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2권 <<원형과 무의식>> 중에서 <어린이 원형의 심리학에 대하여> <민담에 나타난 정신 현상에 관하여> <초월적 기능>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무의식 안에서 형상화를 강제하는 원형 중, '어린이 신神'은 가장 대표적인 주제다. 무의식에 등장하는 어린이를 그저 개인적인 어린 시절의 추억물로 확정하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화시키며, 삶의 질문을 회피하는 일이다. 원형은 언제나 인류 전체의 상이기 때문에, 어린이 원형 역시 그렇게 범위를 넓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어린이가 인간의 지나온 시간에 대한 상징이라면, 그것은 인류 전체의 집단정신의 전의식적 혹은 유아적 측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반대로 어린이는 미래의 앞당김일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신화에서 어린이는, 아기 예수처럼, 종종 구제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한 동정녀 마리아의 출산과 같은, 도무지 경험할 길 없는 비범한 출생을 통해 정신적 '생성'에 대한 체험을 묘사하기도 한다. 또 신화 속에는 어린 시절에 버림받고, 위험에 노출되는 영웅들이 대거 등장한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갈등 상황이다. 의식은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갈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지만, 무의식적 정신은 이런 상황에서 의식이 예상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비합리적인 제3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성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버림받음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의식은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야 할 필요성을 자신에게 가르쳐줄 상징을 필요로 한다. 어린이의 상징이 의식을 유혹하고 사로잡으면서 구원의 작용이 의식에 침투하면, 의식이 할 수 없었던 갈등 상황으로부터의 결별이 완수된다.
어린이가 등장하는 모든 신화에는 눈에 띄는 모순이 있다. 어린이는 한편으로 힘없이 적들에게 내맡겨져 위협을 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예상 밖으로 온갖 역경을 이겨나간다. 어린이는 무의식의 탄생으로서 무의식의 품에서 나오고 인간 본성의 근원에서 혹은 생동하는 본성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작은 것보다 더 작고 큰 것보다 더 크다."
St Christoper (Tiziano Vecellio)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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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짝을 이루는 원형은 노인-현자다. 이러한 형상은 꿈속에서 마법사, 의사, 사제, 교사, 교수, 할아버지 또는 권위를 가진 특정한 인물로 나타난다. 세계 곳곳의 민담 속에서도 (어린) 주인공이 절망적 상황에 처해있을 때면, 노현자가 나타나 이런 식의 조언과 도움을 준다.
"얘야, 너는 지하의 관 속에서 사랑하는 보호자와 위로자를 둔 수많은 아이들보다도 더 힘들게 지냈구나. 일단 집을 떠났으니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겠지. 이 세상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아야겠구나. 나의 빵자루와 우유통을 집어라, 그 속에서 너는 매일 필요한 만큼의 음식과 마실 것을 발견할 것이다."
주인공 자신의 생각해야 할 수고를 떠맡는 노인은, 자기의 인격의 전체성이자 그 자신의 총자산으로서 그 모든 것을 합친 힘으로 미래의 문을 밀쳐 열게 한다. 그가 빌려주는 마법의 도구들은 선과 악 속에서 하나가 된 인격의 특이성을 나타낸다. 노인은 지혜와 영리함, 호의와 협조를 주면서 동시에 악한 측면 역시 지닌다. 도움을 주는 그의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 고유한 길을 향해 나서도록 만들기 위해서 주인공을 어려움에 처하게 만든 것 역시 그 노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율배반적이며 요괴 같은 노인은 살리는 자이자 죽이는 자일 수 있다. 융이 소개하는 그러한 이중적 노인이 등장하는 민담 중 내게 흥미로웠던 것 하나를 요약해 소개하고자 한다.
순종과 단정함이 돋보이는 고아 의붓딸이 있었다. 어느 날 바느질 실을 감는 실패를 샘에 빠뜨려, 그것을 찾기 위해 샘에 뛰어들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마법의 나라로 가는 문이었다. 그 길에서 고아 딸은 지저분하고 병든 노인을 만난다.
"아름다운 아가씨, 날 좀 씻겨줘!"
"난로는 무엇으로 지펴야 하죠?"
"나무못과 까마귀똥을 모아서 그것으로 불을 지피렴"
그러나 소녀는 덤불을 가져와 다시 물었다.
"어디서 목욕물을 길어와야 해요?"
"곡식 건조장 아래에 흰 암말이 서 있는데, 목욕통 안에서 소변을 보게 하렴!"
그러나 소녀는 깨끗한 물을 길어와 다시 물었다.
"목욕 솔은 어디서 구하나요?"
"흰 암말의 꼬리털을 잘라서 그걸로 목욕솔을 만들렴!"
그러나 소녀는 자작나무 잔가지로 목욕솔을 만들고, 다시 물었다.
"비누는 어디서 구하나요?"
"목욕실의 돌 하나를 집어서 그걸로 문질러 닦지 뭐!"
