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혼은 너(Du) 속에서 발견되는 측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3권 <<인격과 전이>> 의 <전이의 심리학 : 일련의 연금술 그림에 근거한 설명>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자기 모습-외양을 보고 싶을 때, 우리는 거울을 본다. 그러나 내면 혹은 영혼의 모습은 어디에 비춰볼 수 있을까? 융에 따르면,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다. (물론 꿈같은 것도 있다!) 우리의 내면은 타인에게 '투사'된다. 이는 우리가 일부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저 일어나는 일이라 한다. 그런데 이 자연적 거울은 수많은 조각들로 나뉜 채 비춰주기에, 웬만한 내공이 아니면 전체를 맞춰보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아무에게나 투사되는 건 아니다. 우리의 거울 역할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자신과 친밀한 이들이며, 그래서 내 감정이 잘 반응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투사가 일어나면, 서로의 무의식이 감응하며 둘의 관계는 '비현실적'인 정도로 친밀해지는데, 이런 '적절하지 않은' 친밀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극도로 괴롭게 만든다.
투사의 대상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이로 옮겨가는 '전이'는, 보통정신분석 상황에서 다루어진다. 보통 가족 구성원에서 일어났던 투사가 그와 유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는 분석가를 향해 옮겨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융에 따르면 이런 일은, 일상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했던 투사를, 어른이 되면 주변의 친밀한 사람들 특히 애인이나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서 되풀이하려는 것이다.
이런 투사의 끝없는 전이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과정에 대해서, 옛 연금술 그림을 통해 들려주는 융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그럴듯하고 유익하다. 비록 심리분석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나의 내면을 비춰보는 데 매우 유용할 것 같은 몇 가지에 대해 이곳에 기록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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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무의식이 감응하는 상황은 왕과 여왕의 신성한 결혼에 비유된다. 왕과 여왕의 결혼은 근친혼으로, 이는 보통 사람들에겐 금기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인류는 오래전부터 족외혼이 삶에 이롭다는 것을 알았기에 동족혼을 금기로 해왔다. 그 덕분에 문명을 얻었으나, 친족-동족을 향한 열정인 리비도는 억압된 채 인류의 무의식 속에 살아남아, 틈만 나면 '내 편'을 만들어내려 한다. (융은 종파, 당, 민족, 국가등을 모두 그런 친족-리비도의 발현으로 해석한다.) 낯선 이와 결합해야만 하는 우리 (불안한) 문명인은 모두 마음 한 구석에 (보통 사람이 아닌) 왕이나 신처럼 '근친적인', 즉 '비현실적으로 친밀한' 결합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외부적 현실에서, 실상은 너무 다른 특이성을 지닌 누군가와의 '근친적 결합' 때문에 괴롭다면, 무의식에 억압된 근친적 리비도에 대한 해방을 의식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물론 문명인인 우리가 무의식에서 리비도를 해방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근친적 결합을 시도해야 할 대상은, 자기 안에 자리 한 (아직 발현되지 못한) 온갖 모습의 자기다. (투사이론이 맞다면) 내 무의식이 투사된 그 사람에게서 느끼는 매력이나 혐오는, 실상 내 안에 있는 내 모습에 대한 매력이나 혐오이기 때문이다.
융은 투사와 전이 속에서 느끼는 괴로움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 강조한다. 그것은 자기 무의식이 가리키는 내면 인식의 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무 '달라서' 떠나버리고 싶은 옆 사람, 혹은 나와 너무 '닮아서' 그저 붙어있고만 싶은 그 사람이, 실은 내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내 안에 있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라면? 그 거울을 의식의 손으로 잘 쥔 채로 이리저리 움직거리면서, 자기 무의식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왕족의 형식적인 옷을 꼼꼼히 벗겨내봐야 하지 않을까.
“융합은 개인적 배우자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여성의) 능동적-남성성과 (남성의) 수동적-여성성 사이의 (왕王의) 놀이를 나타낸다."
