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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mihr Nov 24. 2023

융의 원형과 스피노자의 신(神)관념

"우리가 심혼을 이해하려면 세계를 끌어들여야 한다." - 칼 G. 융

#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2권 <<원형과 무의식>> 중에서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에 관하여> <집단적 무의식의 개념> <아니마 개념을 중심으로 본 원형에 대하여> <모성원형의 심리학적 측면>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융에 따르면, 현대인은 원시인에 비해 머릿속이 매우 복잡하다. 원시인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 안에 깃들어 있는 정령들과 대화와 교감을 나누며 살았다. 예컨대 그때의 땅은 대지의 여신이거나 태모(太母)로서 그 안에 우글우글한 것들을 품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곰이나 염소와 또 고래와도 예를 갖추어 혼인하였고 그래서 친인척뻘인 동식물들을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착취하지 않았다. (물론 현대인들은 그런 것을 감정이입 혹은 투사라고, 예컨대 그저 상상이라 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연은 그냥 '물질'이 되어 인간 아래로 추락했다. 그때 자연 속 정신은 종교적-도그마적 신이 되어 인간 위로 높이 올려졌다.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 그 신들도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그 영혼들은 이젠 정말 갈 곳을 잃고, 인간의 정신 속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그게 바로 융의 원형(元型)이며, 인간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무의식이다.


"정신의 복잡함은 자연의 탈정신화에 비례하여 심화되어 왔다."


"(어떤 형태로든 신을 믿었던) 상징을 지닌 문화권이나 시대에서 상징들은 위에 있는 정신Geist이기 때문에, 정신은 위에 있으며 무의식은 조용한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상징을 잃어버린 우리의 무의식은 교란된다."


그런데 이 정신성은 일정한 상황적 조건이 갖추어지면 언제라도 현실적 실존으로 형상화되려는 강력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에, 그저 상상이나 허구는 아니다. 일정한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원형은 형상을 얻어 표상화되는데, 현대인들은 그것을 '(병리적) 환상'이라 부른다. 원형은 스스로는 특정한 형상 없이, 형상화를 강제하는 힘 혹은 에너지다.


*


원형에 대해 읽는 내내 나는, 스피노자의 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신은 아시다시피, (우리 자신을 포함한) 무한한 세계 자체다. 신의 일부인 우리가 생각을 한다면, 당연히 신은 생각을 한다. 물론 신은 그 일부인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생각을 초과하는 것도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우리 안의 세포 하나가 행하는 것을 초과해 내듯이(?) 말이다. 그 논리에 따르면 전체 신을 이루는 모든 부분들 즉 산도 생각하고 하늘도 생각하고 땅도, 바다도,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 돌멩이까지도 생각하거나 생각을 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멩이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스피노자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또한 이 신은, 비록 우리 눈에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연결된, (무한하지만) 유일한 존재다. 그렇게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생각들 역시 모두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 세계와 동일한 무한한 관념의 사슬, 그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신(神) 관념'이다. 그러니 아주 오래전 기억이 어느 날 불쑥 내게 떠올라오듯, 산 위에 있는 나무의 기억이나 혹은 스피노자가 했던 논리적인 생각이 (그 둘은 신 입장에서 보면 같은 신체이므로) 어느 날 신 관념의 사슬을 타고 내 정신 속에서 불쑥 떠올라오는 것도 (논리적으로 당연히) 가능하다. 


"인간 정신의 형상적 존재를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의 관념인데 이는 매우 많은 개체들로 복잡하게 합성되어 있다. 또한 신체를 합성하는 각각의 개체에 대해 신 안에 필연적으로 관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 신체의 관념은 신체를 합성하는 부분들에 대한 많은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 정신의 형상적 존재를 구성하는 관념은 단순하지 않으며, 매우 많은 수의 관념들로 합성되어 있다." (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정리 15)


태곳적부터 있어왔고 그 자율적인 힘으로 우리의 정신 속에서 형상화를 강제하여 온갖 환상을 일으킨다는 융의 원형은, 스피노자의 시각에서 보면 (논리적으로 당연히) 가능하다. 신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무한한 실체이므로, 신관념 속의 어떤 관념도 사라지는 법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념은 현실의 대상만을 가리키지 않고 관념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관념의 관념, 관념의 관념의 관념, 이런 식으로 무한한 관념의 세계가 실존한다.)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에 실존하지 않는 것의 관념처럼 보이는 것들도, 신의 관념 속에서는 무한히 실재하는 것들의 관념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의 본성만으로 이해되고 그 자신이 원인이 되는 변화들만을 겪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 4)


이런 스피노자의 정리들은, 원형을 증명하려던 융의 "어떻게 한 인간이 그에게 있는 바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외침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피노자와 융은 모두 인간의 정신이 단일한 영혼이 아니라는 점, 그 혼합물의 사슬은 한 개체의 경험과 기억 이상의 것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견이 온전히 일치한다.


"우리가 의식하는 의도들은 항상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무의식적인 것의 간섭으로 방해받기도 하고 차단당하기도 한다. 정신은 단일성과는 거리가 멀고 그와 반대로 서로 용납되지 않는 충동, 억제와 격정이 부글거리는 혼합물이다.... 의식의 단일성 또는 이른바 인격의 단일성은 결코 진실이 아니라 사람들의 바람일 뿐이다."