그러나 소녀는 마을에서 비누를 구해와 그것으로 노인을 씻겼다. 그러자 노인은 그 대가로 금과 보석이 가득한 상자를 준다. 이럴 땐 당연히 이를 부러워해서 따라 하는 누군가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 집의 하녀가 부러워서 같은 샘에 실패를 가져다가 던졌다. 그러나 하녀는 그 소녀처럼 하지 않고, 노인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행했고, 그로부터 얻는 대가는 그런 행위에 상응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어린 시절에 많이 들었던, 또 나도 내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들려주었던 옛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금도끼, 은도끼>에 등장하는 신령이 위 이야기 속에서 소녀의 심성을 시험해 보는 짓궂은 노인과 너무 닮았다. 어릴 때는 이렇게 매우 '교훈적인'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던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교훈의 'ㄱ'만 들어도 거부반응을 보이곤 한다. 비합리적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구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흥미롭게 무심코 들었던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내면에 스며들어 도덕이나 양심을 내면화하고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행위를 검열하게 만들 것이다. 물론 그래서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부자유스럽게-착하게 살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그래도 가만 생각해 보면, 그런 건 그나마 외적으로 강요되는 '법'은 아니라서, 가끔 어길 수도 있는 쾌감과 스스로 의무를 짊어질 자유와, 다시 스스로 그 의무를 던져버릴 수도 있는 자유로운 가책과 고독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CCTV는? 얼마 전, 아이들 학교에서 CCTV 사각지대로 남아있던 곳에 카메라를 설치하자고 설문조사를 했었다. 나는 '인권과 자유의 침해'와 '폭력의 가능성으로부터의 내 아이의 안전'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다, 찬성표를 던졌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필요할 때 스스로 지혜의 말을 들려준다'는 융을 읽는 내내, CCTV에 찬성한 나는 어쩌면 '정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그런 시간과 장소를 또 조금 늘려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다. 무한하며 또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삶 구석구석을, 법과 규칙과 감시와 규제로 채우는 건 결코 가능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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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이 환기해 준 대로, 오래된 민담이나 신화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은 주로 어린아이, 소녀, 노인, 동물 등으로 모두 사회적 권력과는 거리가 먼 '소수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만약 신화와 민담이 도그마적이 되지 않았다면) 인간 정신 속 다양한 원형들이, 정신의 말을 들려주기 위해 스스로 형상화한 인물들이다. 그러니 외적-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이들이 소외되는 세상이라면, 한 개체 안에서-내적으로도 그들은 소외될 것이다.
문화와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우리의 의식은 태생 자체가 '일방향적'이다. 그러나 건강한 신체라면 자가 조절능력을 통해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정신의 삶 역시 의식의 일방성에 대해 무의식적 조절력이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체적 조절력에 손상을 가하게 만드는 현대의 삶은, 정신에도 마찬가지다. 자가조절력이 손상된 정신은 그러한 신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해치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과도한 무의식적 반작용을 일으킨다.
"자기 자신과의 대결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은 이런 보편적 어려움을 감안해야 한다. 남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정도로 자기 내부의 또 '다른' 자에게 그의 존재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면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외부적 객관성의 척도다."
민담에 등장하는 숫자 3과 4에 대한 이야기가 내겐 특별히 흥미로웠다. 주인공 돼지치기가 마녀에게 얻은 백마는 네 다리가 온전하지만, 나쁜 사냥꾼이 타고 다니는 백마는 다리가 셋 뿐이다. 마녀의 숲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그 숲에 사는 늑대에게 희생양 12마리를 주어야 하는데, 악한 사냥꾼은 그걸 깜빡 잊었기 때문에 늑대들에게 백마의 다리를 빼앗긴 탓이다.
여기서 사각형을 대각선으로 나누면 삼각형 두 개가 나오는 걸 생각해 보자. 그러면 4는 합일을, 3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두 삼각형의 대립-대극을 떠오르게 한다. 이런 대극이 넷이라는 합일-의식과 무의식의 만남에 이르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하다. 의식에서 지향하고 바라는 모든 것과 함께 무의식의 지혜로운 조절력까지 모두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 무의식에 12마리의 희생양을 바칠 수 있다면, 그 무의식의 조절력을 통합해 보다 높은 의식성-지금의 의식으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의식성에 이를 수 있다고 융은 강조한다.
"이 민담은 보다 높은 의식화라는 원대한 목표를 위한 이율배반의 혼란스러운 협동적 놀이를 보여준다. 동물적 심연으로부터 초월세계로 기어올라가 그의 아니마-공주를 발견한 돼지치기는 의식의 상승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의 빛나는 아니마는 마법에 걸린 채 부자유스럽다는 '불쾌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는 불복종의 죄를 지어 공주는 지상으로 내려오고 악귀 역시 사냥꾼이라는 인간의 형상을 취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은 점점 더 악귀와 비슷해지지만, 무의식이 제물을 받고 그 대가로 소산을 내어준다는 것을 배운다.... 심혼의 획득은 실제로 인내, 희생 그리고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