오른쪽 벌거벗은 왕과 여왕의 그림을 보면 위로는 날개 달린 새가, 아래는 세계로 흐르는 샘이 연결되어 있다. 신성한 결혼이란 실상 둘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결합하는 것이란 의미일까. 또 인습의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왼손(무의식)끼리 직접 맞잡은 반면, 벌거벗은 뒤에는 두 손을 직접 맞잡는 대신 꽃송이를 잡고 있다. 여왕이 왼손으로 바치는 꽃송이를 왕은 자신의 왼손으로, 왕이 오른손으로 바치는 꽃송이를 여왕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받는다. 벌거벗은 진실 앞에서도 우리는, 그게 나 자신의 모습이든 타인의 모습이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혹은 여성성과 남성성 사이에서 적절한 관계와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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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결혼 후 이 둘을 기다리는 것은 물속에서의 융합과 죽음이다. 융합 역시 둘 만의 일이 아니다. 융합이 이루어지는 곳은 펄펄 끓는 뜨거운 물 속이고, 거기에서 둘은 물과 하늘의 새와 모두 뒤섞인 채 완전히 녹아버려야 한다. 그때 둘은 한 몸이 되고, 하나가 된 영혼도 하늘로 비상한다. 완전한 죽음이다.
예컨대 타자의 거울에 비친 무의식적 자기를 인식하는 일은, 의식적 자아에 극심한 충격을 주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또한 무의식은 집단적이기에 자아의식보다는 훨씬 광범위하고 파워풀하며 매력적이다. 따라서 의식은 언제나 무의식 속으로 침잠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무의식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이들에게 융은, 지적(知的) 작업을 통해 '혼돈의 덩어리'를 의식적으로 이해하면서 극복하기를 추천한다. ("많은 책을 읽어라!")
그러나 그 단계 역시 넘어서야 한다.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타인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 역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새로워진 영혼이 되돌아온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은 지적 이해가 아니라 자연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가 '죽음' 후 찾아오는 영혼의 '정화'로 비유한 이 단계를, 우리의 '의식적인'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런 뒤엔 책을 찢어라!") 그래서 그건 아무도 누설할 수 없는 '비밀'이다. 그러나 그 '비밀'을 아는 자들은, 오직 그런 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작업에 속하는 것은 실험하는 것, 책을 읽는 것, 명상, 그리고 인내심뿐 아니라 또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의 사랑은 물론, 그동안 의식이 만들어 놓은 환상적인 자아로부터 벌거벗은 자기에 대한 사랑이다. '정화'는 또한 뒤섞인 것들에 대한 분별이다. 자기비판을 견뎌낼 만큼 힘 있는 의식은, 자기 안의 모든 매력과 혐오들 특히 혐오스럽고 추악한 모든 모습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지 않고, 해를 입지 않으면서도 그와 더불어 사는 법을 익히고 수련한다. 그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는 순수한 자연이며 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쾌한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가 내버려 둔 것이 그 자신임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며 산다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자신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인내, 사랑, 믿음, 소망, 겸손이.. 자기 자신에게 요구된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나의 인내, 나의 사랑, 나의 믿음, 심지의 나의 겸손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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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죽음과 정화를 거쳐 되돌아온 혼으로 새로 태어난 것은 반음양적 양성자다. 두 개의 다른 성(性)이 붙어 혼합된 기괴한 양성자는, 화려한 옷을 입었던 왕과 여왕만큼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삶의 부조리에는 더 가까우리라!)
이 기괴한 양성적 존재는 더 이상 근친적 결합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자기 안에 이미 세계가 있는 그는 스스로를 수태하며 스스로 분만한다. 그는 무의식의 무(無) 시간성 속에서, 영원불멸에 대한 감정을 느끼며 살게 된다. 무의식 속에서 "모든 것은 이미 일어났으나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 그는 "이미 죽었으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나의 첫 번째 몸은 그래서 불운하다오.
아직 나는 어머니가 된 적이 없다네,
내가 다른 때에 다시 태어나기까지는.
이때 나는 나의 아들을 알게 되었다네.
그와 함께 둘이서 하나가 되었네.
거기서 나는 그로 인해 아기를 가졌고,
불모의 풀밭에 아기를 낳았다네.
나의 아들은 나의 아버지였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나를 통해 그녀는 이 땅에 태어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