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봉투 꿈아, 고마워!

by 미르mihr

간밤 꿈에 누군가에게 두둑한 돈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나는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꿈해몽을 검색하고 화면을 들여다본다. 검색된 목록들을 대충 훑어보니, 다들 좋은 꿈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도 어디 한 번 기대해 볼까' 하며 잠자리를 헤치고 일어났다.


실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소식이 있다. 얼마 전, 집 가까운 생협 매장의 활동가 모집에 지원했다. 망설이다 인터넷으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접수했지만, 일주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서류에서부터 탈락했나 싶었는데 돌연, 동네 그 매장으로 업무 체험을 하러 가라고 본사에서 전화가 왔다. 체험은 가장 바쁘고 고된, 오픈 직전 시간이었다. 새벽에 매장으로 공급된 물품들을 박스에서 뜯어 하나하나 진열하고, 입고 수량을 파악하고 영업시간에 맞춰 다시 매장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을 체험했다. 다들 손이 바빠서, 처음이라 뭘 모르는 나마저도 그냥 따라 바쁘게 움직여졌다.


체험을 해 보니 예상처럼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처음엔 다 그런 법이 아니겠나. 그 매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낯익고 내게 모두 친절했다. 그래서 나는 업무 분위기에도 금세 적응하고 일도 손에 빨리 익힐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집도 가깝고 내가 좋아하는 매장이고, 사람들마저 좋으니 오래오래 열심히 해야지, 홀로 이런 결심을 꼭꼭 다졌다.


그런데 그게 또 벌써 일주일 전이고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점점 자신감이 사그라들면서 이런저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매장 체험이 아니라, 사실은 비밀 면접이었던 건가?' '아니면 매장 체험 하는 동안 내가 무슨 중대한 실수를 한 건 아닐까?' '매장 체험까지 했는데 채용이 안 되면, 매장에 장 보러 갈 때마다 왠지 창피하고 속상할 것 같은데!' '생협에서 정년까지(?) 열심히 일한 다음, 누군가처럼 멋지게 나이 들어 세계 여행을 떠나리라는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지?' 등등.


걱정하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따뜻한 봄볕 덕분인지 아니면 바람에 날리는 꽃잎 덕분인지, '근데 왜 이리 쓸데없는 걱정을 또 하고 있을까'라는 자각이 들었다. 나는 늘 남보다 여러 가지에 신경을 쓰고 그래서 걱정도 더 많이 한다. 오늘 그 이유에 대한 깨달음은, '내 머릿속 상상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였다. 일도 시작하기 전부터 정년까지 일하고 세계 여행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걸 좀 보란 말이다. 몸은 느리고 게으른데, 아니 어쩌면 몸이 느리고 게으르니까! 그래서 답답한 머릿속이 저 혼자 바쁘게 핑핑 먼저 돌아가는 것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내가 다른 이들에게 마음 속엣말을 특히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잘 못하는 이유도 똑같은 것 같다. 내 머릿속에서는 한 보따리의 이야기가 이미 저만치 풀렸다가 다시 돌돌 말렸다가 바쁜데, 내 입은 머릿속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내 앞에 앉아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들은, 머릿속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며 말해야 하는 느린 내 입을 기다려주기엔 대체로 바쁘다. 그리하여 말이 되지 못한 내 안의 이야기와 미처 체험되지 못한 정신의 계획들은 신경줄 사이를 떠다니며 불안과 걱정으로 현현하는 것이 아니겠나.


내가 종종 꿈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매우 의아해한다. 철학을 꽤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은데, 왜 자꾸 미신적인 발언을 일삼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꿈 이야기를 하는 건, 미신을 믿거나 내 꿈이 예지몽이라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이 역시 나 나름은 철학적 실험의 일종인데, 우연처럼 보이는 무의식의 조각들에서 아무런 전제 없는 생각 거리를 건져 올리려는, (철학을 공부하다 알게 된) 비주체적 철학에 대한 시도일 뿐이다. 또 많은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꿈은 내가 모르는-내 의식이 억압하는 나의 감정에 대해 알려준다. 그러니 자기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서투른 나는, 어쩌면 꿈에 기대어 내 감정을 스리슬쩍 방출해 보려는 무의식적인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지난밤 돈봉투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하루 종일 기분 좋은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늘 아무 소식도 없이 하루가 지났다. 좋은 소식은커녕 많은 시간을 걱정으로 초조하게 보냈다. 그런데 실상 모든 것에는 반대면이 있었다. 걱정과 초조함으로 하루를 보내다가 그 걱정과 초조함의 원인에 대해 추측해 보았고, 그걸 다른 누군가에게 말로 하는 대신 글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철학공부를 하고 글을 쓴 지도 꽤 되었다. 그러나 지금껏 내가 써온 글은 주로 책과 그것도 딱딱하고 논리적인 철학과 인문학적 설명에 기반해 있다. 그런 글 속에 내 감정이 들어갈 자리는 당연히 없었다.


심리학자 융에 따르면, 의식과 무의식은 거의 반대적으로 서로를 보상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의식적으로 논리적인 글을 써왔던 나는, 무의식적으로는 매우 감정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무의식으로의 감정 억압) 따라서 내가 감정을 의식적인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같은 논리로, 무의식적인 걱정과 초조함은 줄어들어 그 에너지를 더 유용한 일에 쓸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 100일간 쓸 글은, 주로 일상에서 내가 놓쳐버린-혹은 억압한 감정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평소의 나와 달리 오늘 이런 생각을 해낸 걸 보면 '돈 봉투 꿈'은, 횡재할 아주 좋은 꿈이 맞는 것 같다. ^^*


(추신: 그런데 심리학자 융에 따르면 무의식의 시간관념은 의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모든 꿈이 예지몽이 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 관해 말해보자면...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