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이미지 5

조지프 캠벨

by 미르mihr


Part 4. 내면의 빛의 변형



심리학과 요가는 세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개인의 운명은 그의 심리적 성향의 작용이라는 생각. 둘째, 신화와 종교의 형상들은 초월적 세계로부터의 계시가 아니라 정신생활의 발현이며 환상의 투영이라는 생각. 마지막으로 개인의 성향은 그의 꿈과 운명적 사건들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변형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도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어둡고 악마적인 힘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있어왔고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이는 한편으로는 카스트 제도라는 엄격한 사회적 규율의 힘을 통해서였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영적 열림의 모험을 향한 재능을 부여받은 자들이 행하는 요가 규율의 엄격한 적용에 의한 것이었다. 기원전 9세기라는 이른 시기에 인도의 모든 신화와 의례적 형상들에는 근본적으로 심리학적 해석이 부여되었다.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각기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라고 한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이며, 그 자신이 모든 신이다. 그는 우주 속에 심지어 우리의 손톱 끝까지 들어와 있으며, 그것은 마치 칼이 칼집 속에 들어 있거나, 불이 장작 속에 들어 있는 것과도 같다. 그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것은 완전한 그가 아니다. 숨을 쉴 때 그는 ‘숨’이라 불리고, 말을 할 때는 ‘목소리’라 불리며, 볼 때는 ‘눈’이라 불리고, 들을 때는 ‘귀’라고 불리며, 생각할 때는 ‘마음’이라고 불린다. 이것들은 그가 행하는 일에 따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 어느 하나만 숭배하는 사람은 그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자아이며, 그 속에서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숭배해야 한다. 이 자아는 저 모든 것의 발자국이며, 그것으로 한 사람은 이 모든 세상을 알게 된다.”


<설교하는 붓다의 연꽃을 받치고 있는 한 쌍의 뱀 왕>, 2세기, 인도


이런 깨달음의 단계가 심리학적 체계를 갖춘 형태로 발전한 것이 바로 ‘뱀의 힘’이라 불리는 인도의 요가 ‘쿤달리니’이다. 그 기본이 되는 글 <요가 수트라>는 고대의 성자 파탄잘리가 썼다고 전해진다. 전설에서 파니니라는 문법학자가 기도하기 위해 두 손바닥을 모았을 때, 천상으로부터 작은 뱀의 모습을 한 파탄잘리가 파니니의 두 손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뱀의 이미지는 죽음에 대한 초월의 두 가지 사고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편적으로 뱀이 허물을 벗는 이미지는 윤회, 영원회귀, 달의 차오름과 이지러짐처럼 죽음과 재생 등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요가의 목표는 태양처럼 꺼지지 않는 빛을 얻음으로써 영원한 순환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꽃 대좌 위에 앉은 붓다는 한 쌍의 뱀 왕에 의해 바다의 심연으로부터 솟아난다. 그러므로 우리도 뱀의 힘에 의해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붓다, 즉 태양신의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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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yoga’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 동사 어근 ‘yuj’에서 온 것인데. 이는 ‘이어 매다, 결합하다’라는 뜻으로,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결합시킨다는 의미이다. 요가를 통해 의식은 그 근원과 결합되며, 인간이 근원과의 자기 동일성에 대한 앎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달 아래 일시적인 의식을 반영하는 모든 빛을 모든 의식의 영원한 태양적 원천과 결합하는 것과 같다. 인도 요가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인데, 성자 아루니는 그의 아들에게 이런 말로 그것에 대해 알려주었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내 아들아, 너는 이미 네가 알기를 원하는 의식의 빛이며 존재의 지반이며 진실의 지복인 네 자신이다.”




요가 수행자는 자연현상 전체를 관통하고 형태, 이름, 관계까지, 그 모든 것을 (뱀이 허물을 벗듯이) 벗어던진다. 그리고 모든 것을 관통하면서 빛나는, 분화되지 않은 의식만을 명상 속에 남겨둔다. 예컨대, 주변에 있는 아무 사물을 집어 들고 마음속으로 그 둘레에 원을 그려 세계로부터 격리시키자. 그것의 용도도 잊고 그 이름도 잊고 그것이 무엇으로 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부분 부분을 뭐라고 부르는지도 잊자.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자. 그랬을 때,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든 간에 이런 식으로 모든 개념에서 분리된다면 그것은 특정한 ‘의미’를 갖지 않는 경이로 비칠 것이며, 그 자체로 처음이자 끝인 것, 즉 마치 보편자 ‘여래’처럼 비칠 것이다.


요가는 임의대로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것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에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상태에 이르려해야 하는가? 마음은 바람에 의해 물결이 이는 연못에 비유할 수 있다. 요가의 사고방식은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물결치던 수면에서 조각조각 왜곡된 파편적 이미지들이, 거울처럼 잠잠해진 수면에서는 하나의 이미지로 맑게 지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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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떻게 바람을 잠재울 것인가가 요가의 첫 번째 과제이다. 이는 엄밀히 심리학적 문제로서, 우리 정신의 관심을 표면에서 내면을 향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삶의 수면에서 노니는 사물의 표면에 정신을 되돌려야 하고, 변화하는 사물들의 즐거움과 자기 내면에 고정된 중심을 유지해야 한다. 사물과 내면, 그 둘은 형식적으로는 다른 지평으로 경험되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피안의 지혜 ‘반야 바라밀다’의 처음이자 끝이다.


“모든 것은 텅 빈 것으로 관찰된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을 안다 해도, 사물들은 파괴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자신을 공(空)의 한가운데에 두는 것이다. 그가 사물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사물에 주의를 빼앗기지도 않는다.”


<눈이 달린 천 개의 손과 열한 개의 머리가 달린 관세음보살>, 19세기, 중국



전설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고통받는 이 세계를 내려다보고 자비심으로 가득 차, 머리에서 수없이 많은 머리가 솟아나고(도상학적으로는 11개로 그려진다.) 몸에서는 도움의 손길이 달린 천 개의 팔이 솟아났는데, 이것은 마치 휘황찬란한 광배와 같았다. 또한 그 각각의 손바닥에는 무한한 시야를 가진 눈들이 나타났다.


위 그림의 꼭대기를 보면 관세음보살은 신들 사이에서 ‘땅을 건드리는’ 자비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그의 왼쪽과 오른쪽 아래에는 태양과 달이 있다. 피라미드처럼 솟아있는 머리 꼭대기에는 붉은색의 머리가 있는데, 그것은 아미타불의 머리이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자비심을 이 세상에 전하는 가장 주된 사신이다.


<연꽃을 든 관세음보살>, 600~642년, 인도


대승불교의 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의 과업들 가운데 가장 높은 이상의 화신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열반의 경지로 막 들어가려 할 때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전 세계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이 위대한 존재는 그 소리가 모든 피조물들, 즉 우주 모든 곳의 바위와 돌, 나무, 벌레, 신, 짐승, 정령 그리고 인간들이 그가 탄생의 왕국에서 떠나려 함을 알고 내는 슬픔의 탄식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는 자비심으로 모든 존재들이 그보다 앞서 열반에 들어갈 준비가 될 때까지, 자신을 위한 열반의 은총을 포기했다. 관세음보살의 몸에 있는 모든 숨구멍은 수천 명의 부처들과 온갖 성자들과 세계 전체를 담고 내보낸다. 그는 수많은 팔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모든 손바닥에 눈이 달려있고 그 눈은 세계의 슬픔을 꿰뚫어 보고 동정심에 구원의 눈물인 ‘타라’를 흘린다.