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4

나카자와 신이치

by 미르mihr


7장. 신발 한 짝의 수수께끼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들 속에서,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이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 수수께끼는 신화학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었는데, 레비스트로스가 이를 오이디푸스 신화와 연관시키면서 실마리를 제시했다. 오이디푸스는 한쪽 발의 복사뼈가 제 기능을 못해 자유로이 걷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과 오이디푸스가 살해한 그의 친부 라이오스라는 이름에는 ‘발에 결함이 있는’ ‘부상한 상태의’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오이디푸스 앞에 나타난 스핑크스는 망자 세계의 괴물이다. 이 괴물은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풀지 못하면 죽여버린다. 이로써 인간이란 언제나 ‘죽음’이라는 대지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는 존재임을 체현시키는 것이다. 수수께끼는 서로 동떨어진 의미 영역에 놓여 있던 이미지들이 ‘느닷없이’ 가까워지면서 놀라움이나 기쁨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렇게 ‘동떨어진 것들의 급격한 접근’은 신비롭고도 위험하다. 예컨대, 아들과 어머니는 서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는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에 과도하게 접근하고 그에 따라 엄청난 결례(살해)를 범했다.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오래된 제의 속에서 외발로 걷거나 달리는 모습은 대체로 ‘망자’를 표상한다. 망자의 영혼이 살아있는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 신발 한 짝을 벗고 있거나 절뚝거리며 나타난다는 전승 역시 널리 퍼져있다.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진즈부르그는 『어둠의 역사』에서 오이디푸스 신화 속의 부자유스러운 한쪽 다리가 인간이 ‘대지’에 묶여있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대지는 우리를 키우는 것이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이기도 하다. 또한 개체는 종(種)의 영속성이라는 부동성(不動性)의 중력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러한 ‘대지성(大地性)’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존적 의미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개체는 종을 영속시키고 죽음을 직면하게 하는 대지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런 것들을 부정한 것인가. 이런 질문 앞에서 신화는 인간은 언제나 대지에 속해있지만 그것을 ‘부정하면서 귀속된다’는 모순으로 답한다.


또한 진즈부르그는 “신발 한 짝은 저승 세계에 갔던 사람의 표지”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신데렐라가 만난 신분 높은 왕자의 왕궁은 실은 망자의 세계이며,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은 망자의 세계에 다녀온 신데렐라에게 새겨진 각인으로서, 그 신발을 찾으러 온 이들은 다름 아닌 저승사자들이었다고 말이다. 이런 생각에는 신데렐라가 실은 샤먼이었을 수도 있는 머나먼 시대의 기억이 배어있다.


샤먼은 망자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은 황홀경에 빠짐으로써 의식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기술과 특수한 체질을 소유했다. 특히 중국의 <섭한 이야기>에서처럼, 부서진 뼈로 원래의 몸을 재생시키는 것은 샤먼들의 특기였다. 게다가 주인공 섭한의 옷은 물총새의 깃털로 되어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샤먼들은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계(三界)를 중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새의 깃털로 장식한 옷을 주로 입었다. 이러한 샤머니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중개하는 기술로서, 삶과 죽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신화적 사고를 배경으로 삼는다.




종장. 신화와 현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신화적 사고법과 현대의 가상 기술이 연출하는 ‘신화’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화적 사고의 바탕에 깔린 것은 동물, 식물, 광물 등 구체적인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다. 여기에는 눈과 귀뿐만 아니라 오감과 육감까지도 포함한 복합적인 감각 전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점차 합리화만을 추구하게 되면서, 풍요로운 현실의 다채로운 정보는 점차 배제되어왔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만을 울타리로 에워싸게 되면서, 계획하고 예측 가능한 영역만이 ‘세계’로 간주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내부의 무의식 및 육체 사용법에서도 마찬가지다.


신화적 사고는 자유로운 상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체성의 세계에 의한 구속을 받았다. 그렇게 우주 속에서 구속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신화였기에, 철학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조건과 구속에 대한 이해 없이 펼쳐지는, 현대의 기술적으로만 뛰어난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신화 놀이는 그저 환각을 통한 쾌락을 제공하는 소비물에 불과할 것이다. 거기에서는 대체로 신화적 사고가 지녔던 구체적이고도 풍부한 내용은 제거된 채, 쾌락원칙만을 만족시키는 형태와 양식(樣式)만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오감은 높은 레벨로 합리화된 이미지만을 받아들이고 소비한다. 이는 삶의 윤리를 고민했던 신화적 사고와는 전혀 다르다.