*


융의 원형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우리 안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정신적 힘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신 관념도 스스로 역동하고 생산하려는 자연의 힘이다. 관념의 사슬은 그냥 아무렇게나 힘없이 이어져 있는 게 아니다. 하나하나의 모든 관념은 우리 자신이나 나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그러하듯,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고 세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스피노자는 이를 코나투스라 부른다.) 


"정신은 명석판명한 관념들만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관념을 갖는 한에서도 자신의 존재 안에서 무한정한 지속동안 존속하려고 노력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제3부 정리 9)


관념들은, 떼어내기 힘든 복잡한 무한의 인과의 사슬로 아주 단단히 이어져 있다. 돌멩이보다 훨씬 복잡한 복합체인 인간 신체는 우글우글한 무한의 코나투스들의 집합체이다. 그러한 신체와 언제나 함께 있는 우리 정신 역시도, 각각의 관념들이 지닌 우글우글한 무한의 코나투스들의 집합체이다. 융도 그렇지만 스피노자 역시, 신체와 정신을 같은 것의 두 가지 표현으로 본다. 코나투스는 살아남겠다는 정신적 욕망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걸 실현하려는 신체적 충동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정신의 코나투스의 일차적이고 중요한 것은 우리 신체의 실존을 긍정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제3부 정리 10)


스피노자가 이렇게 건조하고 명석하게 설명한 코나투스를, 우리의 시(詩)적인 융 선생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모습으로 흥미롭게 그려낸 것 같다. 아니마는 남성 안의 여성성이고, 아니무스는 여성 안의 남성성이다. 이런 원형들 덕분에 남성과 여성은 사랑에 빠지는데, 실상 그들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자기를 투사한 것이므로 실상은 오해에 가깝다. 그렇지만 이런 오해가 없다면, 모두가 스피노자처럼 논리적이어서 아무도 열정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인류는 이미 오래전에 절멸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오해는 우리 생명의 원천이다. (물론 그것이 때로 우리를 죽이기도 한다.)


"심혼은 살고자 하지 않는 물질의 타성을 술수와 유희적 속임수를 써서 생명에 이르도록 유인한다. 그것은 믿기 어려운 일들을 확신시켜서 생명이 살아가도록 한다. 심혼은 간계와 술수로 가득 차 있다. 아니마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게 만드는 것,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다... 아니마가 삶을 원할 때, 그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원한다."


우리들의 이런 사랑스럽고 어리석은 오해에 스피노자는 1종 인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가 보기에 그 어떤 생각도 완전히 틀린 것은 없다. 만약 현실의 컵이 없어도 내 머릿속에는 컵이 있다면, 그런 생각의 대상은 신의 관념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머릿속에 그 대상에 대한 관념까지의 사슬이 아직 연결이 안 된 것이다. 그러므로 1종 인식은 그저, 사슬이 잘려 홀로 있는 관념이라는 뜻이다. (캬~ 이런 건조한 스피노자가 나는 왠지 시(詩)적으로 보인다.)


*


융이 콤플렉스라고 말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리들의 격한 감정들 역시, 스피노자라면 1종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림자, 모성 콤플렉스 등등. 융은 그런 무의식을 감지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하면서 의식화하자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홀로있지 않고 자기를 있게 한 원인의 관념에 사슬이 연결된 관념을 2종인식이라고 부른다. 홀로 있는 관념들은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흐트러지지만, 원인과 연결지은 함께 있는 관념들은 그보다는 단단하고 자연 전체의 관념인 신 관념 안에서도 더 넓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내 정신을 차지하고 있는 관념들이 1종인식에서 2종인식으로 이행할 때, 처음에는 몰랐던 원인에 대한 관념은 아마도 외부 자연이나 타자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를 (나와 너 사이의) 공통관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나와 타자가 함께 사는 세계에) 적합한 관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스피노자가 3종인식이라 부르는 인식이 있다. 스피노자를 읽는 동안에 나는 그걸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는 아마도 근대 이후의 세계가 강조하는 인과관계의 합리적 이성이 아닌, 내겐 익숙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인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스피노자는 이 3종인식을 얻으면 무엇을 보든 간에, 그 안에서 신을 인식하고 그로써 신의 일부인 자기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인식하는, 기쁨을 맛본다고도 했다. 융을 읽다 보니, 우리가 잃어버린 '상징의 능력'이 어쩌면 스피노자의 3종인식과 유사한 게 아닐까 싶다. 


(교과서처럼 답을 정해놓은 게 아닌) 진정한 상징은 완전히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보기도 하고, 하나를 다른 것으로 끝없이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다. 그게 가능한 이유를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신 관념의 무한한 사슬은 모두 단단히 연결되어 있고 그 중 수십 혹은 수백 단계의 사슬을 뛰어넘는 것쯤은 신적 입장에서 보면 실상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인식을 지닌 이에게는, 세상의 모든 일이 언제나 이해가능한 것이 된다. 그에게는 (나와 너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신적인 제3의 눈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은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갖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의 무한한 본질 및 그 영원성이 모두에게 알려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우리가 적합하게 인식하는 매우 많은 것들을 연역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저 3종의 인식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대다수의 오류는 오직 우리가 이름들을 실재들에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언젠가 자기 집 뜰이 이웃집 닭들 안으로 날아들었다고 고함치는 소리를 내가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 오류를 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정리 7과 그 주석)


"지적 판단은 항상 그것이 한 가지 뜻임을 확인하려 하며, 그럼으로써 본질적인 것을 지나쳐버리게 된다. 무엇보다 그들의 본성에 일치하는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뜻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다양성, 예측할 수 없는 관계의 충만함이다." (융,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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