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은 단일성이 아니라 복합적인 모순이 가득한 다수성이다." - 칼 G
#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3권 <<인격과 전이>> 의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제2부 '개성화'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누군가에게 매혹되었을 때 현대인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를 사랑해."
그러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가 살았던 시절의 고대 그리스인들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내 눈을 흐리게 했어."
그들의 화법과 사고방식은 좀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내겐 좀 이상스러웠다. 그러나 융은, 그들의 화법을 이상하게 여기는 나와 같은 현대인들의 화법이, 어쩌면 더 신기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동일시하는데 너무 익숙해있기 때문에, 늘 우리가 그 생각을 만들어 냈다고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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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속 영웅 아킬레우스는 분노하고, 사랑에 빠지고, 명예를 지킨다. 나 역시 분노하고, 사랑에 빠졌고,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 한다. 개별적 인간들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분노하고, 사랑에 빠지고, 명예를 추구하는 본성은 영원하다. 영원불멸(永遠不滅)한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신(神)이다.
"실로 우리의 생명은, 영겁의 시간 이래로 있어온 그대로의 것이다... 우리의 내면적 감정에 생물체의 '영원한' 연속성에 관한 가장 깊은 예감을 부여하고 있다. 자기(Selbst)는 과거에 체험한 모든 삶의 침전과 총합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미래적 삶의 출발점이자 그것을 잉태한 모체이기도 하다. 불멸성의 관념은 이와 같은 심리적 토대로부터 합당하게 나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분노하고, 내가 사랑에 빠지며, 내가 명예롭다 말하는 것이, 문득 이상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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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 빗대어 상상하려는 (사유 에너지를 절약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관통하며 흐르는 영원성에 대한 느낌에도 인간의 형상을 부여하고, '신'이라 이름 붙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인들은 영원성에 대한 내면적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한다. 그래도 스피노자의 말처럼 무엇이든 인격화시키는 버릇은 사라지지 않아서, 무의식적인 느낌을 타자에게 투사한다.
융이 하나의 인격으로써 대하도록 권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사는, (남성 안의) 여신과 (여성 안의) 남신들이다. 그러나 신 대접을 제대로 못 받은 그들은, 주체가 마주한 타자들을 통해 다시 그 주체에게 신의 위력을 발휘한다.
예컨대, 누구에게나 영원한 어머니에 대한 상(像)이 있다. 프로이트는 이것이 유년기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융은 유년기적 경험 역시, (남성) 주체의 타고난 내적 본성인 여성성이, 그저 가장 가까운 여성인 어머니에게 무의식적으로 투사된 것으로 여긴다. 성인이 되면 그것은 다시 가장 가까운 여성(애인 혹은 부인)에게로 이전된다. 원시부족들은 '죽음-체험'적 성인식을 통해 자기 안에서 작동하는 여성성과 심연의 의미를 짐작했다. (그러면 어른이 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할 기회가 없기에 투사가 지속된다.
투사 속에서는 자신의 억압된 내적 본성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으며, 투사의 대상이 된 사람과의 관계는 계속 나빠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투사 주체가 그렇다고 (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그런 사람이 결코, 절대로,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실로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애착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장 많이 짜증이 나고 가장 심하게 우울해진다. 그럴 때 융은, 상대를 비난하거나 자책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그렇다고 그런 절망감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도 말고, 자기 안의 인격화된 신들인 아니마와 아니무스에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긴 대화 나누기를 권한다.
"우울증을 잊어버리고 다른 일을 하려고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 그의 우울증을 받아들이고 우울증으로 하여금 발언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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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리아스>>의 첫 장면. 용감한 전사인 아킬레우스는 전리품 분배의 불공정함 때문에 '열받아서', 같은 편 대장인 아가멤논을 향해 당장 검을 뽑아 찔러버리고만 싶다. 그러나 그때 그의 눈에만 보이게 나타난 아테나 여신이 그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채자, 그는 여신에게 묻는다.
(아킬레우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가멤논의 교만을 구경하기 위함입니까?"
(아테나) "나는 그대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말다툼을 중지하고 칼을 빼지 말도록 하라... 지금 이 모욕으로 말미암아 빼어난 선물들이 세 배나 더 그대에게 돌아가게 하리라. 그러니 자제하고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하라."
(아킬레우스) "그대들의 말씀이라면, 여신이여!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복종해야 되겠지요. 복종하는 자의 기도는 신들께서도 기꺼이 들어주시는 법이지요."
지금 누군가 '자기 눈에만 보이는' 여신과 저런 대화를 나눈다면 그는 아마도 '미친놈'일 것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영웅이었다. 게다가 그는 여신과 약속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아가멤논을 향해 "주정뱅이 자식"이라느니 "개(파렴치함의 대명사) 눈에 사슴의 심장(지금으로 치면 '쫄보' 정도의 뜻)을 가진 놈"이라는 등의 심한 욕을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 대전투 중에 싸우지 않는 장기 파업으로 자기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런데도 그의 분노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지 못했고, 그는 결국 아가멤논의 사죄와 함께 신이 약속한 더 큰 보상을 받아냈으며, 트로이아의 용맹한 장수 헥토르를 죽여 그리스 군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 되었다.
"누구나 자기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대화할 능력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또는 누군가에게) 물음을 던진다. 우리 존재의 토대를 알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 은유 속에서 사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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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는 언제나 "아테나가 사랑하는, 준족의, 펠레우스의 아들"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등장한다. 고대인들은 단지 하나의 몸뚱이가 아니라, 신들과 종족과 때로는 동식물과 깊은 바다와 하늘 위 별들에까지 연결된 존재다. 인간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역시 바다의 요정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인간이라는 종(種)에 국한되고, 또다시 개인(個人) 안에 갇힌 현대인들은, 의식적 자아와 자신의 존재를 동일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잃어버린, 의식할 순 없으나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온 세계의 무의식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의 기분이나 정감,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끝없이 말을 건넨다. 융은 이런 것을 자기(Selbst)라 부른다. 우리가 믿어 마지않는 소중한 의식의 힘으로 그 신들에게 다시 인격을 부여하고, 이름을 부르고, 표현하기를 시도하라!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 (비록 명확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신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의식으로 끌어오고, 의식의 (오만한) 태도를 변화시키라! 그런 식으로 좀 더 풍성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 바로 개성화(자기-되기)다. 융의 이 용어는 그저 개인으로 살 줄 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주의와는, 아주, 아주, 아주, 거리가 먼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심혼과 더불어 내부와 외부의 의미 있는 작용 '사이'에 있으며, 어떻게든 그 둘에 대하여 공평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