예부터 제의에서는 사람에게 환각을 일으켜 가상의 체험을 제공하는 식물이나 약물이 사용되었다. 종교는 이런 다양한 환각을 ‘신의 출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초기 종교 텍스트인 <리그베다>에는 ‘소마’라는 식물의 즙이 등장한다. 이것은 즙을 짜내는 방법이 매우 특수하여 식물 그 자체가 신이라 불리기도 하며, 그 즙을 마시면 영감이 풍부해지고 의식이 고양된 상태에서 무아지경에서 나오는 찬가를 부르게 만들기에 역시 신이라 불리며 숭배를 받는다.


오랫동안 이 소마의 정체는 수수께끼였는데, 러시아 학자 R.G. 왓슨이 <리그베다>의 표현을 근거로 광대버섯이라 추측해냈고 이는 많은 지지를 얻었다. 브라만들은 기원전 2천 년대에 인도로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소마의 원료가 되던 광대버섯의 서식지와는 멀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까지도, 경전에서 말하는 소마가 본래 무엇이었는지도 모른 채, 형식적인 제의를 계속해오고 있다. 이처럼, 종교는 현실로부터 괴리되어도 순수한 환상과 상상력에 의해 계속될 수 있다.



광대버섯



이와 달리 신화는 현실의 구체적인 존재나 사실, 현상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신화의 소재는 오감이 파악하는 현실이며, 신화 창조의 재료는 현실의 사회 구조와 환경과 자연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소마의 실체일 광대버섯과 관련된 자연 민족의 신화를 보면 <리그베다>와는 달리,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만한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과 시베리아 북동부 사람들의 문화에는 광대버섯을 사용한 제의와 신화가 퍼져 있다. 그중 캄차카 반도의 선주민 이테리멘족 사이에 전승되는 신화 <체리쿠토프와 광대버섯 아가씨>를 살펴보자. (체리쿠토프는 북방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문화영웅임)


『체리쿠토프가 갈가마귀 쿠토프의 딸 시나네프토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어느 날 체리쿠토프는 숲에서 아름다운 광대버섯 아가씨들을 발견해 그 아가씨들과 숲에 머무르며 아내를 잊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아들을 아버지한테 보냈다. 그러자 아버지 체리쿠토프는 광대버섯 아가씨들에게 ‘가서 저 아이를 뜨거운 장작으로 지지라’고 했고 아들은 화상을 입고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이런 과정이 두세 번 반복된 후에 소년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가서 이런 협박의 노래를 불렀다.


‘우린 내일 보물을 전부 갖고 가버릴 거야. 아버지와 광대버섯 아가씨들은 모두 굶어 죽을 거야’


그래도 체리쿠토프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광대버섯 아가씨들을 시켜 아들을 채찍질하고 불로 지져 쫓아냈다. 아들은 전신에 화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러나 가족 중의 노파가 입김을 불어주자 불에 덴 자국은 금방 사라졌으며, 노파와 가족들은 높은 산에 올라 산에 물을 부어 빙산을 만들었다. 배고픈 체리쿠토프는 숲에 갔지만, 한 마리의 짐승도 잡을 수 없었다. 궁지에 몰린 체리쿠토프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고 후회하며 돌아온 그를 모두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맞이한다. 광대버섯 아가씨들은 물이 없어서 죽어버렸다.』


위 이야기에서 매력적인 광대버섯의 환각작용에 이끌려 체리쿠토프의 부부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테리멘족은 광대버섯이 일으키는 강력한 환각작용을 매혹적인 자연의 유혹으로 표현하고, 그 유혹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푹 빠져버리는 것에 대한 위험을 경고한다. 그들은 광대버섯 제의를 매우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사고하는 철학인 신화로서 현실과 환상 사이를 중개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신화는 언제나 현실과의 대응 기능을 절대로 상실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현실 세계를 버리고 체리쿠토프처럼 가상의 시계에 빠져버리고 싶은 욕망이 존재하며, 신화는 언제나 이런 위험성에 대해 잊지 않고 경고해왔다. 인간이 마음속 가상 영역에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가면, 인간은 자연과 우주 속에서 균형을 잃는다. 그런 때에 양식(樣式)뿐만 아니라 풍부한 내용을 갖춘 신화라면, 구체성 세계의 풍요로움을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