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우주 질서에 대한 생각 - 2
세계산과 사방(四方) 같은 공간적 질서가 있듯 어디서나 정확하게 계산된 일, 월, 년 그리고 겁(劫)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시간적 질서 역시 존재한다. 인도에서 비슈누의 꿈속에 나타나는 창조신 브라흐마의 형상은 100 브라흐마년 후에 사라진다. 1 브라흐마년은 360 브라흐마의 낮과 밤이고, 이 각각의 낮과 밤은 1천2백만 신성년이며, 또 각각의 신성년은 인간의 360년이다. 1 브라흐마 상에서 인간의 1년은, 하루 24시간 중 심장이 한 번 박동하는 단 1초에 해당된다. 이러한 신화적 시간 질서는 소우주인 인간 신체의 리듬과 대우주의 순환 리듬이 상응한다는 관념 위에 세워져 있다.
각각의 브라흐마의 한 생애가 끝날 무렵, 브라흐마와 모든 것들은 우주의 꿈을 꾸는 자 비슈누의 몸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간다. 그 떼 비슈누는 브라흐마의 한 생애만큼의 시간 동안 꿈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진다. 그러다가 그의 몸속에서 다시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연꽃의 꿈이 다시 펼쳐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다. 시간의 무한성 안에서 시작이 없듯, 피고 지는 브라흐마의 세계에는 끝도 없다.
멕시코에서 역사 이전의 네 시기는 각기 하늘의 다른 방향으로부터 기원하였는데 이는 놀랍게도 고대인들에게 알려진 네 가지 원소인 땅, 바람, 불, 물과 연관된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세계의 원소는 다섯 가지로 인식되었다. 공간 또는 에테르, 공기, 불, 물 흙의 순서로 내려가면서, 각 원소에는 청각, 촉각, 시각, 미각, 후각의 다섯 가지 감각이 하나씩 연결된다. 그리하여 대우주의 질서와 소우주의 질서가 조화된다. 중국에서도 세계의 원소는 나무, 불, 흙, 쇠, 물로 다섯 가지다. 보통 이 순서대로 상생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중국의 우주관은 아즈텍의 각 원소처럼 세계의 방위와 시간의 나뉨, 색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에서 원소들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랑과 다툼이라는 결합과 분리의 원리다. 엠페도클레스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 원소들은 차례로 우세한 힘을 발휘하며, 각기 정해진 순서에서 거대하게 자라난다”라고 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랑이 아니라 다툼이 대립쌍을 한데 모아 우주를 유지하는 원리라고 보았다. 아즈텍과 마야 같은 중앙아메리카에서도 대립쌍들을 묶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다툼이었다. 다툼의 신비는 전쟁과 신성한 공놀이 경기라는 지고한 형태로 상징화되었다.
깃털 달린 뱀의 전설
전투 원리보다 훨씬 본질적인 이원성을 보여주는 것은 남성-여성이라는 양극이다. 아즈텍인들은 만물의 궁극적 원천이자 바탕을 초월적-내재적 쌍둥이 신이자 이원성의 신 오메테오틀로 형상화했다. 이 신은 이원성의 장소인 오메이오칸에 사는데, 이 세계산 주변의 거대한 우주는 쉼 없이 돌고 있다. 그곳에서 여신과 남신에게 가르침을 받은 퀘찰코아틀은 그들의 메시지의 화신이 되어 지상으로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퀘찰코아틀은 치말만이라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고귀한 집의 딸인 그녀에게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 ‘아침’이라 알려진 모습으로 나타나 숨을 불어넣자, 치말만은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다가 죽어 영웅들의 천국에서 살게 되었고 ‘희생양의 귀한 돌’이라는 이름으로 경배된다. 그녀의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모든 지식과 지혜를 타고났으며, 나중에는 톨란의 사제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나라는 그가 통치하는 내내 번영을 누렸다.
그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이 다 채워지고 예정된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의 궁전에 한 젊은 신이 찾아왔다. 그는 토끼 가죽으로 싼 거울을 들고 와 왕에게 “당신의 살을 살펴보시오!”라고 외쳤다. 퀘찰코아틀은 주름지고 늙고 종기로 뒤덮인 자신의 얼굴을 보고 오싹해져 말했다. “나의 백성들이 내 얼굴을 보고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는 신이 내민 마법으로 빚은 술을 그의 누이인 퀘찰페트라틀과 함께 마셨다. 그 둘은 이성을 잃고 함께 뒤엉켰고, 새벽에 정신을 차린 퀘찰코아틀은 “나는 죄를 지었기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며 자신의 궁전을 불태우고 슬픔에 잠겨 그곳을 떠났다.
그는 많은 징표와 지명을 남기며 길을 가다가, 결국 하늘과 땅과 물이 만나는 곳에서 수많은 뱀을 타고 떠나갔다. 다른 판본에서는 그의 남아있던 시종들이 장례용 장작더미를 쌓아 올리자, 스스로 몸을 던져 육신을 태웠는데 나흘 후 그의 심장이 샛별이 되어 나타났다고도 한다.
*
현세의 장벽과 법칙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드러나는 성스러운 장소에 대한 사고는 분명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야곱의 꿈 이야기도 그런 신비한 가르침의 예다. 장자 상속권을 얻어낸 야곱이 하란으로 향하던 첫날, 그는 해가 저물어 어떤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려고 돌 하나를 베개 삼아 잠들었다. 그때 꿈을 꾸었는데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다. 또한 놀랍게도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야곱은 놀라 잠에서 깨어 생각했다. ‘주께서 분명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축이나 기둥의 이미지는 움직임에서 정지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분리에서 통합을 향해 가는 길이나 장소를 상징한다. 그 반대 즉, 정지에서 움직임으로, 영원에서 시간으로, 통합에서 다수성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나타난 에덴동산에서 그런 이미지는 생명의 나무와 선악과나무로 등장한다.
티치아노가 그린 <인간의 타락> 속 나무는 양쪽을 가르는 매개이다. 이 나무를 통해 하나가 둘로 보이며, 한 명의 유혹자가 두 국면(아기천사-뱀꼬리)으로, 인간 역시 남자(=이해와 공포)와 여자(=욕망)라는 두 국면으로 나타난다.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야훼는 그들을 추방한 후 “에덴동산의 동쪽으로 모든 길의 방향을 바꿔놓고 생명의 나무로 향하는 길을 지키기 위해 아기천사와 번쩍거리는 검을 가져다 놓았다.”
한편 불교에서는 그런 관문을 통과하여 ‘완전한 앎에로 깨어남’의 나무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욕망과 두려움에서 해탈하는 길을 인류에게 열어줄 때, 붓다는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붓다의 전설에서도 유혹자는 나무 주위에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욕망을 자극하는 자’인 카마로 나중에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인 마라로 나타났다.
이 전설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그림 181) 붓다의 자리에 붓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절대적 무아의 경지에 이른 유일자로서, ‘부동의 지점'에 서 있는 세계축의 나무 아래인 성좌에 모셔졌다. 이곳은 모든 대립물들이 모여드는 곳이며, 욕망과 죽음의 신 역시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 이곳으로 왔다. 만약 축복받은 자가 ‘나’를 생각했다면, 그는 ‘그들’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아상(我相)이 없었기에 동요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