나인 의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모든 등급이 강도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나는 행한다'와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고 있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둘은 때때로 뚜렷하게 대립한다. 따라서 무의식성이 우세한 의식이 있는가 하면 의식성이 우세한 의식이 있다. 오히려 완전하게 의식된 의식 내용은 거의 없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이처럼 모호하므로 융은 '의식의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우리는 빛에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그것을 의식하며 살진 않는다. 그러나 아무곳에나 스펙트럼을 들이대면 어디서든 무지개 빛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문득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무지개를, 그보다 훨씬 더 광대하지만 비가시적인 무의식에 둘러싸인 의식이라고 가정해 보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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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식의 스펙트럼 밖에 있는 모든 것이 무의식이다. 그곳에는 우선 생존에 필요한 생리적 충동들이 있다. 융은 그것을 스펙트럼의 한쪽 끝 적외선 쪽에 우선 두어 보자 한다. 그러면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인 보랏빛 옆 자외선 쪽에는, 앞선 생리적 충동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더 인간적이고 고차원적인 행위를 이끄는 무의식적 동기가 있을 수 있다. 배고픔 때문에 밥을 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먹이고 서로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 역시 밥을 하게 만든다. 물론 먹기에 급급해서 밥을 할 때와 나누고 싶은 마음에 하는 밥을 할 때는, 분명 행위 양상에 차이가 날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융은 그 양상에 차이가 있을 지언정, 우리 신체로 하여금 특정한 행위 양식을 강제하는 모든 것은 '충동'이라 말한다.


"충동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론 생리적 역동성으로 체험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리적 충동과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누미노제(신성한 힘)의 작용을 전개한다. 종교적 현상학을 아는 사람들은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열정이 비록 적대적이긴 하지만 형제이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바뀌는 순간이 있음을 잘 안다. 두 가지 모두 진실이며 정신적 에너지의 풍부한 원천이 되는 대극의 쌍을 이룬다."


저차원이든 고차원이든, 예컨대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도 본능이고 백로가 우아하게 비상하는 것도 본능이다. 생존을 위해서든 신성함을 위해서든, 인간적인 특정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것들은 모두 본능적 충동으로 인간 안에 내재해 있다. 보통, 충동이란 저열하고 악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융은 충동이든 고차원적이 욕망이든 그 자체로 나쁘거나 좋은 것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러한 충동 안에는 인간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 구체적인 형상성을 만들어내도록 강제하는, 형상의 근원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융의 '원형'이다.


"형체 없는 충동은 없으며 모든 충동은 각기 그 상황에 맞는 형상을 갖고 있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특수하게 인간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 유형을 실현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 유형은 항상 존재하는, 생물학적으로 절대 필요로 하는 충동영역의 조절장치이기 때문이다.... 형상의 구체적 실제는 무한히 다채롭고 생생하며, 그 다양성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본능과의 친족성에도 불구하고, 혹은 이 친족성 때문에 원형은 정신의 고유한 요소를 표현한다."


충동이라면 분명 몸이 생물학적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물질성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물질적 충동 안에는 원형이라는, 자기 스스로는 형상이 없으면서도 형상 만들기를 강제하는 정신적 요소가 늘 함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융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물질적 필요를 위한 행위와 정신적 만족을 위한 행위로 이분되지 않는다. 물질과 정신은 언제나 인간의 모든 충동과 행위 속에 딱 붙어 있다. 물질적 필요에 의한 행위처럼 보이는 것 속에도 정신성을 만족시키려는 경향이 함축되어 있으며, 정신만의 요구처럼 보이는 것도 물질적 필요만큼이나 긴급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오로지 물질만의 일도 없고, 오로지 정신만의 일도 없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의, 그리고 같은 세계 안에 포괄되어 있고, 서로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으며, 결국 둘 다 비가시적인 초월적 요소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과 정신이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것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이라는 사실은 가능성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개연성마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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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의 바깥에 자리한 무의식은 원형이 강제하는 온갖 형상성들로 넘쳐나기에, 의식의 스펙트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고 다양하고 풍부하며 매력적이고 강력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약한 의식은 거기에 휩쓸려 버릴 수 있다. 그러면 자아의식을 잃어버린 그야말로 '미친' 사람이 된다. 또, 의식 자체가 무의식 속으로 휩쓸려가지는 않는다해도 강력한 집단적 무의식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집단 무의식과 '동일시'하는 경우는 매우 많다.


내 의식이, 만약 그런게 있다면, '밥 하는 게 제일 소중한 엄마라는 집단 무의식'에 동화되어버리면, 나 = '밥 하는 엄마'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건 진짜 큰 일이다!) 특히, 융은 이러한 동일시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주의(~ism)' 같은 것을 가장 경계한다. 이것은 그저 밥하기 같은 사소한 일에 그치지 않고, 나치즘이나 인종주의, 극우 보수주의 등과 같은 사회적 비극에까지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아는 대극 중의 하나와 동일시되지 않고, 대극 사이의 중간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독립성을 보존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쪽뿐만 아니라 다른 쪽도 의식하고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 동일시는 더 이상의 심혼적 발전을 정지시킨다. 인식 대신 확신만을 갖게 되는데 때로는 이것이 훨씬 편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끌리게 된다."


이런 재앙들을 막으려면, 의식은 지금 의식되는 자아의식이 아니라 지금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의식의 주변부-충동, 원형, 무의식-에 대한 의식을 시도해야 한다. 의식적 자아가 돌아봐야 하는 의식의 주변부를 융은 자아 보다 더 큰 개념인 '자기'라 부른다. 또한 의식적 자아가 이렇게 무의식적 '자기'를 탐색하는 과정을, 융은 한 개체가 인격의 전체성을 향해 성장해 가는 개성화 과정이라고 본다.


"이 때 무의식적 내용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자아도 변화한다. 자아는 무의식적 내용이 흘러들어감으로써 인격이 생기를 얻고 풍부해지며, 범위와 강도 면에서 자아를 넘어서는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는 에너지가 된 의지는 더 강한 요소인 자기라고 표현한 새로운 전체적 형상에 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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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심리학자들이 외면하려했던 무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무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융이 이토록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실상 우리가 의식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제대로-사이 좋게 소통하면서 세계에 대한 우리 의식의 인식을 확대시켜주기에 소중한 것이 아니겠나.


그런데 곤란하게도 무의식과 의식은 서로 간에 공통된 소통의 도구가 없다. 무의식은 의식의 언어를 모르고 의식은 무의식의 원형에서 비롯되는, 오랜 역사 속에서 변화무쌍해진 상징적 형상들을 오해한다.


그럼에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없는 셈 치는 것과 잘 모르는 광대한 영역에 대해 무지와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경험상, 뭔가를 모른다고 해서 그걸 의식조차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게으름과 관성 때문에 애써 의식하지 못하는 척 자기자신을 속일 뿐이다.


그러나 광활한 무의식의 영역을 의식하는 그 의식은, 아리송한 수수께끼들 앞에 서 자기 안팎의 온갖 지혜와 지식과 기지를 끌어모아야 할 테니, 나날이 더 강하고 똘똘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의식이야말로 (자의식에 갇히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려는 열린 의식이지 않을까?


"정신적 요소의 아주 작은 변화라 할지라도 그것이 근본적인 성질의 것이면, 세계상의 인식과 형성에 최고의 의미가 있다. 콤플렉스 심리학의 주된 활동인 무의식적 내용의 의식으로의 통합은 주관적인 자아의식의 독재를 제거하고 그것에 무의식적인 집단적 내용을 대립시키는 만큼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