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무의식의 영향력을 마음대로 제거할 수 없다." - 칼 G. 융
#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3권 <<인격과 전이>> 의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제1부'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작용'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점심으로 뭘 먹을까 생각하다 냉장고 안에 가래떡과 어묵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 떡볶이나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나, 떡을 썰다 보니 맥주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겠다 싶다. 떡을 썰다 말고 집 앞 구멍가게로 종종걸음을 친다. 속으론 '몇 캔을 사 올까?' 계산하는데, 문득 맥주 좋아하는 남편과 딸 얼굴이 떠오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좋은 것도 아닌데 미리 알아서 사주지 말고, 내가 지금 혼자 마실 것 딱 한 캔만 사 와야지!
구멍가게 진열장 앞에 서니 못 보던 '신상' 맥주가 있는데 그것만 유독 여섯 개가 한 묶음으로 판다. 딱 한 캔만 사겠다는 마음은 어디로 가고, 나는 벌써 여섯 개짜리 캔 맥주를 한 묶음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뿐인가. 며칠 전에는 김밥에 넣을 단무지를 사러 갔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내 손에는 단무지보다 더 큰, 딸들이 좋아하는, 비스킷 두 박스가 고이 들려있었다.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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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에 따르면, 내 정신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나의 의식이 아니기에 그렇다. 의도와 의지로 통제 가능한 개별적 의식의 토대는 무의식이다. 그러나 무의식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프로이트가 말했던 잃어버린 유아기의 기억이나, 부정하고 싶어서 억압해 버린 것들이 저장된(?) 개별적 무의식이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큰, 거의 무한하다고 볼 수 있는 토대인 유전적/보편적/집단적 무의식이 개별 정신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보통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를 빙산의 일각으로 표현하곤 한다. 위로 솟은 부분이 의식이요, 그 아래 숨어있는 훨씬 더 큰 부분이 무의식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형은 단지, 개인적 무의식만 있다고 가정할 때만 적절하다. 게다가 이 모형은 개별 정신이 제각각 하나의 빙산으로써, 서로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개별 정신은 그렇게 독립적이지 못하며, 또한 물 위의 얼음처럼 그저 동동 떠 있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때때로 무의식을 바다로 비유하는 건, 바다가 무한히 깊기에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쉬지 않고 활동하는 생명의 원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융은 개별 의식에 대해 '의식의 스펙트럼' 모델을 제시했다. 그런데 무한할 집단정신에 연결-접속된 개별 정신에 대해 상상하는 내 머릿속에는 이런 그물망이 떠오른다.
그림으로는 2차원뿐이지만 상상 속에서는 3차원을 넘어서 N차원적인 (영화 <인터스텔라>의 우주처럼) 그물코다. 여기에는 인간 정신뿐 아니라 세계-사물의 모든 정신도 연결되어 있다. 개별 정신을 하나의 점이라고 한다면, 개별 정신 속에 떠오르는 내용들은 그 점에 연결된 다른 점들과 그 연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개별 정신의 의식이 지닌 힘은 그렇게 다른 점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중심점의 힘이 될 것이다. 물론, 융이 이런 말을 한 건 아니고 그의 의견을 토대로 그저 상상해 본 것이다. (상상은 자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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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개별 정신 속에서, 개별 의식과 무의식 특히 집단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화합하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신체로 비유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내 주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신체가 그런 것들을 다 떼어버리고 살 수 없듯, 정신 또한 그렇다.
"인간의 심성이란 완전히 빛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한 많은 그림자로도 되어있다. 그 때문에 실제 분석에서 얻게 되는 통찰은 종종 괴로운 것이다."
계속 신체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나를 둘러싼 환경과 관계는 알량한 내 신체 하나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힘도 세듯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내 정신에 떠올랐다고 다 내가 해낸 생각이 아니며, 따라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생각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한계는 신체처럼 명확하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모두가 자기 생각이라고 착각한다. 물론 자기 생각이 아니더라도, 내게 우연히 떠오른 생각 덕분에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정신의 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 그렇게 좋은 생각들을 내게 좋은 방향으로 유용하면 좋겠지만, 그런 생각만 내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위험한 것은,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것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이다. 내게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나 스스로 생각해 낸 것으로 여기고, 그 생각에 자기의식을 일치시키려 할 때 개체는 자의식 과잉 혹은 의기소침과 절망 등의 위험에 빠진다. '모방'을 통해 사회의 기초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강력한 집단 무의식에 동화되기 쉽고, 그런 약한 정신에게 '과도한' 공명심과 허영심을 불어넣는다.
"인격의 발전을 위해서는 집단 정신과의 엄격한 구별이 절대로 필요하다. 모든 분별력의 결핍이란 곧 개별적인 것을 집단적인 것 속에 녹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할 수 있듯, 그러한 구분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범위가 확실한 페르소나를 만들어 그게 자기 자신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러나 융에 따르면, 의식이 만들어 내는 페르소나는 집단정신의 한 단면을 취한 것일 뿐이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것까진 괜찮다. 그러나 그런 것을 넘어 페르소나에 고착되어 버리면 인격의 발전이나 개성의 성장이 어려워지고, 그러면 어느 순간 정신적 불균형이 찾아오게 된다.
"페르소나는 인간이 '무엇으로 보이느냐'하는 것에 관한 개체와 사회와의 타협의 소산이다. 그것은 이름을 받아들이고 칭호를 획득하거나 지위를 나타내거나 이것저것이 되기도 한다. 페르소나는 해당자의 개성과 관련해서 부차적 현실, 즉 단순한 타협물과 같은 것이며, 여기에는 당사자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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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혹시 떡볶이를 만들다 맥주 생각이 나도 "내가 왜 이럴까?"라고 묻지 말자. 떡볶이에 맥주가 어울린다는 건, 그런 조합으로 맛있게 먹었으나 잊고 있던 개인 무의식일 수도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맛있는 음식에는 항상 곁들이는 '국물'이 필요한 것은 보편적 집단 무의식의 작용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밥과 국, 빵과 숩, 스테이크와 와인, 소시지와 맥주... 등등)
또 내가 먹으려고 맥주를 사다가 자식과 남편 생각에, 여섯 캔이나 주렁주렁 무겁게 들고 왔다고 해서, "나는 참말 착한 (아내 혹은 어머니) 구나"라고 착각하지도 말자. 그 역시 집단적 무의식 속 어머니 원형의 작용이거나, 그중에 내가 편의적으로 골라 만든 페르소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담 대체 어디까지가 내 의식의 힘이고 어디서부터가 집단 무의식의 힘인가?
말했다시피 매우 어려운 그 구별법에 대해서는, 계속 쓰면서 알아볼 작정이다. 그때까지는 우선, 혹시 그 사이에 또 의도한 것과 다른 행위를 하고 있을 땐, "내가 왜 이럴까?" 대신, 일단 이렇게 질문하도록 하자.
"아, 혹시 또, 그분들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